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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18)화 (118/129)

“이건…….”

장신구를 모아 둔 서랍 구석에 끼어 있던 서류 봉투를 찾은 나는 바로 레이넌에게 건넸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받아 들고서는 나와 서류 봉투를 번갈아 바라봤다.

레이넌의 작은 도서관에 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만 채워지면 돼. 그러면 오히려 우리 쪽에서 먼저 칠 수도 있지.”

“그래. 그것이 바로 슈나이더의 가장 큰 약점이고, 그가 저지른, 저지를 일에 대한 증거이자 우리에게는 그를 밀어낼 명분이지.”

“부정한 자금의 출처, 그리고 그것의 자세한 사용처.”

내가 잠들었을 때 로만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명분이 부족하다고. 잘못하면 오히려 슈나이더에게 당당히 역공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것이라고.

슈나이더는 이것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 몰라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레이넌 역시 이걸 얻지 못해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가 오래도록 준비해 온 일을 빈틈 없이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꼭 얻어야 했던 물건이었다.

레이넌이 내가 건넨 서류 봉투를 들고 황당해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 터였다.

두 사람 모두 그렇게 열심히 찾던 물건인데 가치도 모르는 내 손에 있었다니.

아마 슈나이더도 나중에 알게 된다면 많이 억울해할지도 몰랐다.

“그때 말씀하셨던 슈나이더를 치는 데 필요한 마지막 한 가지. 이거 맞죠?”

내 질문에 레이넌은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서 훑어봤다.

한 장을 읽고는 내 얼굴을 바라보고 또 한 장을 읽으면 나를 바라보길 반복했다.

그는 대강 훑어본 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서류를 봉투에 넣으며 대답했다.

“그래. 형님한테 들은 것보다 훨씬 자세하군.”

“이런 걸 왜 서류로 남겨 놔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슈나이더에게는 약점이 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내용을 왜 굳이 글로 남겼을까.

“이런 일을 도모할 때는 뭔가 남기지 않고서는 좀처럼 참여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 법이거든.”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건가요?”

“그래. 게다가 슈나이더의 성격 때문일지도. 다른 사람을 옭아매기 적절하다고 여겼겠지. 더불어 이렇게 잃어버릴 리 없다는 자만심도 한몫했을 테고.”

“자신의 약점을 다른 사람의 약점으로 써먹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말인가요?”

“그러고도 남지. 그보다 그대가 왜 이걸 가지고 있지?”

“에린의 옷장에 숨겨져 있던 거예요.”

“에린의 옷장에 있었다고?”

“네. 제 드레스를 에린의 방으로 옮길 때 세실이 도왔거든요. 뭔가 수상한 걸 숨겨 놓은 걸 봤다고 해서 제가 챙겼는데 열어 보는 걸 깜빡했어요.”

내 말에 레이넌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잠깐 눈 떴을 때 공작님 손에 들려 있던 봉투를 보니까 떠올랐어요. 왜 도서관에서 봤을 때 낯익었는지.”

나는 뜯긴 실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문양이 익숙했던 거예요. 슈나이더가의 문양인 거죠?”

“그래.”

레이넌은 여전히 황당한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찾던 게 이런 곳에 있을 줄이야. 하긴, 누구든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나에게든, 슈나이더에게든 가져오게 되어 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에린이 자기 짐을 챙길 틈도 없이 쫓겨나서 다행인 거죠.”

“그래. 방에 아예 돌아가지 못하게 하길 잘했군. 아니. 잘했어, 르네.”

“오랜 악연을 끊어 낼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레이넌은 내 손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그래. 그대 덕분에.”

***

르네는 참 알다가도 모를 여자였다.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던 걸 가지고 있으면서도 몰랐다니.

그래도 기억해 냈다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서류 봉투를 건네며 웃는 르네의 얼굴은 해맑아서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졌다.

레이넌이 전날 화가 나서 찢어 버린 빈 서류 봉투가 다시 돌아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르네는 이걸 찾았으니 바쁘겠다며 얼른 가서 일하라고 레이넌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그는 르네의 곁을 지켰다.

그녀가 곤한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들 때까지.

다행히 르네의 얼굴색은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잠들고도 특별히 불편해 보이는 곳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레이넌은 비로소 안심했다.

르네의 방을 나선 직후에는 레이넌의 걸음은 여유로웠으나 그를 끝까지 유지하지는 못했다.

조금씩 그의 걸음은 빨라졌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걸 드디어 손에 넣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레이넌의 자리에서 업무를 보던 로만이 피곤한 얼굴로 그를 반겼다.

“그거 어제 찢어 버리신 거 아닙니까?”

레이넌의 손에 들린 봉투가 로만의 눈에도 가장 먼저 띈 모양이었다.

또 다른 봉투가 있었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로만이 묻자 레이넌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네가 말하던 ‘명분’이 르네의 손에 있더군.”

“명분이요?”

그게 무슨 말인가 잠시 눈을 굴리며 생각하던 로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곧 로만은 어느 때보다 빠른 몸놀림으로 레이넌의 앞에 앉았다.

“정말입니까?”

“그래.”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묻는 로만에게 레이넌은 서류 봉투를 건넸다. 로만은 얼른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훑기 시작했다.

얼핏 봐도 그들이 찾던 물건이 맞는다는 걸 확인한 로만은 레이넌이 그랬듯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르네 님께 있었다고요?”

“그래.”

“르네 님이 왜 이걸 가지고 계셨답니까?”

“에린이 가지고 있었다더군. 에린이 빼돌렸든 다른 누군가가 그랬든 슈나이더에게 내쳐질 때를 대비해 준비한 카드였던 모양이야.”

“슈나이더가 사람을 물건 취급하기로 유명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걸 그의 손에서 빼내다니요.”

로만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황당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꽤 철저하게 관리했을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저희도 쉽게 접근하지 못했을 정도인데요.”

“그래. 그게 제 발목을 잡은 거지. 한 사람의 한 번의 시도.”

“그 말씀은…….”

“그래. 슈나이더에겐 그게 몇 명이나 될까. 한 번의 시도가 몇 번이나 모였을까.”

“셀 수 없겠군요.”

“그러니 슈나이더도 누가 가지고 있을지 짐작도 못 했을 거야.”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금 서류를 멍하니 읽어 보던 로만은 헛웃음을 흘렸다.

“르네 님이 가지고 계셨다니. 하여간 르네 님은 이상한 곳에서 운이 참 좋으시다니까요.”

“그러게 말이야. 의도하진 않는데 일을 이상하게 풀어 가는 재주가 있다니까.”

“그래서 처음부터 공작님이 눈을 못 떼신 거겠죠.”

“처음부터?”

로만의 이야기를 들은 레이넌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되물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로만은 그의 무딘 신경에 황당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처음부터죠. 그 정도로 귀찮게 하는데 그냥 내버려 둔 건 르네 님이 유일하지 않습니까.”

레이넌은 처음 르네를 만났던 무렵을 떠올렸다.

그녀는 귀찮을 정도로 꾸준히 레이넌의 주변에서 얼쩡댔다.

그러나 화가 나기는커녕 오늘은 어떤 표정을 보일까, 무슨 말을 할까 기다려지곤 했다.

“하긴 처음부터 남다르긴 했지.”

잠시 르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두 사람은 여전히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진지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했다.

“저희도 그렇지만 슈나이더 역시 전혀 짐작도 못 한 모양입니다. 알았다면 몰래 빼내는 건 일도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 성격에 상상도 못 했겠지. 슈나이더에게 에린은 아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을 거고. 아니,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을까.”

“공작님, 이제 다 됐습니다.”

로만은 벅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서류를 누구보다 간절하게 찾아다닌 건 바로 로만이었다.

어쩌면 레이넌보다 더욱더 간절하게.

레이넌이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옆에서 가장 오래 지켜봐 온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그였다.

이 모든 걸 제 손으로 끝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로만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로만은 레이넌의 능력을 의심하진 않았다. 하지만 레이넌과 로만이 태어나기 전부터 오래 이어져 온 질긴 대치였다.

그러니 그 끝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실감 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드디어 끝이 보입니다.”

“그래.”

조금씩 흥분하는 로만과는 달리 레이넌은 점점 더 차분해졌다.

“가서 에드윈을 불러오도록 해.”

“에드윈 님을요?”

“그래.”

레이넌이 왜 지금 에드윈을 찾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로만은 군말 없이 집무실을 나섰다.

혼자 남게 된 레이넌은 그제야 피곤한 얼굴로 소파에 기대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래. 이제 끝낼 때가 됐지.”

그의 목소리와 표정에서는 여러 감정이 뒤섞였다.

눈을 감고 있으나 수없이 많은 광경이 생생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 형님.”

어렸을 때는 그들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숨기기에 급급한 제 존재는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인 건가, 그렇게 여긴 적도 있었다.

조금 더 커서 알았다. 그만큼 그들은 레이넌을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을.

당신들이 더 큰 위험에 노출되고 레이넌을 가려 줬다는 것을.

“태어날 아이는 나처럼 위험 속에서 키우고 싶지 않아.”

“형님.”

“네게 이 아이를 부탁해도 될까. 적어도 스스로 위험을 헤쳐 나갈 수 있을 나이가 될 때까지만이라도.”

임신의 기쁨도 잠시, 레이넌의 형 부부는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안전부터 걱정해야 했다.

아들이든 딸이든 벗어날 수 없는 위험이었다. 차기 로에리안 공작의 자녀라는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공작 부인은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요양을 떠났고,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레이넌은 결혼도 하지 않은 몸으로 아버지가 되었다.

에드윈은 공작 위와는 한결 멀어진 레이넌의 불장난의 흔적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로써 에드윈은 슈나이더의 위협에서 멀어졌다고 믿었다.

레이넌은 공작이 되지 않을 것이고, 에드윈의 출생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러니 누가 보더라도 에드윈에게 차기 공작 위가 넘어갈 일은 없었다.

오직 에드윈이 안전하기를 바라서 많은 것을 포기하게 했고, 많은 오해를 뒤집어씌웠다.

하지만 결국 에드윈은 차기 공작의 자리로 돌아왔다.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 찾으셨어요?”

에드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서야 레이넌은 마음 깊이 묻어 놨던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눈을 뜨자 형님을 쏙 빼닮은 푸른빛 눈동자가 보였다.

이제는 형님을 떠올리기보다 르네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눈동자가 되었지만.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

“네.”

에드윈은 저 때문에 르네가 독을 먹었다고 알고 있는지 조금은 침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니는요?”

“괜찮아. 며칠 기운은 없겠지만 크게 이상은 없을 거라더군. 조금 전에 깨어났을 때 보니까 괜찮아 보였고.”

“다행이네요.”

르네가 괜찮다는 말에도 에드윈은 좀처럼 표정을 풀지 못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때문인 거죠?”

“아니.”

레이넌은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게 에드윈은 조금 뜻밖이었는지 놀란 눈으로 레이넌을 바라봤다.

“이건 슈나이더의 잘못이지, 네 잘못이 아니다. 네가 독을 먹었다면 오히려 르네가 자책했겠지.”

“그래도 어머니까지 노린 건 너무했어요. 저는 그렇다고 쳐도 어머니는 아무것도 모르고 휘말린 거잖아요.”

“‘저는 그렇다고 쳐도’라.”

레이넌은 작은 목소리로 에드윈의 말을 되뇌고는 피식 웃었다. 눈앞에 있는 에드윈과 어린 시절의 제 모습이 조금은 겹쳐 보였다.

아무리 사람들의 입을 막아도 결국 모든 이야기가 흐르는 걸 막을 순 없었다.

게다가 총명한 아이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왜 제가 공작의 아들임에도 초라하게 지내야 하는지 진작 이해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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