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의 인생에 이런 얼굴을 할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절박한 표정을 보자 내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든 그를 쓰다듬고 달래 주고 싶었지만 그 정도로 기운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한 한 최대한 높이 손을 들었다. 그의 얼굴에 닿을 수 있게.
힘겹게 올라가는 손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아챈 레이넌이 얼굴을 아래로 내려 줬다.
더불어 내 손을 제 두 손으로 꼭 감싸서 더는 힘이 들지 않게 도와줬다.
덕분에 나는 큰 기운을 쓰지 않고 레이넌의 얼굴을 쓰다듬을 수 있었다.
그는 내 손에 얼굴을 묻고 깊숙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몇 번의 큰 심호흡을 한 후에 레이넌은 그 자세 그대로 내게 물었다.
“정신이 드나, 불편한 곳은 없고?”
그의 물음에 괜찮다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잘 흘러나오지 않았다.
바람 새는 소리만 이어지자 레이넌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무리하지 마. 아직 더 쉬어야 한다고 칼슨이 말했으니까.”
그래도 조금의 안심이라도 더 주고 싶은데…….
나의 미약한 움직임만으로도 그는 내 마음을 알아챈 것처럼 다시 손에 얼굴을 비볐다.
“괜찮아. 이 정도라서 다행이야. 내 앞에서 사라지지만 마.”
그리고 다시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내 손에 대고 속삭였다. 나만 들을 수 있게.
“그대를 잃을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라.”
무거운 숨이 손에 내려앉았다. 꼭 그의 마음의 무게와 같이 느껴져 레이넌이 안쓰러웠다.
잃다니. 조금 전에도 크게 아프지 않을 거라 내게 독을 먹인 거냐는 아멜리아의 물음에 긍정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아 반박을 할 수도, 그를 달래 줄 수도 없었다.
갑자기 움직여서일까. 혹은 눈을 떠서일까.
어지럼증이 다시 세게 밀려왔다. 빙글빙글 도는 세상에서 레이넌의 얼굴만이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참을 수 없이 무거워진 눈꺼풀은 결국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 그를 달래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봉투에 대한 사실을 알려 줘야 하는데.
하지만 눈은 그대로 감겼고 의식은 어디론가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놀란 듯 내 이름을 외치는 레이넌의 목소리도 의식을 따라 천천히 아득해졌다.
***
잠에서 깨어나자 이번엔 상태가 확 달라져 있었다. 한결 가벼워진 눈꺼풀처럼 몸 역시 그랬다.
눈을 깜빡이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자 다행히 평소처럼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머리도 아프지 않았고 어지럽지도 않은 걸 보니 해독은 끝난 모양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자니 가위에 눌린 듯 귀로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에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얼른 몸을 일으키려고 하던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넌이 내 손을 잡고 얼굴을 묻은 채 엎드려 있었다.
내가 움직였는데도 반응이 없는 걸 보니 레이넌은 이 상태로 잠든 듯했다.
그를 깨우거나 손을 빼려는 노력 대신 나는 몸에 힘을 풀었다.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레이넌이 기다려 준 만큼 나 역시 기다릴 수 있었다.
중요한 일이긴 했지만 그의 단잠을 빼앗을 정도로 촌각을 다투는 일은 아니기도 했다.
잠든 레이넌의 얼굴을 한참 보고 있으니 문득 아쉬움이 들었다.
고개를 조금만 위쪽으로 돌려 주면 얼굴이 더 잘 보일 것 같은데.
움직이지 않는 그 대신 내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가며 레이넌의 얼굴이 가장 잘 보이는 각도를 찾기 시작했다.
“이 얼굴이 마음에 드나?”
그의 얼굴을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레이넌의 잠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잊었다.
이리저리 그의 얼굴을 조금 더 잘 볼 수 있게끔 꿈틀거린 탓에 레이넌의 잠을 깨운 듯했다.
“깨셨어요?”
“이렇게 열렬히 바라보는데 잘 수가 있나.”
그의 말에 나는 멋쩍게 웃었다.
레이넌은 잠을 방해받아 언짢다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그를 열심히 보고 있어 기쁜 듯 보였다.
“공작님 얼굴을 더 잘 보고 싶어서요.”
“이 정도면 됐나?”
얼굴을 더 잘 보고 싶다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레이넌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내 쪽으로 조금 기울여 주었다.
“아니요. 조금 더 오른쪽으로.”
“이렇게?”
“네. 그리고 조금 더 아래쪽으로요. 네. 딱 좋네요.”
그는 친절하게도 내가 원하는 각도가 나올 때까지 세심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민망하긴 했지만 레이넌이 협조적이니 나는 원했던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잘생긴 얼굴이 각도를 따지지 않겠지만 기왕이면 완벽하게 볼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이제 마음에 드나?”
“네. 참 잘생기셨네요.”
“사람을 놀라게 해 놓고 그대는 한가롭게 내 얼굴을 즐기는군.”
“눈 뜨자마자 멋진 얼굴이 보이니 기분 좋아서요.”
“앞으로도 계속 볼 텐데 새삼스럽긴.”
흐뭇하게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레이넌이 천천히 눈을 떴다.
깜빡이는 눈꺼풀 사이로 보랏빛 눈동자가 보이자 이제 모든 게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넌은 눈을 뜨고도 여전히 내 손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부드럽게 눈을 접었다.
그의 웃음을 보고 나는 다른 손으로 레이넌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날 에드윈처럼 취급하는군.”
“그런가요.”
“그런데 좋아. 에드윈이 그대에게 안아 달라,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 왜 그렇게 졸라 대는지 알겠군.”
나는 그 말을 듣고 한층 더 힘을 주어 그의 머리칼을 어지럽혔다.
에드윈에게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이 들어갔다는 걸 알고 있을 테지만 레이넌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그대의 찻잔에 독이 발려 있었어. 몸이 마비되면서 조금씩 굳어 가는 독이지.”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였지만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그랬군. 역시 그때 잠시 깨어난 게 맞았어.”
“다행이에요. 제가 그 자리에 있어서.”
내 말에 레이넌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에드윈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가볍게 넘어갈 나를 노린 거라면서요. 다행인 일인 거예요.”
“르네.”
“그렇죠?”
레이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는 참 눈치가 없는데.”
“공작님? 너무 직설적이신데요.”
“그런데 가끔 이렇게 사람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을 때가 있단 말이지.”
“험담을 하시려는 건지, 칭찬을 하시려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헷갈리더군.”
나는 조용히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는 내 손에 다시 한번 얼굴을 깊이 묻었다.
“정말 다행이죠?”
“그래……. 다행이군.”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서 흘러나온 한숨에는 안도가 담겨 있었다.
“이래서 그랬던 거죠?”
“무슨 말이지?”
“에드윈 말이에요.”
에드윈의 이름이 나오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로 올라와 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것 같아서.”
그는 답지 않게 약한 소리를 하고는 나를 품에 안았다. 그러지 않으면 꼭 이야기를 하다 내가 떠나 버릴 것 같이.
“계속해 보지.”
“차기 로에리안 공작이라면 필연적으로 슈나이더가 노리겠죠.”
“에드윈을 아예 없는 사람처럼 키웠지. 아무리 나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해도 공작이 되지 않으리라 모두가 믿게끔.”
“슈나이더가 에드윈에게서 눈을 떼게끔이요.”
“결론만 말하면 다 소용없었어. 마빈도 아주 오래전부터 에드윈의 곁에 붙어 있었고, 그도…….”
“제가 그를 이끌었죠.”
“이러면 끝도 없겠군.”
레이넌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나를 위로라도 하듯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렇게 치면 그를 그대에게 보낸 내가 잘못이지.”
“저를 위한 일이었잖아요.”
“괜한 자책은 하지 말라고 미리 일러두는 건데, 그대도, 나도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어.”
나는 레이넌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진심일까, 혹은 나를 위로하기 위함일까.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내 자책감은 그리 쉽게 지워질 만한 것은 아니긴 했다.
그런 내 마음을 짐작한 듯 레이넌은 결론을 내리길 재촉하진 않았다. 다만 조금 유예하길 제안했다.
“어쨌든 그대도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긴 해야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금만 더 미뤄 두지. 일단 뭐라도 좀 먹는 게 낫겠어.”
그는 설렁줄을 당겼다.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듯 바로 음식이 들어왔고, 다들 세팅만 해 두고 바로 방을 나갔다.
레이넌은 나를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고는 직접 숟가락을 들었다.
“설마요.”
“그대 때문에 놀란 나를 위해서 이 정도는 해 주도록 해.”
얼핏 명령조같이 들렸으나 말투나 목소리로 보아 그는 분명 내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그가 바라는 대로 입을 벌렸다.
식사가 끝나고, 해독제까지 살뜰하게 먹여 준 그는 다시 나를 자리에 눕혔다.
꽤 안락한 그의 보살핌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재미있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는 내 모습에 그는 이유도 모르고 함께 미소 지었다.
“왜 웃지?”
“아니, 전에 휴가 갔을 때 생각이 나서요. 뭐든 빨리 익히신다더니 정말이구나 싶어서요.”
“이번에는 제법 그럴싸했나 보군. 그래도 그대의 병간호를 또 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아니, 슈나이더가 아니더라도 감기에 걸릴 수도 있는 거고…….”
“그런 건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감기를 어떻게 알아서 하시게요?”
레이넌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무척 진지한 얼굴로 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감기에 걸리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얼른 조금 더 자.”
레이넌은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주며 말했다.
약 기운이 돌아서일까, 레이넌의 손길 때문일까.
한참을 자고 일어났을 텐데도 금방 잠이 밀려들었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힘겹게 깜빡이고 있자니 그가 내 눈에 손을 얹었다.
“괜히 안 자려고 노력하지 말고.”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 역시 아주 잠의 무게에 눌려 아주 미약했다.
“아…….”
가려진 시야와 레이넌의 목소리에 문득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잠에서 깬 내가 눈을 뜨자 레이넌은 손에 힘을 줬다.
“눈 뜨지 말고 얼른 자. 푹 자야 빨리 낫는댔으니.”
“중요한 걸 깜빡했어요.”
나는 그의 손을 치우며 일어나 앉았다. 레이넌은 갑자기 말똥말똥해진 내 눈을 보고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길래?”
나는 대답하지 않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말보다 보여 주는 것이 가끔은 확실한 일이 있었다.
“어디에다 뒀더라.”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기에 그렇게 잘 챙겨 두진 않았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언제 봤는지, 그때 어떻게 움직였는지 기억을 되짚으며 나는 서랍장 여기저기를 뒤졌다.
“뭘 찾길래?”
나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몇 가지 물건을 서랍장에서 꺼내어 바닥으로 던졌다.
그렇게까지 찾는 게 뭔지 궁금했던지 레이넌은 내 뒤에서 조용히 팔짱을 끼고 지켜봤다.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