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선물을…… 누가 저를 생각하면서 직접 만든 선물은 처음이라서…….”
에드윈은 말을 하면서도 감정이 복받치는지 울먹울먹하면서 말을 흐렸다.
언제나 밝은 모습을 보여서 종종 잊곤 했다. 외롭게 자랐을 에드윈의 지난날을.
나와는 달리 그 나날들을 잊으려면 에드윈에게는 훨씬 긴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괜히 찡한 마음이 들어 나조차 눈에 눈물이 맺혀 들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팔로 눈가를 쓱 닦아 내곤 씩씩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이제 어머니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안 울 거예요.”
“그래. 이런 거 말고도 선물할 건 많으니까 기대하고 있어.”
“네!”
에드윈은 생긋 웃으며 앞에 놓인 쿠키를 집어 먹었다.
그의 볼이 살짝 붉어진 걸 보니 눈물을 흘린 게 부끄러운 것 같기도 했다.
아멜리아는 흐뭇하게 웃으며 에드윈에게 차를 따라 줬다. 나는 가까이 다가오는 아멜리아에게 손짓했다.
내 손짓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들은 아멜리아는 그대로 에드윈의 곁을 지켰다.
나는 내 앞에 놓인 포트로 차를 따랐다. 쿠키를 오물오물 씹던 에드윈이 내 차를 보고 물었다.
“어? 오늘은 다른 걸 드시네요?”
보통은 캐모마일을 즐겨 마셨지만 오늘은 에드윈이 주로 마시는 루이보스를 선택했다.
“응. 에드윈이랑 같은 걸 마시고 싶어서.”
“그렇구나.”
에드윈은 생긋 웃고는 다시 앞에 놓인 컵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나는 잠시 에드윈의 손을 빤히 바라봤다.
“드실래요?”
전에 레이넌과 나눠 먹었던 컵케이크였다.
레이넌 생각을 하느라 멍하니 있으니 에드윈은 내가 먹고 싶어서 그렇게 뚫어져라 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에드윈이 예상한 것과는 다른 까닭으로 그런 거였지만 그의 손으로 직접 건네는 컵케이크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고마워.”
내가 컵케이크를 베어 무는 걸 보고 에드윈도 같은 걸 먹었다.
전과는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건 레이넌이 없어서일까.
“요즘 심심하지?”
“그렇긴 한데 그래도 어머니와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서 좋아요.”
“다행이네.”
이런 상황에서도 좋은 점을 찾아내는 에드윈을 보니 흐뭇했다. 나는 컵케이크를 내려놓고 다시 차를 마셨다.
“어머니?”
“……으응?”
에드윈이 왜 이렇게 의아한 듯 불렀는지 나도 짐작이 갔다. 나 역시 의문이 들었으니까.
조금씩 말이 느려졌고, 그건 나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속이 울렁거리더니 이제는 어지럽기까지 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자 그때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그땐 이미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늦었을 때였다.
그런 사실을 증명하듯 곧이어 눈앞이 까맣게 변하며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
사람들이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아 무슨 대화 중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왜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지?
눈도 떠지지 않았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귀는 밝아지기 시작해 그야말로 가위에 눌린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고 누워 있는데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보이는 게 없는데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아 이마를 짚고 싶었으나 그 또한 마음 같지 않았다.
“해독제를 먹었으니 곧 괜찮아질 거야.”
내가 움직이려고 애쓰는 걸 알아주는 것처럼 레이넌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깨어나신 건 아닌 듯한데요.”
레이넌의 바로 옆에서 로만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내가 깨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 로만은 소리를 잔뜩 죽여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공작님도 좀 쉬시죠.”
“편히 앉아 있는다고 한들 쉴 수 있겠나.”
레이넌의 말에 로만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보이는 건 없었지만 두 사람 사이를 맴도는 공기가 평소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사무적인 대화를 할 때도 느껴지던 여유로움은 사라진 채였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나는 기억을 되짚었다. 먼저 에드윈과 선물을 주고받았고, 티타임을 가졌다.
뭘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고, 어지러웠다.
그리고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고, 거기서부터 기억은 끊겨 있었다.
아마 그대로 쓰러진 듯했다. 레이넌이 해독제라고 이야기한 걸 보면 내가 먹은 음식에 독이 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깨어난 걸 알지 못한 채 조용히 하던 대화를 이어 갔다.
“에드윈 님이 드시지 않은 건 천만다행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한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긍정했다.
“그래. 에드윈이 먹었다면 치명적이었을 거라고 칼슨이 말했으니.”
“그럼 에드윈 님을 노린 걸까요?”
“글쎄.”
하지만 아멜리아의 질문에 레이넌은 선뜻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레이넌은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르네를 노린 걸지도 모르겠군.”
“네?”
로만과 아멜리아는 놀란 듯이 되물었다. 물론 소리는 내지 못했지만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어째서입니까?”
“에드윈이 먹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레이넌의 말에 로만과 아멜리아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드윈이 먹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르니 나를 노린 거다……. 위화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다행히 아멜리아가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줬다.
그녀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지만 꾹 눌러 담은 듯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레이넌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에드윈 님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조금 아프고 끝날 르네 님께 독을 먹였다는 건가요?”
“에드윈을 죽이거나 혹은 치명상을 입히라는 지령을 받았겠지. 하지만 범인은 그러고 싶지 않았던 거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르네 님을 왜……?”
“실수인 척, 혹은 일이 틀어진 척하려면 누군가는 에드윈 대신 독을 먹어야 하니까.”
“하아…….”
로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고 말을 얹지 않았지만 그 역시 레이넌의 의견에 수긍하는 듯했다.
“도대체 언제 독을 탄 걸까요?”
아멜리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차는 제가 준비했어요. 누군가가 바꿀 틈이 없었다고요.”
그녀는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레이넌을 향해 강력하게 주장했다.
다시금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간간이 로만의 한숨과 화를 내는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레이넌만큼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독이 어디에 들어 있었다고 했지?”
“르네 님이 마시던 차에만 들어 있었습니다.”
“찻잔에 직접 발랐나 보군.”
“하지만 누가 어떤 찻잔을 쓸 줄 미리 알았을까요?”
“오늘 에드윈이 르네에게 선물을 했다지?”
“네.”
“그럼 또 한바탕 껴안고 애정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겠군.”
로만과 레이넌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아멜리아가 허탈한 듯 물었다.
“……그때를 노렸단 말씀이신가요? 두 분이 행복한 그 순간을?”
“그래. 차에 직접 타면 에드윈이 마실 위험이 있지. 그러니 찻잔에 직접 발랐거나 속에 흘려 넣었겠군.”
“흘려 넣었다고 해도 무색이니 알아채긴 어려울 테니까요.”
이 중에 그나마 가장 담담한 로만이 말했다.
레이넌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가 제법 분노했다는 사실은 소리만 들리는 나조차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두 사람과 달리 아멜리아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화가 났음을 숨기지 못했다.
언제나 상냥하고 부드러운 아멜리아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다니. 익숙지 않았다.
“일단 진정하시고 조금 더 차분히 생각해 보시지요, 공작님.”
“차분히?”
레이넌은 웃으며 로만의 말을 되뇌었다. 그 웃음에 담긴 시린 기운에 로만은 헛기침을 토해 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꼭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이대로 슈나이더가에 쳐들어가 버릴까 고민 중이신 것 아닙니까.”
“그래. 이렇게 빙빙 둘러 가는 게 귀찮아졌어. 언제 갑자기 죽이려고 돌변할지도 모르고, 참고 봐줘야 할 이유가 있나?”
“명분이 아직 부족합니다.”
로만은 평소보다 더 화를 내는 레이넌의 앞에서 겁을 먹은 것 같았지만 언제나처럼 해야 할 말은 차분히 전달했다.
레이넌은 냉소하며 로만의 말에 긍정했다.
“명분이라. 그래, 그게 필요하지.”
드물게도 레이넌은 생각과 마음이 따로 논다는 걸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그놈의 명분 때문에 지금까지 기다리지 않았나. 증거는 대충 다 모았으니 남은 건 폐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공작님…….”
아무리 로만이라도 레이넌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말리지 못했다. 다만 제 의견을 담아 소심한 설득의 말을 건넸다.
월급을 받았으니 어쨌건 일은 한다는 듯, 그리 내키지 않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괜히 들쑤셔서 에드윈 님이나 르네 님이 더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오히려 슈나이더에게 명분을 줄 수도 있고요.”
“네, 공작님. 로만의 말이 맞습니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아멜리아까지 로만의 말에 힘을 실었다.
덕분에 로만은 기회를 얻은 듯 더욱더 적극적인 태도로 레이넌을 설득하려고 했다.
“슈나이더 역시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구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명분이 부족해서가 아닙니까.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역공해 올지도 모릅니다.”
로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만과 아멜리아가 다급하게 레이넌을 불렀다.
“고, 공작님!”
둘 다 무의식적으로 큰 소리를 냈다가 곧 목소리를 낮췄다.
“르네 님이 깨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로만은 나를 핑계 삼아 레이넌을 달래려는 것 같았다.
다급한 그의 목소리로 지금 레이넌의 상태가 범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네. 일단 그 화병을 깨면 르네 님이 정말 화내실 거예요.”
아멜리아의 말에 비로소 어떤 상황인지 알았다.
에드윈이 준 종이꽃을 꽂아 둔 화병을 던지기라도 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잠시 그대로 대치 상황이 이어지더니 레이넌은 곧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고는 종이를 구겼다.
“이것만 찾으면 되는데…….”
레이넌은 화를 애써 누르려는 듯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가 구긴 종이의 정체가 궁금했던 나는 눈에 힘을 주어 힘겹게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다.
평소처럼 눈을 뜰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아예 시야가 가려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넌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가 구겨져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미 본 적이 있는 물건이었다. 그의 도서관에 갔을 때 봤던가.
저것 하나만 모이면 끝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레이넌은 그것을 ‘마지막 한 가지’라고 표현했었다. 로만이 말하는 명분이 저것임이 분명했다.
“슈나이더한테 없으면 누가 가지고 있을까.”
레이넌의 목소리에는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리고 곧 못 참겠다는 듯 서류 봉투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공중에 흩날리는 조각들 사이에서 어딘가 익숙한 실링이 눈에 들어왔다.
“아…….”
어디서 봤는지 드디어 기억이 났다. 본 듯한 것이 아니라 나는 저것과 똑같이 생긴 봉투를 본 적이 있었다.
깨달음과 동시에 말이 흘러나오며 몸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목소리를 내고 조금씩 꿈틀거리자 세 사람이 동시에 나를 바라봤다.
“르네.”
애절한 레이넌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야를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