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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14)화 (114/129)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혀로 내 손가락을 핥으려 했다.

하지만 길고 긴 지난 밤, 어느 정도 레이넌에게 익숙해진 내가 그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

다행히 그의 혀가 닿지 않기 전에 손을 떼어 냈음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대로 붙들린다면 자연스럽게 어젯밤의 일이 되풀이될 것이 분명하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진심으로 아쉬워하며 고민하는 눈으로 나를 보는 레이넌을 보니 영 틀린 추측은 아닌 듯했다.

나는 레이넌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얼른 그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공작님도 일단은…… 뭐든 걸치고 오세요. 제가 식사라도 편하게 하길 원하시면.”

여전히 왜 뭔가를 걸쳐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서도 그는 착하게 가운을 걸치고 왔다.

말 그대로 걸치기만 하고.

옷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하는 차림새에 내 시선이 자꾸 그의 속살을 이리저리 훑었다.

슬쩍 벌어진 가운 틈 사이로 보이는 그의 몸이 얼마나 단단한지 직접 느꼈다.

게다가 예술품처럼 아름다운 비율로 깎여 있다는 것도 이제는 알았다.

비록 천 하나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 아래의 몸까지 생생히 떠올라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힐끔거리는 내 시선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던 레이넌은 가운을 슬쩍 내렸다. 마음껏 보라는 듯이.

“이럴 거면 왜 입으라고 했는지 모르겠군.”

나는 그의 움직임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의지와는 달리 다시 레이넌에게로 향하려는 시선을 붙드는 건 꽤 힘든 일이었다.

“덜 자극적이잖아요.”

“그렇군. 그대를 자극하고 싶으면 가리지 않으면 되는 건가?”

그는 깨달음을 얻은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허리끈을 슬며시 잡았다.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레이넌을 훔쳐보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그를 꼭 붙들며 그에게 매달렸다.

“아침! 아침이 먹고 싶어요. 너무 배가 고프다고요.”

레이넌은 간절히 붙든 내 손을 내려다보더니 소리를 내어 웃었다.

“농담도 못 하겠군.”

“눈빛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요.”

의심이 가득 담긴 내 시선을 받은 레이넌은 작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뭐. 그대가 넘어오면 나에겐 좋은 일이긴 했지.”

역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한 상황을 무사히 넘겼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식사고 뭐고 이러다 레이넌에게 홀려서 아침부터 내가 그를 덮쳐 버릴지도 몰랐다.

물론 시작은 그러할지라도 제발 이제 그만 좀 하자고 매달릴 것 역시 나임이 뻔했다.

나는 애써 웃음을 띠며 음식이 준비된 테이블 앞에 앉았다.

“바쁘시잖아요. 이제 그만 놀리고 먹어요, 우리.”

그는 내 부름에 착실히 걸음을 옮기더니 내 앞이 아닌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도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고 찰싹 붙어서.

“공작님?”

“응?”

“식사를 하실 거면 조금 떨어져 앉는 게 편하지 않을까요?”

내 물음에 레이넌은 뜬금없이 예전에 가졌던 티타임 중 있었던 일을 꺼냈다.

“전에 그대가 디저트를 먹여 준 적이 있지 않았나.”

“그랬지요?”

아침을 먹는 일이 순탄치 않겠다는 예감이 들어 나도 모르게 말끝을 올렸다.

레이넌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시원스러운 미소를 보이고는 말했다.

“오늘도 그래 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를 따라 웃으려던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불과 조금 전에 생각해 놓고 또 넘어갈 뻔했다.

당당하게 음식을 먹여 달라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고 있는 레이넌에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공작님이 하도 꼭 안아라, 꼭 붙들어라, 더 매달려 봐라, 그렇게 말씀하셔서 아직도 팔이 떨린다고요.”

돌려서 말한 거절에도 레이넌은 실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역시 내가 먹여 주는 편이 낫겠지?”

나는 대답 대신 웃으며 레이넌에게서 떨어져 앉고는 말했다.

“각자 먹죠. 자기 손으로.”

나에게는 길고 험난했던 밤이 레이넌에게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밤이었던 모양이었다.

오늘따라 유독 너그러운 그는 더 이상 제 의견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훨씬 편한 분위기에서 아침을 즐길 수 있었다.

창문을 통과하며 잘게 부서진 햇빛 아래에서 소소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식사를 끝내는 데는 평소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식사를 마친 직후,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아멜리아입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분명 바람보다 빠르게 움직였는데, 바람보다 빠른 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몸을 다 일으키기도 전에 레이넌은 나를 끌어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들어와.”

레이넌에게 반항할, 혹은 어떻게든 일어날 틈도 없이 아멜리아가 침실로 들어섰다.

이 모습을 보고 놀란 기색이라도 보일 줄 알았거늘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편히 주무셨습니까?”

“아주 편히.”

흡족함이 묻어나는 레이넌의 대답을 들은 아멜리아는 미소 지었다.

덤덤한 두 사람과 달리 새가슴인 나는 이 상황을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어딘가 숨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돌려 봤지만 적당한 곳은 없었다. 결국 나는 레이넌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를 숨길 만한 곳이 여기뿐이라는 사실이 슬펐지만, 그래도 얼굴이라도 가릴 수 있는 곳이 있기라도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넌은 손을 둘러 나를 꼭 껴안았다.

이런 우리를 지켜보는 아멜리아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눈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제 슬쩍 들려온 웃음소리만 들어도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만한 사이였으니까.

“르네 님, 그런다고 모습이 가려지진 않는답니다.”

“살면서 쥐가 부러운 날이 올 줄은 몰랐어.”

“나가지 않으면 부끄러울 일도 없을 텐데.”

레이넌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설득했다. 나는 아주 잠시 그의 말에 흔들렸다.

곧 다가올 부끄러움을 피할 수 있다니.

지금 나에게 가장 매력적인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결국 후회할 만한 행동이기도 했다.

잠시 고민에 빠진 나를 보고 레이넌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역시 오늘은 내 침실에서 지내는 게 낫겠지?”

웃음기를 머금은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속삭임이 귀에 감겨들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이제 그만하시고 가시죠. 부축해 드릴게요.”

아멜리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하마터면 레이넌의 꼬드김에 그대로 넘어갈 뻔했다.

“역시 돌아가는 게 낫겠어요.”

내가 고개를 들고 말하자 레이넌은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나를 한번 세게 끌어안은 후 순순히 놓아줬다.

레이넌의 무릎에서 내려오니 아멜리아가 얼른 손을 내밀었다.

“부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레이넌의 침실과 내 방은 채 몇 걸음 걷지 않아도 되는 거리였다. 그런데 부축이라니.

부축까지 받으면서 돌아가면 정말 쥐라도 되어야 할 것만 같았다.

잠깐이라도 시선을 끄느니 쥐구멍이라도 찾든, 누군가의 주머니 속에 숨든 하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혼자 걸으시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아멜리아는 그런 나와 생각이 다른 듯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나를 뒤에서 붙들었다.

어쨌든 그녀의 손길에 편안함을 느낀 것도 사실이라 나는 못 이긴 척 고개를 숙이고 몸을 맡겼다.

“아무래도 나는 쥐로 환생할 것 같아.”

“네?”

“응? 아니야.”

아멜리아의 말대로 그녀의 부축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정작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니 여기저기 뻐근하고 아파 왔다.

“제가 마사지해 드릴게요. 아무래도 오늘은 푹 쉬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응. 고마워.”

“그래도 아프실 거예요. 오늘은 티타임이나 저녁 식사를 취소하셔도 공작님께서 아무 불평도 못 하실 거예요.”

“티타임이나 저녁은 취소한다고 해도 에드윈은 보러 가야 할 거 같아.”

“에드윈 님을요?”

“받을 게 있거든.”

고이 접은 종이꽃을 얼마나 예쁘게 색칠해 뒀을까.

그리고 그걸 내게 주는 에드윈의 얼굴에 비칠 뿌듯함은 또 얼마나 귀여울까.

그런 에드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멜리아는 굳이 에드윈과 만나는 것까지 반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다른 방식을 제안했다.

“그럼 에드윈 님을 모셔 올까요?”

“음…….”

에드윈의 안전을 위해 일부러 그를 찾아가는 것이었으나 아멜리아의 제안은 그 반대였다.

하긴, 다른 곳도 아니고 내 방이었다. 사람들도 많이 있는 데다가 더욱이 내 방은 미리 손을 댈 틈이 없었을 터였다.

오히려 에드윈의 침실보다 더 안전한 장소일지도 몰랐다.

생각을 마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좋겠어.”

“그럼 언제쯤 모셔 올까요?”

“점심 먹고 티타임에. 오랜만에 에드윈이랑 티타임을 가져야겠어.”

“그럼 공작님과의 티타임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함께하시나요?”

“아니. 취소한다고 말씀드려. 저녁 식사도.”

“정말로 취소하실 거예요?”

아멜리아는 제가 먼저 말을 꺼내 놓고 내가 취소한다니 놀라 되물었다. 그러지 말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내 결정을 반기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라면 레이넌이 내게 골탕을 먹는 것 같아 재미를 느끼고도 남았다.

“그래. 아멜리아가 말한 것처럼 내가 취소한대도 공작님은 할 말이 없지 않으실까?”

“그럼요. 그럼 그렇게 전달 드리겠습니다.”

사실 티타임과 저녁 식사를 취소한 건 아멜리아가 바란 것처럼 지난밤의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복수라고 하기엔 나 역시 즐기기도 했고…….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갑자기 떠오른 감상에 고개를 휘휘 저었다.

“르네 님?”

“응?”

“갑자기 뭐 하세요?”

“스, 스트레칭! 마사지 받기 전에 스트레칭이라도 해서 몸을 좀 풀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건 그렇지만 지금 그렇게 확 움직이는 것보단 몸을 조금씩 늘리며 근육을 풀어 주는 쪽이 나으실 거예요.”

“응.”

어쨌거나 당장 레이넌의 얼굴 보기에 좀 민망하니까 하루 정도는 조금 떨어져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침에 충분히 시간을 같이 보내기도 했으니 레이넌도 서운해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나저나 에드윈 님이 무척 기뻐하시겠어요.”

“에드윈은 뭘 해도 기뻐하니까……. 너무 귀엽지 않아?”

“귀여우시죠. 특히 르네 님 앞에서요.”

그 말이 꼭 에드윈이 내 앞에서만 귀엽게 군다는 듯이 들렸다. 하지만 그런 의문을 표현할 틈은 없었다.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지만…….”

아멜리아는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고는 입을 뗐다. 하지만 금세 말을 잇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뭔데 이렇게 망설여? 무섭게.”

“무섭다니요.”

“아니. 아멜리아가 이렇게까지 말을 못 하는 거면……. 내가 싫다거나? 내가 짜증이 난다거나? 에드윈에게서 떨어지라든가?”

술술 나오는 내 말에 아멜리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웃음을 채 거두지도 못하고 되물었다.

“공작님에게서 떨어지라는 것도 아니고 에드윈 님에게서요?”

“에드윈은 귀엽잖아.”

단호한 내 대답을 듣고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 하려다 만 말을 계속했다.

“귀여우시죠. 그런데 제 눈엔 르네 님이 더 귀여우신데요.”

“응?”

“에드윈 님이랑 같이 계실 때 특히 더욱더 귀여워지시죠.”

뜻밖의 말에 나는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에드윈과 비교가 된다니! 그것도 귀여움으로!

곧 나는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좋은 이야기인데 왜 그렇게 말하길 망설였단 말인가.

다른 말을 하려다가 바꿨다거나 또 나를 놀리고 싶은 게 분명했다.

“어차피 무례를 범한 김에 하나만 더 말할게요.”

아멜리아는 그대로 두 팔을 뻗어 나를 품에 꼭 안았다.

“아멜리아?”

“저도 르네 님이 에드윈 님을 안아 주시듯 르네 님을 안아 보고 싶었거든요.”

본능적으로 나도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았다. 아멜리아는 내가 언짢아하지 않는다는 걸 느끼고는 조금 더 힘을 주어 안았다.

“공작님께 드리기엔 너무 아까우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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