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하게 갈구하듯 들이치는 그가 버거워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들고 있던 책이 구겨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뿐이었다.
책에 신경 쓸 정신도 없었지만 레이넌은 그럴 틈조차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는 내 손에 들려 있던 책을 빼내어 침대 아래로 던졌다.
금세 비어 버린 손에는 레이넌의 큰 손이 얽혀 왔다. 책 대신 제 손을 꼭 잡으라는 듯이.
그의 의도가 어떠하였든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책을 쥐었던 것보다 더 센 힘으로 레이넌의 손을 붙들었다. 무엇이든 단단히 붙들어야 정신을 놓지 않을 것만 같았다.
어느새 내 몸 위로 올라온 그가 숨을 몰아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 역시 그와 같은 속도로 숨을 쉬고 있다는 걸.
거친 숨과는 달리 부드러운 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어깨에서 손목까지 쓸어내리는 그의 손길은 물이 고요히 흐르듯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레이넌의 움직임과 달리 내 몸에는 그의 손이 지나간 길을 따라서 소름이 돋아났다.
몸을 덮고 있던 얇은 가운이 그의 손과 함께 흘러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끝내 가운에서 내 팔을 빼냈다. 가운보다 얇은 네글리제만 남았고, 동시에 방 안의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에드윈이 효자군.”
에드윈이 자기 전에 책을 읽어 달라고 한 게 레이넌에겐 색다른 기회가 된 모양이었다.
그렇게 에드윈의 효심을 칭찬한 레이넌은 웃으면서 다시금 입을 맞춰 왔다.
조금은 짧은 키스를 남기고 그의 입술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입술과 반대로 손은 다리에서 천천히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눈앞이 아득했다. 높은 곳에서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듯해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런데도 보이는 건 오직 레이넌뿐이었다. 그의 손이, 입술이 닿는 곳곳에서 레이넌이 느껴졌다.
조금씩 거칠어지는 숨이 그가 평소와는 다르게 여유롭지 않음을 알려 주었다.
“르네…….”
나는 숨소리처럼 들려오는 레이넌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뜨거운 손으로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몇 번이고 내 얼굴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이마에, 눈에, 볼에, 입술에, 그리고 귀에도.
거칠어진 레이넌의 숨소리만큼이나 내 심장도 세차게 뛰었다.
평소엔 얼굴만 달아올랐다면 지금은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것만 같았다.
“고, 공작님…….”
“그래.”
오싹할 정도로 저릿한 감각은 낯설었다. 붙들 건 오직 레이넌뿐이었다.
어느새 허리 위로 올라온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따끔한 감각이 목에서 느껴졌다. 이를 세워 목을 깨문 레이넌은 이내 달래 주듯 깨문 자리를 혀로 할짝거렸다.
아픔과 농밀한 접촉이 연달아 이어지자 아찔한 감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하아…….”
야릇한 기분을 참지 못하고 내뱉은 신음을 들은 레이넌은 멈칫했다.
다시 움직이기 전, 그의 목에선 낮은 신음이 울렸다.
그날 밤, 레이넌이 신사다운 모습을 보인 건 딱 여기까지였다.
***
햇볕이 뜨겁게 내려앉으면 세실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날과는 달랐다. 뜨겁다기보다 따스하고도 따가운 시선이 내게서 떠나질 않았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몸을 감싸고 있어 눈을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몸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눈이 안 떠지지.
힘을 잔뜩 줘 봤지만 눈꺼풀이 딱 붙어 버린 듯 움직일 기미도 없었다.
어떻게든 눈을 떠 보겠다고 끙끙대고 있을 때, 눈가를 매만지는 시원한 손이 느껴졌다.
상쾌한 감각이 손가락을 통해 몸 구석구석 퍼져 나갔다.
기분 좋은 느낌에 몸에 들어갔던 힘이 조금씩 풀어졌다. 대신 노곤함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군.”
조금은 거친 레이넌의 목소리가 눈꺼풀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떨어지지 않던 눈이 이상하게도 조금씩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보다 어렵게 눈을 뜬 탓일까. 희미한 시야가 맑아지는데도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눈을 깜빡깜빡하고 있으니 나를 내려다보며 웃는 레이넌의 얼굴이 명확해졌다.
나른한 잠기운이 여전히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눈을 뜨자마자 레이넌의 미소를 보니 기분 좋은 꿈속에서 헤매는 것만 같았다.
아침부터 호강하는구나.
나를 감싼 따스하고 상쾌한 공기는 그에게서 흘러나온 것이 분명했다.
나 역시 꿈속의 그를 향해 배시시 웃었다.
레이넌은 그런 내 미소에 사랑이 듬뿍 담긴 눈을 하고선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곧 따스한 감촉이 이마에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던 나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레이넌은 갑작스러운 내 움직임에 의아한 얼굴을 하고는 나를 따라 앉았다.
동시에 그와 내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몸을 타고 스르르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그와 내 모습에 유독 길었던 지난 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나는 얼른 흘러내린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렸다.
그걸로 몸은 가려졌지만 부족한 느낌이 들었던 나는 그대로 더 위로 올려 얼굴도 반쯤은 가리고 레이넌을 바라봤다.
레이넌은 내가 하는 짓이 재미있다는 듯 흥미로운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슬쩍 아래로 끌어당겼다.
작은 힘이었지만 이불을 놓칠 뻔한 나는 손끝까지 힘을 잔뜩 주어 버텼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다행히 레이넌은 끝까지 놀릴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레이넌은 이불이 내 목까지 내려오자 그걸로 됐다는 듯이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입을 맞춰 왔다.
하룻밤 사이에 익숙해진 그의 움직임에 나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빠졌다.
숨이 가빠질 정도로 깊은 입맞춤을 끝내고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스치듯이 짧은 입맞춤을 여기저기 남기고서야 겨우 내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레이넌은 여전히 아쉬운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글쎄. 밤을 거의 새웠는데 그대는 참 잘 자더군.”
“그거야!”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큰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을 끝맺지 못한 건 목이 건조해 기침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차마 내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문 나를 보던 레이넌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힘들 만했지. 눈도 이렇게나 붓고.”
알아주는 것에 고마워해야 할지. 혹은 이대로 이불 속에 숨어 버려야 할지 순간 고민이 되었다.
어젯밤의 그는 다른 날과는 아주 달랐다. 조용히 기다려 주고 배려하던 레이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처음 보는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울면서 매달리면 그는 오히려 기뻐했고, 더 매달려 보라는 듯이 나를 몰아붙였다.
그렇게 밤새 나는 그에게 매달린 채로 울었다.
좋긴 했지만 창피한 순간들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자 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그와 동시에 유쾌한 웃음소리가 이불 밖에서 들려왔다.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나 역시 이불에 얼굴을 숨기고 그와 비슷한 웃음을 흘렸다. 물론 소리를 죽여서.
창피한 것과는 달리 또 다른 무언가가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그게 뭘까. 충족감일까, 혹은 행복함일까.
이상한 일이었다. 부끄러워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그래서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데 이 순간이 너무도 편했다.
내 마음을 채운 온갖 몽글몽글한 감정보다 수줍음이 더 컸을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이불 밖으로 나오는 데는 한참 걸렸기 때문이었다.
레이넌은 지난 밤과는 달리 어떠한 재촉도 없이 그저 내가 스스로 나오길 기다려 줬다.
하지만 평화로움은 딱 침대에 있을 때까지만 이어졌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나 레이넌 주변의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도무지 그의 침실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고 버티자 레이넌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그대가 괜찮아질 때까지 여기서 지내도록 해.”
“그래도 괜찮나요?”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대가 기다리고 있으면…….”
레이넌은 말을 하면서 그 모습을 상상한 모양이었다.
조금씩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주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것도 좋겠군.”
상상만으로도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나 역시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레이넌의 말은 내 웃음을 한 번에 사라지게 했다.
“아멜리아에게 들어오라고 하지. 어쨌건 그대를 시중들 사람은 필요하니까.”
“안 돼요!”
“어째서?”
“공작님 침실에서 아멜리아를 보느니……. 차라리 제 방에서 보는 게 그나마 나을 것 같아요.”
단호한 내 말에 레이넌은 한 번쯤 설득해 볼까, 하는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아멜리아가 여기로 들어오면 전 이불 속에서 절대 못 나갈 거예요.”
“할 수 없군. 대신 아침 식사는 여기서 하고 가지.”
그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렇게 제안했지만, 나는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말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레이넌은 내가 왜 그러는지 알겠다는 듯 나를 안심시켰다.
“식사 시중은 안 들게끔 하지. 둘이서 먹는 아침 식사도 좋을 것 같으니까.”
“그럼 좋아요.”
긍정의 대답을 들은 레이넌은 미소를 지으며 아침 식사 준비를 명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들어온 사용인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식사 시중을 들 사람은 없겠지만, 누군가가 식사 준비를 하긴 해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다들 나갔으니 이제 나와도 돼.”
레이넌의 확인이 있었지만 나는 쉽게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귀를 잔뜩 세우고 주변의 소리를 들었다.
한참을 그러다 레이넌 외에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천천히 이불 밖으로 눈만 조심스럽게 내어놓았다.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드디어 이불 밖으로 나왔다.
아니, 나오려다가 다시 들어갔다.
“공작님.”
“응?”
“제 옷 좀 주시면…….”
여전히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상태라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이대로 이불 밖으로 나가 식사까지 했을지도 몰랐다.
“어째서지? 나는 지금 모습도 좋은데.”
“지금 모습으로는 물도 못 마실 것 같아서요.”
“그럼 안 되지.”
레이넌은 이 상황이 그저 즐겁기만 한 듯 보였다.
그는 나를 놀리면서도 선뜻 네글리제와 가운을 가져다주었다.
이불 속에서 꼬물꼬물 움직여 옷을 입고 나오자 여전히 레이넌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미 다 봤는데 왜 굳이 옷을 입어야 하지?”
레이넌의 놀림에 아침도 먹기 전에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얼른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