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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12)화 (112/129)

“도망가지 않았어도 뒷걸음질은 쳤겠지.”

“이제 저를 저보다 잘 아시는 것 같은데요.”

가벼운 레이넌의 목소리에 나 역시 웃음기를 담아 대꾸했다.

“소소한 것들이 쌓인 결과지.”

“습득력이 참 좋으시네요.”

“아무래도 이런 부분은 내가 서투르니까. 최대한 잘 기억해 두려고 하는 덕이지.”

그 후로도 딱히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의 대단하지 않은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대단하지 않은 일상을 나눴다고는 하지만 보낸 시간은 다른 날에 비해 훨씬 길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또 침묵을 즐겼다.

분명 이 도서관에 들어와서 초반에는 무겁고 중요한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나올 때는 그런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게 내게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에드윈은 다치고, 나도 그럴 수 있고, 슈나이더는 생각보다 더 위험한 일을 꾸미고 있고…….

분명 불안하고 걱정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생겨나는 불안도, 걱정도 그 자리에 머물렀다.

여러모로 위태한 상황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예전에 비해 나는 제법 불안에 의연해졌다.

모두 레이넌의 덕분이었다. 오늘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면서 그 이야기는 차마 할 틈이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그에게 이야기해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당신 덕분에 내가 지금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고.

이렇게 또 그에게 알려 줄 소소한 일이 하나 더 늘어난 것 또한 나에겐 기쁜 일이었다.

***

달이 떠오르고 어둠이 내려앉은 뒤, 나는 에드윈의 침실로 향했다. 에드윈은 이미 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기대에 찬 얼굴로 내게 뛰어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에드윈이 얼마나 이 시간을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다쳤으니까 조심해서 움직이라니까.”

“깜빡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에드윈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들어가자. 책은 골랐어?”

“네! 이거요.”

에드윈은 옆에 서 있던 체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얼른 책을 받아 들어 내게 보여 줬다.

낯익은 표지였다. 예전에도 에드윈이 종종 읽어 달라고 했던 책이었다.

“오랜만이네. 나도 이 책 좋아했는데.”

“정말요?”

“응. 에드윈이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졌지 뭐야?”

내 말에 에드윈은 활짝 웃으며 내 손을 이끌었다.

“지금까지 기다리시느라 엄청 힘드셨겠어요.”

아멜리아는 웃으며 소파에 자리를 잡았고, 체이스는 침실 밖으로 나갔다.

에드윈은 그사이 침대에 들어가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말한 대로 에드윈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너무도 잘 보이는 모습이라 나도 웃으며 그의 옆자리로 들어갔다.

나도 잘 준비를 마치고 온 터라 얇은 옷이 바삭한 이불과 만나 기분 좋은 포근함을 주었다.

따뜻한 기운을 느끼며 책을 펼쳤을 때였다. 누군가가 침실로 들어섰다.

“공작님?”

“아버지?”

침실에 들어선 레이넌을 보고 나와 에드윈이 동시에 말했다.

“내가 있을 테니 아멜리아는 먼저 돌아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에드윈과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하던 일을 마저 하도록 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렇게 말한 레이넌은 조금 전까지 아멜리아가 앉아 있던 자리에 누웠다.

에드윈도 나도 고개를 갸웃했지만 레이넌은 이쪽으로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읽을까?”

“네.”

에드윈은 설레는 표정으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내일도 읽어 줄 테니까 일부러 자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안 돼.”

내 말에 에드윈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려고 했던 것이 분명했다.

“오늘만이 날이 아니야. 에드윈이 바빠지기 전까지는 매일 읽어 줄게.”

“바빠지면요?”

“글쎄. 상황을 보고 다시 이야기할까?”

“네.”

에드윈은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본 나는 평소보다 나직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 내려갔다.

에드윈은 자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지 눈을 꼭 감았다. 힘을 잔뜩 줘 눈가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하지만 조금씩 올라가는 입꼬리는 차마 어떻게 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에드윈은 지금 웃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열심히 노력하는 에드윈의 모습이 귀여워 모른 척 책을 계속 읽었다.

피곤했을까. 혹은 오랜만에 책을 읽어 주는 목소리가 에드윈을 안정시켰을까.

에드윈은 예전보다 훨씬 빨리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도 책 읽는 걸 멈추지 않았다.

잠결에도 에드윈은 내가 책 읽는 소리를 종종 듣는 것 같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다행히 이 책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지막 구절까지 읽은 후 책을 덮었다.

힘이 잔뜩 들어갔던 에드윈의 눈꺼풀은 어느새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덮여 있었다.

나는 그대로 편안하고 고운 숨을 내쉬는 에드윈의 모습을 한참을 바라봤다.

에드윈의 머리카락과 볼을 조심스럽게 쓸어 주고는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침대 옆에 놓인 테이블에 책을 놓고 소파에 누워 있는 레이넌에게 다가갔다.

레이넌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을 보니 잠든 것 같기도 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지. 그때 그는 잠이 들었던가. 금방 깨어났던가.

이제는 몰래 훔쳐볼 필요가 없어 나는 몸을 낮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언제 봐도 잘생긴 얼굴이었다. 지금처럼 눈을 감고, 근육의 움직임도 없는 저 얼굴은 예전엔 분명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따뜻한 눈길이, 그리고 올라간 입꼬리가 내겐 더욱 익숙한 레이넌의 얼굴이었다.

그래. 바로 이런 얼굴.

전혀 움직임이 없던 얼굴에서 표정이 생겨남과 동시에 그는 손을 뻗어 나를 잡았다.

아차 하는 사이에 나는 그의 몸 위에 올라가 있었다.

이것도 그때랑 비슷한 상황인 것 같은데. 아니, 그때는 앉아 있었던가.

나는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몸에 힘을 뺐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니 작게나마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레이넌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곧 손을 들어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참 많은 것이 바뀌었네요.”

그때에 비하면.

“그래.”

그는 내가 하지 않은 말까지 이해하고 대답한 것만 같았다.

레이넌은 그대로 팔을 들어 나를 품에 안았다. 여전히 그의 가슴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내 숨도 그와 같은 박자로 움직였다.

같은 심장 박동을 느끼고 있으니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나른해지며 눈이 감겼다.

그런 나를 알아차렸는지 그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밤이 늦었군. 돌아가지.”

그의 목소리에 밀려오던 잠은 그대로 사라졌다.

“네.”

예전과는 달리 담백하게 나를 일으키는 레이넌의 모습에 나는 조금 실망한 얼굴을 했다.

그런 나를 보고 레이넌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아주 신사처럼 나를 에스코트했다.

방을 지키는 사람 중에 아멜리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까 했던 레이넌의 말은 내 방으로 돌아가라는 뜻이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방을 지키는 사람은 모두 에드윈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레이넌과 둘이 돌아가는구나.

늘 사람들 사이에 쌓여 있었는데 이렇게 둘이 걷는 것도 신선했다.

고요한 밤, 레이넌과 나의 발걸음만 작게 울려 퍼졌다.

대화도 없이 발걸음 소리를 배경 삼아 침실까지 도착했다. 다른 때보다 일찍 도착한 것 같은 건 지금이 좋아서 헤어지기 아쉬운 내 욕심 때문이겠지.

“저는 그럼 들어가 볼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레이넌의 침실을 지나면 바로 내 방이었다. 그래서 그의 침실 앞에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레이넌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의아한 눈으로 내 손을 잡았다.

“내 책도 읽어 줘야지.”

“네?”

“책 읽을 때 그대가 나직한 목소리를 내는 게 좋아.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거든.”

푹 잠들 수 있을 것 같다는 레이넌의 말에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넌은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그의 침실로 이끌었다. 침실에 들어서서도 그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침대 앞에 멈춰 선 그는 책을 건넸다. 책을 받아 든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레이넌은 이번만큼은 내가 웃는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왜 그렇게 웃는 거지?”

“아니…….”

바로 대답하지 못한 건 방금 떠오른 생각에 웃음이 다시금 터진 탓이었다.

“아니, 그게…….”

“르네.”

“에드윈 같아서요. 어쩌면 이렇게 똑같죠?”

내 말에 레이넌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공작님의 행동이 오늘 에드윈이 한 행동이랑 거의 같아서요.”

말을 끝내고 다시 작게 웃자 레이넌은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 꼬맹이랑…….”

“어머, 애칭까지 부를 정도면 정말 꽤 가까워졌네요.”

“애칭이라니. 그대에겐 이런 게 애칭으로 들리나?”

“그럼요. 아주 관심 없는 사이에서 꼬맹이라니요. 엄청나게 가까워진 거죠. 기쁘네요.”

내가 활짝 웃자 레이넌은 얼굴을 펴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가 내가 움직이지 않자 그는 그대로 눈만 떴다.

그 또한 에드윈을 떠올리게 해서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웃어도 돼.”

“아니에요.”

웃는 대신 나는 침대 끝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때, 이불 속에서 손이 나와 나를 잡아당겼다.

그의 옆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하자 레이넌은 내 허리께에 머리를 기댔다.

조금씩 레이넌의 몸에서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편안해진 만큼 나 역시 편안한 목소리로 책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렇게 편안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작님?”

“응?”

“편안히 주무실 수 있을 것 같으니 책을 읽어 달라고 하신 게 아니었던가요?”

“응. 지금 아주 편안히 잘 수 있을 것 같아. 좋으니까 계속해.”

어느새 내 허리를 감싸 안았던 손이 그 부근을 슬금슬금 쓰다듬을 때까지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며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니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얼른.”

태연하게 재촉하는 레이넌의 목소리에 얼떨결에 책을 이어서 읽었다.

그는 이제 아예 내 쪽으로 몸을 돌리고서는 조금 전보다 자유롭게 손을 움직였다.

“나에겐 밤이란 늘 시리고 날카로운 고독이었으나…….”

나는 문장을 미처 끝까지 읽지 못하고 숨을 크게 삼켰다. 목덜미에 닿은 그의 입술 때문이었다.

“계속해야지.”

그는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로 속삭였다. 그럴 때마다 닿는 숨 때문에 몸이 움찔거렸다.

그대로 굳어 아무것도 하지 않자 레이넌은 다시금 나를 재촉하듯 혀를 슬쩍 내밀어 목을 따라 쓸어 올렸다.

“너와 함께한 그 밤은 그 어떤 햇살보다 눈부시고…… 따스하였다.”

그사이 얼굴까지 올라온 레이넌의 입술은 턱과 볼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그것참 기대되는 밤이군.”

그 말을 남기고 레이넌은 입술을 겹쳐 왔다. 다른 때보다 뜨거운 숨이 내 입 안에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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