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커다란 남자가 내 품에 안긴 작은 아이같이 느껴졌다. 나는 다른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머리카락을 쓸어 주자 그는 곧 내 허리를 감으며 내 품에 안겼다.
“저기, 공작님.”
“응.”
태연한 대답에 나는 그를 밀어냈다. 레이넌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다시금 손을 뻗어 왔지만 얼른 옆으로 피했다.
그의 손이 허리를 중심으로 위와 아래로 수상쩍게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레이넌은 이번만큼은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앉았다.
“그래서 황제 폐하는 어떻게 지금 자리에 오르신 거죠?”
얼른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자 레이넌은 아쉬운 듯 혀를 차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좋아. 일단 이야기로 돌아가지. 폐하도 나와 비슷한 사건으로 황위에 오르셨지.”
“그럼 선황도……?”
“다들 돌연사라고 알고 있지만……. 그래. 슈나이더가 거기까지 손을 쓴 거지.”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온 걸까.
그리고 지금 레이넌이 한 말로 전에 언뜻 떠올랐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오래전부터 로에리안가와 슈나이더가의 사이가 안 좋았잖아요.”
“그랬지.”
“그렇게 오랜 시간 이어 올 만한 일인가 싶었거든요.”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이상할 일도 아니지.”
“특히 이번 대의 공작은 너무 집요한 것 같아서요. 공작님의 형님 일도 그렇고, 에드윈에게 하는 일도 그렇고요.”
레이넌은 이것만으로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아챈 것 같았다.
“게다가 폐하께서도 비슷한 일을 겪으셨다니……. 슈나이더가 바라는 게 로에리안만은 아닌가 봐요?”
“그래. 폐하나 내가 이렇게 금방, 잘 자리를 잡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게 슈나이더의 가장 큰 실수였지.”
“그럼 역시 그가 최종적으로 바라는 건……?”
“황위야. 솔직히 전대까지는 모르겠군. 하지만 이번 슈나이더는 꽤 노골적으로 달려들고 있지.”
“제가 알아챌 정도로요?”
내 말에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워낙 오래 이어져 온 갈등이야. 다들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나.”
“그렇죠.”
“그대는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오히려 선입견 없이 보니까 알아챈 거야.”
“그런가요?”
쉽게 알아채기 힘든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뭔가 뿌듯한 느낌이 든 것도 잠시였다.
“아니, 그러면 이거 너무 위험한 거 아니에요?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큰일인 것 같은데.”
“그건 그대가 할 걱정이 아니야.”
레이넌은 그의 방식대로 날 위로하고 있었다.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모두 잘될 거라고, 괜찮다고.
너무도 잘 알지만 순간 아주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레이넌이 나의 작은 약속 하나로 안심했듯이 나 역시 그의 안전에 대해 안심하고 싶었으니까.
레이넌을 걱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그것조차 하지 말라는 것처럼 들렸다.
레이넌은 잠깐 스쳐 간 원망을 읽어 낸 듯 잠시 망설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폐하와 가까운 사이인 데다가 목적도 같지 않나. 슈나이더의 계략에 대비해 함께 오래 준비해 왔으니 걱정할 것 없다는 말이야.”
“……오래요?”
“그래. 그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예전부터. 이제 마지막 한 가지만 채워지면 돼. 그러면 오히려 우리 쪽에서 먼저 칠 수도 있지.”
“마지막 한 가지요?”
“그래. 그것이 바로 슈나이더의 가장 큰 약점이고, 그가 저지른, 혹은 저지를 일에 대한 증거이자 우리에게는 그를 밀어낼 명분이지.”
“그게 뭔데요?”
“여기 있나?”
그렇게 말한 레이넌은 옆의 테이블에 놓인 서류들을 뒤적거렸다. 곧 그중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받아서 열어 보니 종이가 있었다. 하지만 종이는 백지였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래. 슈나이더가 알려 준 장소에 있던 물건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슈나이더가 알려 줬다니? 그에게 가장 큰 약점이라면서?
“아마 그도 잃어버린 모양이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야.”
“아……. 그럼 그게 어디 있을까요?”
“글쎄. 어디 있을까. 워낙 적이 많으니 짐작이 가는 곳이 너무 많아 문제지.”
“그런데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갖고 있다면 왜 써먹지 않죠?”
“써먹다니?”
“공작님이나 슈나이더에게 팔 수도 있고. 아니면 본인이 그걸 이용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군. 그 점도 고려해 봐야겠어.”
“그런데 그래서그게 뭔데요?”
“부정한 자금의 출처, 그리고 자세한 사용처.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전전대부터는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지.”
“그럼 그게 있으면 형님의 사고도, 선황의 돌연사도……?”
“그래. 슈나이더가 꾸민 일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지. 물론 그 문서를 찾는다면, 그리고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정보가 정확하다면 말이지.”
“정보가 틀릴 수도 있을까요?”
“그건 아닐 거야. 형님이 그 문서를 직접 확인했다고 했으니까. 사고로 정신없을 때 다시 가져간 거지.”
“그렇구나.”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그의 손에 들어올 거란 믿음이 있었다.
근거 없는 믿음이었지만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니 그가 꼭 그렇게 만들 것만 같았다.
“네. 걱정 안 할게요.”
“그래.”
“그런데 공작님.”
“응.”
“한 가지 걱정이 더 생겼는데요.”
“뭐지?”
“저한테 이 정도로 자세하게 다 말씀해 주셔도 되는 거예요?”
누구한테든 말할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말실수를 할 수도 있는데 그는 너무 스스럼없이 내게 알려 줬다.
게다가 에린이 내가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에린의 말이라 신용하지 않는다고 해도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레이넌이었다.
내가 슈나이더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이야기해 줄 만한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
진지한 내 얼굴을 보던 레이넌은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이건 그대가 잘못한 거야.”
“네?”
“그렇게 원망하는 눈으로 쳐다보는데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러니까 내가 짧은 순간 서운함을 느껴서 어쩔 수 없이 말해 줬다는 건가.
“아니, 그냥 대강 말해 주셔도……. 제일 중요한 한 가지라면서요?”
“그래. 만약 에린이 말한 대로 그대가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면 오래도록 치밀하게 해 온 준비도 모두 소용없어지겠지.”
레이넌은 뭔가 허탈한 듯,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
“만약 공작님 말씀대로라면 이게 더 큰 일인데요.”
“그렇지.”
“그런데 왜 이렇게 기쁘게 말씀하세요?”
“그대야말로 왜 울 것 같은 얼굴이지?”
“그거야…… 오래도록 그 고생을 하면서 했던 일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데. 앞으로 더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살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의 말에 내 마음은 오히려 무거워졌다.
“내가 봐 온 그대의 모습이 모두 거짓이라면……. 속아야지. 기꺼이 속을 테니 그대는 너무 염려하지 말도록 해.”
그의 말은 내가 정말 슈나이더의 사람이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심지어 이 모든 이야기를 슈나이더에게 전달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나를 원망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나를 향한 마음의 무게가, 크기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무겁고 크다는 게 확 와닿았다.
“그런 눈으로 보면 아까 하려던 걸 계속하고 싶어지는데?”
가벼운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얼른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아. 언제나 일이 잘못될 경우도 함께 준비하고 있으니까.”
끝까지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레이넌이었다. 나는 다시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웃는 일이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지금도 딱히 어렵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입꼬리가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레이넌의 마음처럼.
“다행이네요.”
“그래서 슈나이더에겐 어디까지 말할 생각이지?”
“글쎄요. 어디까지 말할까요? 공작님께서 허락하시는 선까지만 할게요.”
무거운 분위기는 금방 가볍게 풀어졌다. 농담을 주고받다 보니 레이넌도, 나도 편안함을 금방 되찾았다.
“여기는 자주 오세요?”
“글쎄. 가끔 오는 정도지. 여기 있는 자료를 들춰 볼 일은 거의 없으니까.”
“그럼 가끔 쉬고 싶을 때 오는 정도?”
“그렇지.”
“그런데 테이블에 서류들이 있는 걸 보면 말씀하신 것보다는 자주 오실 것 같은데요?”
“편한 곳이니까. 좀 복잡한 일이나슈나이더에 관한 일은 여기서도 처리하기는 하지.”
“침실 아니면 집무실에서만 지내시는 줄 알았는데.”
내 말에 레이넌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랬나?”
“네. 공작님을 뵈려고 집무실을 가면 늘 계시던데요?”
“때가 잘 맞았나 보군. 꽤 바쁘게 돌아다니는데 말이지.”
“돌아다니신다고요?”
“검술도 매일 수련하고 있고, 승마도 하고 있지. 저택에서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직접 가서 확인하기도 하고.”
“아……. 집무실에서 업무 보시는 것만 해도 하루를 꼬박 채울 것 같던데요 몸이 머리뼈쯤은 되나 봐요.”
늘 느긋해 보였는데 그의 하루는 예상보다 훨씬 바쁘고 일정이 가득 차 있었던 모양이었다.
레이넌과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에 대해 알아 갈 것이 많았다. 오늘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네?”
“로만이 그러더군. 일 처리하듯 몰아붙이면 안 된다고.”
“로만이 그런 조언도 할 줄 아네요.”
“여러모로 유용한 조언을 하는 편이지. 의외지만.”
레이넌은 웃으며 말했고, 나 역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의외네요, 정말. 이런 관계나 감정에 대해 조언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요.”
“그대도 알아 갈 것이 많아 좋다고 했지. 그런 게 이런 건가?”
“네. 이렇게 하나씩 알아 가는 거 좋아요. 오늘도 뭔가 새로운 사실을 많이 안 것 같아요.”
“오늘? 이렇게 사소한 것을 알아 가는 게 좋은가?”
“사소한 게 더 좋지 않나요?”
“그래?”
“그렇죠. 원래 사소한 것일수록 가까운 사람만 알잖아요. 소소한 이야기도 가까운 사람들끼리나 나누잖아요.”
“‘가까운 사람일수록 소소한 것들을 나눈다’라…….”
레이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군.”
“그런 것들이 쌓이면 사소한 것이 아니게 되니까요.”
“생각보다 로만이 더 적절한 조언을 해 준 모양이야.”
“아마 일 처리하듯이 다가오셨으면……. 예……. 좀 제가…….”
어떤 단어가 적절할지 고민스러웠다. 그런 탓에 머뭇거리고 있자 레이넌이 대수롭지 않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