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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10)화 (110/129)

“네?”

무슨 뜻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레이넌의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가끔 나보다 에드윈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심술이 나다가도…….”

“나다가도?”

“그대는 너무 속이 훤히 보이는 사람이니까.”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 이렇게 말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대로 보이는 눈을 보면…….”

“심술이 들어가나요?”

“그래.”

뜬금없이 나온 심술이라는 단어가 문득 떠올라서 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 게다가 전혀 망설임 없이 대답할 줄은 몰랐다.

“……혹시 질투하세요?”

에드윈과 잘 지낸다고 심술이 나다니. 혹시나 해서 농담처럼 가볍게 건넨 질문이었다.

웃으며 그런 것 같으니 자신도 잘 챙기라고 대답하리라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레이넌은 입을 꾹 다물었다.

“공작님?”

내 부름에 그는 제 머리를 조금 헝클였다. 답답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는 창피해하고 있었다.

“에드윈인데요?”

그의 얼굴에 담긴 감정을 읽어 낸 나는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내 말을 들은 레이넌 역시 자신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나한테도 조금 더 관심을 가져 달라는 거지.”

눈치를 보듯 작게 웅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꼭 투정과도 같은 그의 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공작님께도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요.”

나는 그의 팔을 붙들고 몸을 기대며 말했다. 하지만 레이넌에게선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대로 레이넌을 올려다보자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공작님?”

내 부름에 정신을 차린 듯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 뭔가 있나 싶어 그와 함께 주변을 돌아봤다.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우리를 따르던 로만과 아멜리아를 포함해 몇몇의 기사 말고는 주변을 지나는 사람도 없었다.

다시 레이넌을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땐 그의 얼굴이 보이기도 전에 입술이 먼저 닿았다.

입 안을 파고드는 혀는 아직도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강렬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편안함과 안정을 주는 존재를 확인하는 과정과 같기도 했다.

다른 때보다 유독 거칠게 몰아붙이는 그 때문에 몇 번이고 비틀거렸다.

그런 움직임이 불편했는지 레이넌은 내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고 나는 그의 목을 두 손으로 감았다.

애타게 갈구하듯 좀처럼 나를 놓아주지 않던 그의 숨이 서서히 입술에서 떠나갔다.

감았던 눈을 뜨니 레이넌이 시야에 가득 찼다. 슬쩍 접힌 눈은 그가 지금 미소를 짓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이제는 저런 눈을 보고 슬퍼하지도, 울적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뻐하기만 하면 된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나는 그를 따라 웃었다. 언제나 그랬듯 레이넌은 내 얼굴만을 보고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터였다.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숨기지 않아도 되어서. 이렇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만 해도 되어서.

레이넌은 마치 그래도 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가까이 다가왔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그의 입술이 닿기 직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른 눈을 뜨고 그의 가슴에 두 손을 올려 레이넌을 밀어냈다.

레이넌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차렸다는 걸 알고 조금은 아쉬운 얼굴을 했다.

그렇지만 내가 밀어낸 것에 대해 당황하지도, 기분 나빠하지도 않았다.

대신 만족스러운 얼굴로 내 손을 잡아 왔다. 손을 감싸는 온기가 느껴지자 나 역시 손에 힘을 주었다.

***

그가 이끈 오늘의 티타임 장소는 조금은 색다른 곳이었다. 나도 처음 와 보는 도서관이었다.

“이런 곳도 있었네요.”

로에리안저에는 이미 다른 도서관이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 떠질 정도로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굉장히 많은 양의 책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매일 열 권씩 읽는다고 해도 평생 동안 다 읽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곳은 조금 달랐다. 도서관이라고는 했지만 조금 큰 규모의 서재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훨씬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곳이기도 했다.

“화려한 장식이나 규모가 가치를 모두 말해 주는 게 아니네요.”

훨씬 작고 소박한 이곳에 있는 자료들이 훨씬 더 귀하고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책이나 자료가 화려함을 뽐내는 건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겪어 왔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낡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것들이라 더 그렇게 보였다.

로에리안저에 있는 물건 대부분은 모두 화려하게 반짝이고 공들여 꾸며 놓았으니까.

“그래.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나나 로만 정도지. 이제 그대와, 조금 더 크면 에드윈까지 포함되겠군.”

“저도 들어와도 되나요?”

“그럼.”

그의 말에 천천히 책장을 따라 걸었다.

“제목이 없네요.”

“어디에 뭐가 있는진 알고 있으니까. 침입자를 위해 친절하게 제목까지 달아 줄 필요가 없지.”

“그렇군요.”

작은 규모라고는 했지만 제목 없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건 아니었다.

책장만 해도 이미 여러 개 있었고, 두꺼운 책도 있었으나 아주 얇은 책도 여러 권 있었으니까.

이 속에서 어떤 자료가 어디에 자리한 건지 바로 찾을 정도라니.

머리가 좋은 것인지, 혹은 그만큼 수없이 찾아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로에리안가에 대한 자료들이 대부분이야. 일부지만 다른 가문의 정보들도 있고. 뭐가 됐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공유하고 싶지 않은 자료들만 모여 있지.”

“제법 비장한데 분위기는 전혀 달라서 재밌네요.”

“그대에게 여기는 어떤 느낌이지?”

“편안하고 아늑하네요.”

“그래. 평온한 곳이지.”

레이넌은 먼저 자리를 잡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느긋하게 둘러보고 나서 나 역시 그의 곁에 앉았다.

오늘은 그래도 다른 날에 비해 디저트의 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마저도 이 장소와 참 잘 어울렸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과 같이 유유한 공기가 주변을 채웠다.

덕분에 한동안 레이넌도, 나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색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에드윈 곁에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하는 그대의 의견은 일리가 있어.”

침묵을 깨고 레이넌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대도 함께 위험해질 수도 있어.”

“제가 같이 위험해질 가능성보단…….”

“그래. 에드윈을 보호할 가능성이 크지. 하지만 작은 가능성이라도 무시할 수는 없어.”

레이넌은 아무래도 나와 에드윈이 붙어 있는 것이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오히려 두 사람 모두가 위험해질 수도 있지.”

“그렇긴 하죠.”

“에드윈의 주변에도, 그대의 주변에도 더 철저하게 경호를 늘릴 거야.”

“공작님은 그럼 제가 에드윈과 보내는 시간을 늘리는 걸 반대하시는 건가요?”

“그대가 결정했으니 안 된다고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야.”

이건 조금 뜻밖의 말이었다. 레이넌이 이렇게 다시 말을 꺼내길래 나를 설득하려는 줄 알았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말이야. 그대도, 에드윈도 다치지 않게 내가 보호할 테니 그런 걱정은 그대의 몫이 아니라는 걸 잊지 말고.”

“네. 조심할게요.”

“그래. 그 약속이면 됐어.”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작은 약속이었다. 하지만 레이넌은 약속을 들은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아,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뭐지?”

“별장도 그렇고, 건국제 때도 그렇고 황제 폐하와 친분이…… 아니, 꽤 친밀한 사이처럼 보여서요.”

“아아……. 내가 원래는 공작이 아니었다는 걸 아나?”

“네. 선대 공작의 사고로 갑자기 자리를 물려받으셨다고…….”

어쩌면 레이넌에게 있어서는 상처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라 절로 조심스러워졌다.

그렇지만 정작 레이넌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래. 그랬지.”

“그리고 얼핏 듣기로는 폐하도 비슷한 상황을 겪으셨다고 하던데요.”

내가 그런 이야기까지 들었을 줄은 몰랐는지 레이넌은 조금 놀란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아멜리아를 그대의 곁에 두길 잘했다니까. 이런 정보까지 얻어 낼 줄 알게 되고.”

역시. 내가 이런 이야기를 들을 만한 사람은 그녀밖에 없다는 걸 그도 너무 잘 알았다.

“그래. 원래 폐하도 그 자리에 오를 예정이 없었지.”

“네?”

“많은 부분이 비슷했어. 나와 같은 이유로 어렸을 땐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끔 지내셨지. 그렇다 보니 간혹 만나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고.”

“아, 친구셨구나.”

“친구라……. 뭐, 폐하는 그 단어를 좋아하시더군. 어쨌건 내 사정이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게 그분이셨지. 그분에게는 나였고.”

“다행이네요.”

“응?”

“아니…… 너무 치열하게 살아오셨으니까요. 누구라도 그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잖아요.”

나는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이것만으로 이미 지나온 시간을 위로할 수도, 이미 생긴 상처를 치유할 수도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미약한 손의 온기를 통해서라도.

그는 잠시 겹쳐진 두 손을 내려다봤다.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눈으로 한참을 겹쳐진 손을 바라봤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레이넌은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대는 참 알 수가 없어.”

“네?”

“내가 상처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나.”

“……주제넘었나요?”

“아니. 그대니까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래서 에드윈도 금세 마음을 열었을 거야.”

말의 내용은 따뜻했지만 목소리는 무뚝뚝했다. 그래서 좋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쉽게 알 수가 없었다.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어. 다들 감정을 숨겨야 한다고 여기고, 감정은 곧 약점이라 생각하지.”

레이넌의 목소리가 그 말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감정 없는 목소리는 늘 들어 왔던 것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레이넌의 얼굴 역시 늘 보아 왔던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사용인들도 자연스럽게 비슷한 모습을 하게 됐지. 아마 그대가 귀찮게 얼쩡거리면서도 싫지 않았던 건 그래서였을지도 몰라. 재미있었거든.”

“재미…….”

“그래. 재미있었어. 그대만큼 속마음이 그대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거든. 물론 처음엔 그대가 그렇게나 과장된 생각을 하는 사람인 줄 모르고 착각한 것도 있었지만 말이지.”

“착각이요?”

“그대가 내 곁에서 얼쩡대는 건 날 좋아해서라고.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

레이넌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얼른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 봤다.

어느 부분이 그렇게 느껴졌던 걸까. 그의 말마따나 자꾸 얼쩡거렸던 것? 아니면…….

생각해 봐도 그것 말고는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를 무서워했던 그 모습을 좋아서 떨고 있는 모습이라고 착각했지.”

“네?”

황당함에 되묻자 레이넌은 그제야 웃음을 보였다.

“그러게. 이제 와서 생각하면 참 터무니없는 착각이야. 그런데 그 착각 덕분에 지금 그대가 내 곁에 있어.”

그렇게 말한 레이넌은 내 손을 자신의 얼굴 쪽으로 끌었다. 그 모습은 꼭 내 손에 제 얼굴을 묻으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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