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낯 뜨거운 말을 참 뻔뻔, 아니 당당하게도 한다 싶어서 황당한 듯 되물었다. 레이넌은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시 한번 입을 벌렸다.
살짝 벌어진 입으로 크림이 사라졌다. 새하얀 크림과 빨간 혀가 대조적이었다.
다른 두 색감이 섞여 드는 것을 넋 놓고 보고 있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한 조각마저 레이넌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저것도 맛있어 보이는군.”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꼭 그를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어 화들짝 놀라며 얼른 레이넌이 말한 쿠키를 집어 들었다.
“이것 말이죠?”
“그래.”
레이넌은 자연스럽게 내가 건넨 쿠키를 베어 물었다. 아삭아삭하고 쿠키가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와중에도 레이넌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시선에 손이라도 달린 것처럼 나 역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레이넌에게 시선이 팔린 사이 쿠키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레이넌은 몇 번 더 손가락으로 이런저런 디저트를 가리켰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디저트를 그는 싫은 내색도 없이 먹었다.
단걸 싫어하는 사람이 맞나. 잠시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역시 제일 처음 먹은 게 가장 맛있었더군. 그대도 먹어 보지.”
이번에는 반대였다. 레이넌이 내게 컵케이크를 내밀었다.
눈만 깜빡이고 있자 그는 재촉하듯 아예 컵케이크를 입술 앞으로 가져왔다.
조심스럽게 그가 건넨 컵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분명 여러 번 먹어 봤는데 이번에는 맛이 전혀 달랐다.
이렇게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었던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레이넌은 뿌듯하게 웃었다.
“맛있다니까, 정말.”
“다른 날보다 훨씬 맛있는데요.”
“다행이군.”
레이넌은 다시 한번 내게 컵케이크를 권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남김없이 그의 손에 들린 컵케이크를 모두 먹었다.
어느새 비어 버린 레이넌 자신의 손과 나를 번갈아 보던 그는 다시금 내게 손을 뻗었다.
내가 뒤로 물러나자 그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나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공중에 떠 있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조금 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왔다. 이내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입가를 쓰다듬었다.
조심스럽게 먹었지만 입가에 크림이 묻었던 모양이었다.
멋쩍은 얼굴로 손을 들어 입술을 가리자 레이넌은 웃으며 제 엄지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혀로 쓸었다.
“역시 맛있군.”
“……네.”
“그대 덕에 이런 것도 먹어 보고 좋아.”
다정한 눈빛이 조금씩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칠 때쯤 자연스럽게 눈이 감겼다.
그리고 곧 레이넌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달래 주기라도 하듯 혀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뱉어 내자 기다렸다는 듯 레이넌은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혀와 더운 숨이 한데 뒤엉켰다. 심장이 뛰고 온몸에 더운 기운이 퍼졌다.
무엇이든 붙들어야 했고, 붙잡을 수 있는 건 레이넌뿐이었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레이넌은 작게 신음을 흘리고는 조금 더 거세게 나를 몰아붙였다.
“고, 공작님…….”
나는 어느새 소파에 누운 채였고 그는 내 위에 올라탔다. 입술을 지나 턱선으로 내려온 그의 입술은 어느새 내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응?”
내 부름에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착실히 내 목덜미를 핥고 깨물고 있었다.
게다가 어느 틈엔가 레이넌의 손은 내 드레스 속을 파고든 채였다. 레이넌의 손가락에 박인 굳은살이 부드러운 살갗에 닿았다.
낯선 감각에 몸을 움츠리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유유히 움직이던 레이넌이 움찔했다.
그의 입술은 목덜미를 조금 더 배회하다가 다시 서서히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깊은 키스를 남긴 그는 조금씩 내게서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지 짙고 진득한 눈빛으로 내 입술을 응시했다.
곧 그는 안 되겠다는 듯 다시금 내 입 속을 파고들었다.
한참을 더 헤집고 난 후에야 레이넌은 겨우 떨어졌다. 거친 숨이 그와 나 사이를 가득 채웠다.
멍한 눈으로 숨을 고르고 있자 레이넌은 나를 바로 앉혔다. 그리고 제 손으로 흐트러트린 옷을 다시금 바로 가다듬었다.
“서두르는 건 좋지 않다고 했으니까.”
“네?”
“아니. 시간은 많으니까 조금 더 기다려 주겠다고.”
“……아.”
아무래도 그는 내가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하고는 멈춘 듯했다.
만약 그가 멈추지 않았더라면…….
조금 전 상황이 떠올라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렇다고 한들 붉어진 얼굴도, 내 속에 떠오른 여러 감정도 숨겨질 리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역시나 레이넌은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조금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그는 곧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 인내심이 언제까지 버틸지 자신은 없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그러고는 레이넌은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방을 빠져나갔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그가 말한 인내심을 잃어버릴까 봐 걱정이라도 된 듯이.
한순간에 온몸에서 힘이 빠져서 소파에 누웠다가 얼른 다시 일어났다. 눕자마자 내 위에 있던 레이넌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괜히 초조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기다려 준다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속마음에 듣는 사람도 없었지만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급하게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지만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레이넌이 나가고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이 방에 있는 건 나 혼자였다.
“르네 님?”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문을 연 아멜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이상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아멜리아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저렇게 의아한 듯 나를 불렀을 터였다.
“아, 응……. 이거 너무 많아서 거의 못 먹……었어.”
“그게 미안하셨어요? 어차피 르네 님 혼자 다 못 드실 양이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내 이상한 표정의 원인이 미안함이라고 짐작했는지 아멜리아는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나 혼자 먹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멜리아의 말에 또 조금 전의 일이 눈앞에 떠올랐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자꾸 떠오르는 잔상에 잠을 이루지 못할 것만 같았다.
***
레이넌은 르네의 방을 나설 때부터 흐뭇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이제 그의 얼굴만 봐도 감정이 파악될 정도였다.
덕분에 로만을 비롯한 여러 사용인은 편했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레이넌의 모습이 낯선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집무실로 돌아와서도 레이넌은 옅은 미소를 띤 채 업무에 집중했다. 하지만 뭔가가 불편한지 그는 자기 제 명치께를 쓸고 있었다.
“속이 안 좋으십니까? 칼슨을 부를까요?”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괜찮아. 단걸 많이 먹어서 그래.”
“……단걸 드셨다고요?”
“그래.”
“공작님께서 단걸 드셨다고요?”
“그래. 맛있더군.”
같은 질문을 했지만 레이넌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확실한 답을 내어주었다.
로만이 인상을 찌푸리고 레이넌을 바라봤다. 로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얼굴을 하는지 레이넌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뭔가를 떠올리는 듯 생각에 잠겨 들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눈빛과 웃음이 분명 레이넌이 먹었다는 단것을 향한 것은 아닐 터였다.
“르네 님이 먹여 주시기라도 했나 봅니다?”
빈정댄 것이었지만 로만의 말에 레이넌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는 한층 더 짙어졌다.
‘정말 르네가 먹여 줘서 단 음식을 먹기라도 했나.’
행복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오히려 로만이 감정이 상했다.
“불공평하네요.”
“원래 세상은 그런 법이지. 그래도 돈으로 보상하지 않나. 네가 나한테 할 말은 아니지.”
레이넌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한다는 듯 혀까지 찼다.
세상에 다시 없을 양심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은 로만이 울컥해서 뭔가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사랑에 빠진 레이넌을 자극해서 제게 이득 될 것은 없었다. 게다가 기분은 상했지만 이런 레이넌의 모습은 보기 좋았다.
“행복하십니까?”
로만은 비틀린 마음을 표현하는 대신 진심을 담아 레이넌에게 물었다. 레이넌은 로만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행복이라…….”
“그게 어떤 거냐고 물으실 것 같아 답해 드리자면, 아마 지금 느끼시는 그 감정이, 특히 르네 님과 함께하시며 느끼시는 그 감정이 행복일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한결 가벼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욕망과 행복이 그렇게 비슷한 감정인 줄은 몰랐군.”
“공작님?”
“왜?”
“행복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시죠.”
“왜지?”
“욕망과 행복이 영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늘 묶이는 것도 아니라서요.”
“그래?”
“네. 다만 지금 공작님께서 어떤 상태인지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래. 일 처리처럼 몰아붙이지 않기 위해 무척이나 참는 중이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이쯤 하겠습니다.”
르네 때문에 기분이 좋지만 그렇다고 마냥 그의 기분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로만은 얼른 포인트를 잡고는 화제를 돌렸다.
“벨라가 말한 곳에 숨겨져 있던 서류 봉투입니다.”
로만이 건넨 봉투를 받아 든 레이넌은 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그 속에서 종이를 꺼냈다.
내용을 확인한 레이넌은 재밌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었다.
“백지군.”
“네. 거짓 정보였습니다.”
“벨라도 이용당했고.”
“글쎄요. 슈나이더와 뜻을 함께해서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지 않겠습니까?”
“그랬다면 반지까지 줘 가면서 너를 끌어들이려고 하진 않았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그 반지를 말이야.”
벨라에겐 둘도 없는 반지를 건넸을 땐 무슨 의도가 있나 의심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말 로만을 끌어들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반지까지 내어줄 정도로 간절하게.
“아마 슈나이더가 그렇게까지 공들여 데려오려고 하는 사람이니 벨라도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단순하기는.”
“그럼 슈나이더는 벨라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 예상했던 거겠군요.”
“그렇지.”
“그래서 벨라를 이용해 이 정보를 일부러 넘겼다는 건데……. 의도가 뭘까요?”
로만의 물음에 레이넌은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슈나이더가 아마 그걸 잃어버린 모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