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를 지킬 게 필요하니까요.”
에린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캐서린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캐서린의 반응은 에린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화를 내거나 당황하기는커녕 잘됐다는 듯 웃음을 뱉어 냈다.
“뭐, 뭐예요?”
“누가 가져갔는지 아니까 마음은 편해서. 차라리 네가 낫지.”
에린은 캐서린을 통해서 슈나이더의 사람이 된 경우였다.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슈나이더의 악명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처럼 한낱 시녀인 이는 언제든지 쉽게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거란 것 역시 예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몇 달을 캐서린 주변을 맴돌다가 겨우 그녀가 슈나이더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알아내는 데도 시간이 걸렸지만 직접 손에 넣는 데는 더 오래 걸렸다. 캐서린의 반응을 보니 에린이 가져갔다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꽤 오래 마음고생을 했는지 오히려 에린의 고백에 후련한 얼굴을 했다.
캐서린의 화를 돋우고 싶었는데, 오히려 그녀를 편안하게 만든 꼴이 됐다.
에린은 그 생각에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곧 입꼬리를 올렸다.
“글쎄요. 그게 과연 아직도 내 손에 있을까요.?”
그래, 이 얼굴이었다. 에린이 보고 싶었던 건.
당황과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에린은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수작이야?”
“수작을 부리고 싶어도 안타깝게 그럴 기회가 없었네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고? 다른 사람한테 넘긴 거야?”
“아직은 아니에요.”
뜸을 들이자 캐서린의 얼굴에 어린 초조함이 점점 짙어졌다. 이제야 에린의 화도, 답답했던 속도 풀리는 것만 같았다.
“사실은 그걸 내 방에 숨겨 놨는데…….”
일부러 말을 흐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에린의 정체가 들켰다는 걸 이미 아는 캐서린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그래요. 내 방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요.”
“그래서? 나보고 네 방에 가서 그걸 꺼내 오라는 거야?”
“아뇨. 나는 내일 떠나요. 이제 필요 없으니까 알아서 하라고요.”
에린 역시 탐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잘 사용하면 큰돈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방에 들어가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누군가에게 그걸 가져다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캐서린은 에린의 방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지금 그녀는 제 몸 하나 가누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캐서린이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게 밝혀졌다고 한마디만 해 줬어도 레이넌 앞에서 그런 창피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돈이 아쉽긴 하나 누군가의 눈에 띌까 캐서린이 전전긍긍한다면 오히려 그 편이 더 속이 시원했다.
그래서 에린은 그대로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자신은 황제령에 갈 것이니까. 그것도 무려 레이넌이 직접 알아봐 준 자리였다.
슈나이더와의 접점은 끊어졌고, 그든 캐서린이든 에린을 위협할 일은 없을 터였다.
“찾아봐. 어떻게 해서든 다시 내 손에 쥐여 주고 나가.”
“내가 왜요? 필요한 사람이 직접 찾으러 가시든가요.”
에린은 산뜻한 미소를 남기고서는 캐서린의 방을 나갔다.
***
에린의 미소와는 달리 짙은 어둠이 캐서린의 방을 채웠다. 힘겹게 숨을 몰아쉬던 캐서린은 잠시 머리를 짚었다.
곧 다시금 힘들게 침대에 몸을 뉘었지만 캐서린의 얼굴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떠나질 않았다.
“찾아와야 할 텐데……. 하필 에린이 가져갔을 줄이야.”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던 캐서린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다시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갑자기 몸 이곳저곳이 아파 오더니, 이제는 혼자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였다.
레이넌의 배려로 몸이 나을 때까지 휴가를 얻었다. 오스틴이 정기적으로 와서 상태도 봐 주고 있었다.
오스틴 덕분에 오래도록 캐서린을 괴롭혀 온 불면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졸음이 몰려왔고, 그러다 몸이 조금씩 안 좋아졌다.
그러면서 오스틴이 더 자주 찾아와서 진료를 해 줬다. 오래 신경을 곤두세웠고, 마음이 편해지면서 그간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온 것이라 말했다.
새로 받은 약으로 몸의 통증은 사라졌지만, 전보다 더 기운이 없어졌다. 오스틴은 이 또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푹 쉬라고 말했다.
덕분에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시중을 받아 가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 기운이 떨어진 몸으로는 에린의 방까지 걸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제까지 아프다고 몸져누워 있다가 갑자기 에린의 방을 뒤지면 저 역시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것이 뻔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뭔가 묘하게 무언가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에린의 돌발 행동 때문에 예민해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슈나이더의 연락이 조금씩 뜸해졌다. 내용도 전과는 판이했다.
전엔 외부에서 이런 공격이 들어갈 테니 내부에서 조율을 좀 해 두라는 등 명확한 지시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들킨 에린과 마빈이 허튼짓을 못 하게 단속하라는 등 영양가 없는 내용뿐이었다.
연락을 차마 끊어 버리지는 못하고 뜬구름 잡는 소리로 시간을 버는 느낌을 줬다.
“설마 나마저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캐서린은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씹어 삼켰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 둔 것이 있었다. 에린이 홀랑 가져가 버렸지만.
누구도 모를 곳에 꼭꼭 숨겨 둔 것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고,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그걸 에린이 가져갔을 줄이야.
생글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네던 그맘때의 에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저걸 끌어들인 게 잘못이지.”
캐서린은 어떻게든 다시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발버둥 때문에 더 숨만 차오를 뿐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걸 되찾아야 슈나이더를…….”
캐서린은 숨을 헐떡였다. 초조한 마음과 복잡한 정신 때문에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때보다 몸이 더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진정하자. 일단 진정하고 생각해.”
캐서린은 심호흡하며 자신을 달랬다. 어차피 움직이지 못할 몸, 정신이라도 바로 차려야 했다.
“나도 잘라 내려는 모양인데……. 에린의 방이 치워지기 전에……. 아니, 잠깐만.”
캐서린은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해야 하지만 정신이 그리 맑지는 않았다.
“그게 로에리안 공작님 손에 들어간다 한들 슈나이더 공작님의 약점이지. 그걸로 내가 슈나이더가의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없잖아.”
그랬다. 그건 슈나이더에겐 치명적인 약점이었으나 캐서린에겐 아니었다.
이렇게 되면 어느 쪽이 승리하든 캐서린에게 나쁜 일은 없을 터였다. 지금처럼 아프다는 걸 핑계 삼아 조용히 여기에서 지내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아프기 전까지 일이 진행되던 상황을 미루어 봤을 땐,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슈나이더가 승리하면 그의 사람으로, 로에리안이 승리한다면 지금처럼 시녀장으로 지내면 된다.
한순간에 골치 아픈 일이 모두 해결된 것만 같았다. 이렇게 되면 제가 갖고 있는 것보다 나을지도.
오히려 일이 잘 풀린 건지도 모른다.
“하아…….”
캐서린은 잠깐 사이에 잔뜩 들이닥쳤던 고민을 훌훌 털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긴장이 풀리며 나른한 기운이 맴돌았다.
다시금 몸 이곳저곳이 아파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몸으로 많이 움직였고, 생각을 너무 많이 한 탓인 것 같았다.
캐서린은 힘들게 손을 뻗어 머리맡에 놓인 약병을 들었다. 오스틴이 캐서린을 위해 특별히 제조한 약이었다.
약을 먹으면 참을 수 없이 잠이 쏟아졌지만 그래도 몸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몸 여기저기 나타나던 통증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약을 꺼내는 손은 덜덜 떨렸다. 몇 알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지만 주워 담을 힘도, 정신도 없었다.
일단 손에 들어온 약을 얼른 삼켰다.
“약을 주워야 하는데…….”
캐서린의 목소리는 이미 잠에 잔뜩 취한 상태였다. 잠시 약을 주워 보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그대로 침대 위에 툭 떨어졌다.
이내 어두운 방에는 깊은 숨소리만 남았다.
***
“오늘은 제 방이네요?”
레이넌과 다시 티타임을 가지기 시작한 후로 장소는 내내 실내였다.
안전이 염려스러운 탓인지 혹은 단둘이 실내에서 있는 게 좋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답답하더라도 조금은 참지. 아무래도 탁 트인 곳보단 안전하니까. 물론 난 언제든 실내가 좋지만.”
……아마 그에겐 일석이조인가.
레이넌의 얼굴에 떠오른 의미심장한 미소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작지만 가벼운 그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나를 부르는 듯한 웃음소리에 절로 고개가 다시 레이넌에게로 돌아갔다.
그의 눈에는 나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오롯이 내보이는 레이넌이 얼마나 근사한지 그는 알지 못할 터였다.
애정과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이 얼굴이, 이 미소가 오직 나를 향한 것이라니.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몇 번이고 확인했고, 지금 눈으로도 보고 있는데도 여전히 꿈만 같았다.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레이넌을 바라만 보고 있는데 그의 눈이 동그랗게 접혔다.
짙어진 그의 미소에 문득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아직도 이렇게 수줍어하면 어쩌려고?”
“다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이 차려 놨네요.”
농담과도 같은 레이넌의 말에 나는 얼른 화제를 테이블 위에 놓인 디저트로 돌렸다.
하루가 지날수록 디저트는 조금씩 늘어났다. 이제는 테이블을 가득 채울 정도로 가득 차서 보기만 해도 눈이 즐거웠다.
예쁜 색감과 화려한 장식은 먹기에도 아까울 정도였다. 심지어 이게 두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니 더욱이 손을 대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한 사람을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 레이넌은 차를 마시긴 하지만 디저트에는 입도 대지 않으니까.
“좋아하는 것 같길래. 일단 되는대로 다 준비해 보라고 했지.”
“예뻐서 구경만 해도 즐겁긴 한데요.”
“구경만 해서 어쩌게.”
“근데 이렇게 많이는 못 먹어요. 공작님도 안 드시잖아요.”
“단걸 싫어하니까.”
딱 잘라 말하는 그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어지간히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눈앞에 놓인 여러 선택지 중에서 그나마 제일 덜 단 컵케이크를 하나 집어 들었다.
아마 레이넌에겐 이 정도도 많이 단 음식이겠지.
그래도 맛있는데.
따지고 보면 그는 딱히 음식의 맛을 그리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식사 때도 그랬고, 티타임에도 그랬다. 그나마 차라도 마시긴 했지만 그 외엔 뭔가를 잘 먹지 않는 것 같았다.
컵케이크를 들고 잠시 바라보고만 있자 레이넌이 물었다.
“보고만 있을 건가?”
“한번 드셔 보실래요?”
나도 모르게 나온 질문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즐기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으니까.
내가 대뜸 컵케이크를 그의 입가에 가져가자 그는 내 손을 빤히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슬쩍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내가 내민 컵케이크를 한입 베어 물었다.
하얀 크림이 그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그 뒤로도 한참을 그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감상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잔뜩 집중해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천천히 레이넌의 입이 열렸다.
“그대의 말대로군. 맛있네.”
레이넌의 말에 나는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러다 내가 무슨 짓을 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얼른 손을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레이넌이 내 손목을 붙들었다. 옴짝달싹 못 한 채 레이넌을 바라보자 그는 흡족한 듯 말했다.
“그대가 먹여 줘서 그런가 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