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넌은 에드윈과 내 사이에 들어오는 것을 포기했는지 먼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혹시 다른 곳은 다치지 않았나 에드윈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다행히 로만이 말한 대로 손목을 다친 것이 전부인 듯 보였다.
“정말 아프지는 않아?”
“네. 그냥 확 움직이거나 힘을 많이 주면 조금 뻐근한 정도예요.”
“그래. 이만하길 다행이다.”
“그렇게 서 있지들 말고 앉지.”
레이넌의 말에 나도, 에드윈도 그의 곁에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에드윈이 다치면서 이렇게 모이게 되었지만 대화는 다른 때와 다름없이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다행히 로만도, 아멜리아도 평소와 같이 중간중간 말을 얹었고, 무엇보다 에드윈이 있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어쩌다 보니 오랜만에 다들 모여 시간을 보내게 된 셈이었다.
시끌시끌한 분위기를 한껏 즐기고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일어났을 때였다.
“아버지, 어머니.”
에드윈의 부름에 레이넌과 내 고개가 동시에 그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 왜 두 분만 티타임을 가지세요? 저는 왜 빼시는 거예요?”
“으, 응?”
해맑은 눈으로 왜 자신만 빼놓는 거냐고 묻는 에드윈의 물음에 나는 당황했다.
동시에 로만은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해 댔다. 갑작스럽게 어색한 반응을 보인 나와 로만의 모습에 에드윈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에드윈의 시선을 끈 건 바로 레이넌이었다.
“내일부터 다 같이 저녁 식사를 하도록 하지.”
평소와 다름없이 덤덤한 레이넌의 목소리에 에드윈은 작게 되물었다.
“다 같이?”
“그래. 다 같이.”
다 같이, 라는 말이 에드윈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이제 매일 함께하는 시간이 생겼다는 것이 에드윈에겐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소식인 듯했다.
에드윈은 조금 전까지 가졌던 의문을 잊고 앞으로 함께할 저녁 식사에 마냥 기뻐했다.
에드윈과 함께하는 것도 그렇지만 자연스럽게 레이넌과의 시간이 늘어난 건 나에게도 기쁜 일이기도 했다.
슬쩍 입꼬리를 올리다 레이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미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괜히 조금 전의 티타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 나는 고개를 숙였다. 레이넌은 그런 내 옆으로 다가와 슬쩍 손을 잡았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편안하기까지 한 단단한 손에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곧 주변에 사람이 많은 걸 깨닫고 얼른 손을 빼냈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어머니, 어디 불편하세요?”
다행히 손을 잡은 것 자체는 보지 못한 듯 에드윈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아, 아니야. 그보다 에드윈.”
“네.”
“다 나을 때까지 얌전히 지내는 거야, 알았지?”
“네.”
“그럼 저는 먼저…….”
씩씩한 에드윈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아멜리아의 팔을 끌었다. 그러고는 도망치듯 에드윈의 침실을 먼저 빠져나왔다.
에드윈이 다친 일 때문인지 아멜리아는 방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진지한 얼굴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방에 돌아와서도 아멜리아는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런 아멜리아와 달리 나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표정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이넌 생각이 자꾸 떠오른 탓이었다. 웃었다가 부끄러웠다가 멍했다가…….
그 모든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했다가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그렇게 부산스러운 나를 보고도 아멜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멜리아를 조금이라도 달래 주고 싶었지만 당장 이리저리 날뛰는 내 감정을 추스르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이렇게 작은 일에도 널뛰는 감정이 언젠가는 잔잔해지는 날도 올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레이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여러 감정이 뒤섞여 숨이 가빠 왔다.
앞으로도 내내 이렇다면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꽤 행복한 것 같기도 했다.
***
작은 가방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제 짐이 이게 전부일 리 없잖아요.”
에린은 날 선 목소리로 말했지만 짐 가방을 가져온 이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짐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해서 나가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일 텐데.”
그의 말에 에린은 움찔하며 손을 뻗어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 난리가 나고 당장에라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으로 쫓겨나거나 죽어 나가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며칠 동안 아무것도 없는 방에 가둬 둘 뿐이었다.
그러다 며칠 뒤 로만이 찾아와서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계약서야. 황제령에서 일하겠다는.”
“황, 황제령이요?”
“그래. 르네 님과의 인연이 있으니 공작님께서 관용을 베푸신다는군.”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에린이 망설이자 로만은 내밀었던 종이를 재빨리 수거했다.
“동의하지 않으면 나야 좋지. 거절했다고 말씀드리지.”
“아니요!”
에린은 자리를 떠나려는 로만의 팔을 얼른 붙들었다. 로만은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얼른 에린의 손을 쳐 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그녀의 손이 닿은 곳을 몇 번이고 털어 냈다.
“주세요.”
르네 핑계를 댔지만 어쨌거나 레이넌의 뜻이라는 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만히 있을걸.’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레이넌이 아무래도 에린 자신을 어떻게든 지키려는 것 같았다. 그러니 황제령으로 보내는 것이겠지.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레이넌이 다시 자신을 찾을지도 몰랐다.
꺼져 가던 희망이 다시금 불을 피웠다. 에린이 웃으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서는 자세히 읽어 보는 편이 좋을 텐데.”
“공작님께서 주신 건데 저한테 안 좋은 내용이 들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래.”
에린의 말에 로만은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지만 에린은 금세 잊었다.
그리고 또 침대만 있는 그 방에서 내내 홀로 지냈다. 지겨움을 견디다 못해 창밖으로 뛰어내릴까 싶었지만 그러기도 여의치 않았다.
문 앞은 물론 창 아래에서도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쉽게 뛰어내릴 수 없는 높이였음에도 빈틈은 전혀 주지 않았다.
다행히 그리 지루한 나날은 곧 끝이 났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남자가 내일이면 저택을 떠날 거란 소식을 전해 온 것이다.
남자는 레이넌의 곁을 지키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름도 모르고, 목소리를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무서운 인상이라 잠시 망설였지만, 방에 가서 짐을 좀 챙겨 오고 싶다고 말하자 남자는 거절했다.
대신 자신이 가서 챙겨 오겠다고 했고, 그게 이 작은 짐 가방이었다.
남자의 눈치를 보며 에린은 가방을 열어 제 물건을 확인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짐이었건만 필요 없는 것이 반이었다.
에린은 성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짐 가방에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남자의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짐을 더 챙겨 와야 할 것 같은데…….”
“자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그것마저도 챙겨 가지 못하게 하라는 말씀이 있었네.”
그가 딱 잘라 거절하자 에린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지만 꼭 챙겨 와야 할 물건이 있었다.
‘아니, 아니지. 이제 나한테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잖아.’
에린의 얼굴에는 미소가 퍼졌다. 그렇지 않아도 제 정체가 들켰음을 알고서도 입 다물고 있었던 캐서린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물건을 언급하면 그녀의 속을 뒤집을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럼 혹시 캐서린 님께 인사를 드리고 와도 될까요? 그간 도움도 많이 받았는데 인사도 없이 떠나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요.”
에린의 말에 남자는 잠시 그녀를 빤히 내려다봤다. 꼭 속마음이라도 읽는 듯한 눈빛에 지레 찔린 에린은 슬쩍 눈길을 피했다.
“좋아.”
어쩐 일인지 남자는 캐서린과의 만남을 허락했고, 그가 이끈 곳은 예상하지 못한 장소였다.
분명 바삐 일할 시간이었는데 남자가 인도한 곳은 본관 구석에 있는 침실 중 하나였다.
“왜 여기에……?”
에린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남자는 말없이 문을 열어 줬다. 물어 봤자 답을 들을 리 없다는 걸 아는 에린은 더 묻지 않고 방으로 들어섰다.
커튼을 쳐 놓은 방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자 침대 위에서 힘겹게 숨을 쉬고 있는 캐서린이 보였다.
“……캐서린 님?”
꽤 많이 아픈지 마치 다른 사람처럼 야윈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에린은 저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다행히 그 목소리도 캐서린의 귀에 닿았는지 천천히 그녀는 눈을 떴다.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곧 캐서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다가 다시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많이 아프신가 본데 누워 계세요.”
“여기까지 오면 어떻게 해?”
기운은 없으면서도 목소리에는 신경질이 잔뜩 묻어났다. 그게 오히려 에린의 기분을 나아지게 만들었다.
잠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에린은 곧 표정을 바꿨다. 참아 왔던 화를 토해 낼 곳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알고 있었죠?”
혹여 바깥에 소리라도 새어 나갈까 에린은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뭘?”
“로에리안 공작님이 알고 계시던데요. 내가 슈나이더 공작님의 사람이라는 걸.”
에린의 말에 캐서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확신을 주는 모습이었다.
“역시.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나한테 말 한마디 안 해 줬어요?”
“날뛰지 말라고 그렇게 조언했는데 들은 척도 안 한 건 너야.”
캐서린은 오히려 에린을 나무랐다. 뻔뻔한 캐서린의 태도에 에린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제 가슴을 두드렸다.
“그래서 나 혼자 날뛰다가 죽으라고 내버려 뒀단 거예요?”
“보아하니 들킨 것 같은데…….”
캐서린은 에린이 화를 내든 신경질을 부리든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뭔가 이상하다는 듯 생각에 잠긴 캐서린을 보며 에린은 작게 웃었다.
“들킨 것 같은데 여길 어떻게 왔는지 궁금한가 보죠?”
“그래. 같이 죽자는 거야?”
“그러면 안 되나요? 어차피 나 죽으라고 내버려 둔 건 캐서린 님인데.”
“걸렸으면 혼자 조용히 도망을 치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든 했어야지. 나를 찾아오면 어쩌자는 거야?”
“어차피 죽을 거면 누구 하나든 물고 늘어져야죠.”
에린의 뻔뻔한 말에 캐서린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하지만 갑자기 움직여 몸에 무리가 왔는지 그녀는 이마를 짚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캐서린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에린은 팔짱을 끼고 의기양양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내가 혼자 죽을 거 같아요?”
“그래서? 네가 불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어쩌고 싶은 거야?”
“글쎄요. 아니, 그리고 슈나이더 공작님도 그러시는 게 아니죠. 직접 알려 주셨다던데요?”
“……직접?”
캐서린은 그건 예상하지 못한 듯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에린은 그런 그녀에게 허리를 숙여 조용히 말했다.
“난 지금 당신을 물고 늘어질지, 슈나이더 공작을 물어질지 고민 중이에요.”
“뭐?”
“당신이 슈나이더 공작에게 배신당할 때를 대비해 준비해 둔 그거 말인데요.”
에린의 말에 캐서린의 얼굴이 단단히 굳었다.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입이 작게 움직였다.
“네가 가져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