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넌의 손이 주는 온기에 내 체온이 데워지는 것만 같았다.
뜨거운 손길을 따라 움직이는 체온의 변화를 느끼던 나는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의 손이 어느새 쇄골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반응을 확인한 그는 작은 웃음을 흘렸다.
숨과 함께 들이닥치는 웃음에 몸을 움찔한 것도 잠시였다. 그는 괜찮다는 듯 더 부드럽게 손을 아래로, 아래로 내렸다.
레이넌의 손을 붙들었지만 그게 오히려 그를 자극한 듯했다. 그의 숨이 거칠어지나 싶더니 곧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를 말리던 손이 그를 붙드는 모양새가 되었을 때였다.
노크도 없이 누군가가 다급하게 방으로 들이닥쳤다. 난데없는 방문객에 놀란 나는 있는 힘껏 레이넌을 밀어냈다.
당황스러움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지만 누가 들어왔는지는 차마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쪽을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에 들이닥친 것이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
처음엔 목소리의 주인이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내가 잠시 다른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 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감정이 그의 목소리에서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사색이 되어 말을 더듬는 로만의 모습을 볼 날이 올 줄은 미처 몰랐다.
로만은 안절부절못하며 레이넌의 눈치를 봤고, 나는 낯선 모습에 멍하니 잠시 로만을 바라봤다.
차마 레이넌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는지 로만은 이리저리 바쁘게 눈을 굴렸고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로만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홱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번에 내 시선이 닿은 곳은 레이넌이었다. 그는 내게 밀쳐진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자세를 바꾸는 것보다 레이넌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던 듯했다. 그는 살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러니 로만이 레이넌을 똑바로 못 보지.
내가 민 자세 그대로 멈춰 있는 레이넌의 모습이 신경이 쓰였던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만으로도 레이넌은 마음이 많이 풀린 듯했다. 흐뭇한 미소를 보내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힘을 주어 당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저도 정말 두 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로만은 이런 순간에 또 끼어들어야 하는 제 자신이 싫다는 듯 말했다.
“그럼 나가.”
냉정한 레이넌의 목소리를 듣고 로만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단번에 제가 하려던 말을 했다.
“에드윈 님이 다치셨습니다.”
생각하지 못한 말에 나는 다시금 레이넌을 힘차게 밀어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이넌 역시 로만에 대한 노여움을 금세 지우고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에드윈이 다쳤다고?”
“네.”
로만이 다시금 확인해 주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에드윈을 만나서 상태를 확인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 갑자기 움직인 탓인지 발목이 꺾여 몸이 휘청거렸다. 다행히 레이넌이 바로 붙들어 준 덕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진정해. 에드윈 상태를 보기 전에 그대가 먼저 다치겠어.”
“하지만 에드윈이…….”
“로만.”
“네, 공작님.”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에드윈에게로 가면서 듣지.”
“알겠습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발목이 시큰거렸지만 그보다 에드윈 생각에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레이넌은 그런 내 손을 꼭 잡은 채로 로만에게 어떤 상황인지 확인했다.
“많이 다쳤나?”
“다행히 크게 다치시진 않았습니다. 다만 당분간 오른손은 사용하지 않는 편이 낫겠답니다.”
“오른손?”
“네, 오른쪽 손목을 삐끗한 정도입니다. 움직일 때 약하지만 통증이 느껴지니 조심하라는 의미랍니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다행이군.”
얼마 전에 가든 아치가 넘어가는 일 때문이었을까. 당연히 크게 다쳤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그러게. 다행이네요.”
숨을 크게 내쉬며 말하자 레이넌은 내 손을 토닥였다.
“어쩌다 그랬지?”
“최근 에드윈 님이 진검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 두 분 모두 알고 계시죠?”
“그래.”
“그게……. 대련 중에 에드윈 님의 검 손잡이가 부러졌답니다.”
무척이나 설레는 얼굴로 진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며 자랑하던 에드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랬는데 결국 그것 때문에 다쳤다니…….
괜히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레이넌은 나와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손잡이가 부러졌다고?”
되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헛웃음이 담겨 있었다. 레이넌이 왜 그러는지 알겠다는 듯 로만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명 오전에 에드윈 님이 직접 점검하실 때만 해도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손잡이가 부러졌다?”
손잡이가 부러진 것이 문제인 것 같은데.
레이넌과 로만이 왜 저런 반응인지 알 수가 없어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했다.
“이번에도 너무 부자연스럽습니다.”
“지난번처럼 말이지?”
“네. 손잡이가 그렇게 쉽게 부러질 리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에드윈 님의 힘으로는 더욱이요.”
“그래. 우리 에드윈이 그렇게 힘이 센 줄 미처 몰랐군.”
레이넌과 로만도 에드윈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신경은 뭔가 다른 쪽에 더욱더 쏠린 듯 보였다.
“두 분 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따로 있는 거죠?”
내 물음에 로만은 레이넌을 바라봤다. 레이넌은 설명해 주라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상황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검 손잡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부러지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렇지. 에드윈을 다치게 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검날을 건드리는 편이 쉽고, 치명상으로 갈 확률이 높았지.”
“그럼…….”
차마 말을 잇지는 못했지만 내 질문을 짐작한 듯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팔을 붙들고 다시 한번 확인했다.
“누군가가 일부러 에드윈을 다치게 하려고 했다는 건가요?”
“그래. 검날이었다면 차라리 확신은 없었을 텐데…….”
“네. 없는 일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관리가 잘된 검인 데다가 에드윈 님의 힘을 생각하면 그래도 이상하다 의심은 했을 겁니다.”
“그럼 혹시 지난번 정원에서 있었던 일도 에드윈을……?”
“글쎄. 어쨌거나 이번엔 확실히 에드윈을 노린 건데……. 다치게 하겠다는 건지 보호하겠다는 건지 헷갈리는군.”
묘한 어조였다. 그러고 보니 정원에서의 일도 그랬다. 구하려는 사람과 해치려는 사람이 따로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번 에드윈의 일을 보면 두 사람이 개입한 걸로는 보이지 않았다.
“위협만 하고 싶은 걸까요.”
조용히 읊조리듯 나온 내 목소리에 레이넌과 로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그렇게 보이기는 하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서 얻고자 하는 게 뭔지 더 헷갈리긴 합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덧 에드윈의 침실 앞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레이넌이 나를 붙잡았다.
“르네.”
“네?”
“조금 전에 같이 듣지 않았나. 큰 상처도 아니고 당분간 조심하면 금세 나을 거라고 했는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제 얼굴이…… 그렇게 이상해요?”
그는 내 어깨를 붙들고 시선을 맞춰 왔다.
“에드윈이 그대를 오히려 걱정할 만한 얼굴이야. 그렇지 않아도 아픈 애한테 걱정을 끼칠 순 없잖아.”
“알겠어요.”
레이넌의 담담한 말이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하지만 어깨를 잡은 그의 손에서도 조금의 떨림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레이넌도 적지 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하긴, 나보다 그가 더 놀랐을지도 몰랐다. 에드윈 걱정에 나를 달래기까지 하게 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의 말대로 마음을 다잡았다.
정작 에드윈은 씩씩하게 웃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여서 에드윈에게 괜한 걱정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이 한결 편해진 걸 확인한 레이넌은 다시 내 손을 끌었다. 이제까지 일부러 천천히 걸은 듯 그는 이제야 나와 보폭을 맞췄다.
“어머니!”
에드윈의 침실에 도착하자 그는 밝게 웃으며 내게 안겼다.
“나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군.”
레이넌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분명 에드윈에게도 들렸을 것 같았다.
하지만 에드윈은 전혀 듣지 못했다는 듯 내 품을 더욱더 파고들었다.
“다쳤는데 이렇게 뛰면 어떻게 해.”
“발을 다친 게 아니잖아요.”
“그래도. 그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손으로 짚을 거 아냐.”
“이 정도로 넘어질 리가 없잖아요. 제가 얼마나 튼튼한데요.”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폭 안겨서 이야기한 탓에 에드윈의 목소리는 조금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게 또 너무 귀여워서 웃으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자 에드윈은 마음에 든 듯 나를 안은 손에 힘을 줬다.
“손에 힘주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일단 좀 떨어져 보자, 에드윈.”
“그렇게 많이 다친 거 아니에요. 정말 하나도 안 아픈걸요.”
“그래도. 한번 보자.”
에드윈은 아쉬운 듯 천천히 내 품에서 빠져나왔다.
“정말인데.”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어서 얼마나 다쳤는지 내 눈으로는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밝은 에드윈의 얼굴을 보니 평소와 비슷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아프진 않은데 그래도 어머니가 이렇게 와 주시고 응석도 부릴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에드윈은 신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솔직한 속마음을 말하는 에드윈이 기특해서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프지 않아도 응석은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어. 다음엔 다치지 않고 응석을 부려 주면 좋겠는데?”
나는 에드윈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에드윈은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에드윈?”
내 부름에 에드윈의 얼굴에서 사라졌던 표정이 돌아왔다.
조금씩 입꼬리가 올라가나 싶더니 곧 나조차 미소를 짓게 만들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오래 기다리고 기다렸던 선물을 받기라도 한 듯이 아주 행복한 얼굴로.
“네!”
에드윈은 힘차게 대답하고는 손뼉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곧 체이스가 에드윈을 막았다.
“조심하셔야 한다니까요.”
에드윈을 빼고 모두가 그의 돌발 행동에 놀랐지만 정작 당사자는 헤헤, 하고 웃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