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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02)화 (102/129)

“르네 님.”

세실이 아침에 나를 찾아와서는 봉투를 건넸다.

“이게 에린의 옷장에 있었다고?”

“네.”

왜 세실이 수상하게 여겼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내용이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봉투 자체가 꽤 고급스러워 보였다.

봉투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고 있자 세실이 흥미로운 듯 허리를 숙이며 함께 봉투를 관찰했다.

바깥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고 어떤 표식도 없었다.

다만 실로 봉해져 있었는데, 그 실의 문양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열어 보실 거예요?”

실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세실이 궁금한 듯 물었다.

“음……. 글쎄. 어쨌든 돌려줄 게 아니니까 열어 봐도 될 것 같은데. 궁금해?”

나는 세실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녀 또한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에린이 그 성격에 굳이 챙겨 놓은 거니까 궁금하긴 하죠. 걔가 이렇게 고급 봉투를 어디서 구했을까요?”

“그렇지? 얼핏 봐도 너무 고급인데.”

세실에게 말했던 것처럼 열어 봐도 특별히 문제는 없었을 것 같았다. 보아하니 온전히 에린의 것도 아닌 것 같았고.

“일단 내가 가지고 있을게.”

“네.”

내가 봉투를 만지작거리고만 있자 세실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그녀도 이게 뭔지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었다.

“정말 안 뜯어 보실 거예요?”

“글쎄. 한번 뜯어 볼까?”

조심스럽게 봉투를 봉인한 실을 뜯었을 때였다.

“르네 님, 말씀하신 시간이 다 됐습니다.”

“아.”

아멜리아의 말에 나는 얼른 봉투를 서랍에 넣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거울 앞으로 가서 섰다.

다른 날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마다 세실이 잘 단장해 주었으니 여느 날처럼 단정하고 잘 꾸며진 모습일 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오늘따라 옷이며 장신구, 심지어 얼굴까지 전부 어색해 보이고, 뭔가 이상해 보이기까지 했다.

“머리가 너무 헝클어진 것 같지 않아?”

“아니요. 오늘은 다른 날보다 더 예쁘게 잘 손질된 것 같은데요.”

내가 머리를 자꾸 만지작거리자 아멜리아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 심지어 르네 님이 자꾸 만지니까 더 헝클어지잖아요.”

세실은 내 손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다시 정돈해 주며 말했다.

“얼굴도 조금…….”

거울 속의 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하자 아멜리아는 숙인 내 상체를 다시 일으켰다.

“오늘도 언제나처럼 아름다우세요. 그러니 걱정 말고 얼른 가시죠.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 얼른 가야겠네. 공작님을 기다리게 할 순 없으니.”

“그럼요.”

오늘따라 외모에 신경 쓰는 나를 세실은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아, 깜빡한 게 하나 있었네요.”

아멜리아는 방을 나서기 전에 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나는 다시 화장대 앞에 앉았다.

“이걸로 르네 님 머리를 다시 묶어 줄래?”

아멜리아는 액세서리 함을 뒤지더니 리본 하나를 들어 세실에게 건넸다.

“네.”

아멜리아의 손에 들린 리본을 본 순간 나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 아니 아멜리아.”

“네?”

“지금 이대로도 괜찮지 않아?”

“왜요? 지금 입은 드레스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아멜리아는 내가 이러는 이유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대답했다. 그리고 그 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세실은 내 머리를 다시 한번 예쁘게 다듬었다.

“그리고 역시 첫 데이트엔 의미 있는 선물을 하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첫 데이트요?”

아멜리아의 말에 깜짝 놀란 세실의 눈빛이 닿자 내 얼굴은 화르르 달아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데이트라니. 아멜리아라고 해도 이것만큼은 쉽게 짐작하지 못하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언제나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여자였다.

“공작님을 모시려면 독심술이 필수야?”

“설마요. 르네 님이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신다고 생각하진 않으시고요?”

“……그 정도야?”

“네. 그리고 사실 이번엔 저도 조금 긴가민가했는데 확실해졌네요.”

아무리 아멜리아라도 내가 레이넌과 마음을 확인했다는 것만큼은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그녀에게 확신을 심어 준 건 나였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능청스럽게 떠보면…….”

조금은 원망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출발하셔야죠? 물론 공작님은 기꺼이 기다리시겠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으실 거 같은데요.”

아멜리아의 말에 나는 그녀를 살짝 흘겨보고는 얼른 걸음을 옮겼다. 레이넌이 빨리 보고 싶다기보다는 그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보고 싶은 것도 맞긴 한가…….

그렇게 아멜리아의 미소를 받으며 티타임 장소에 도착한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여기라고?”

“네.”

“집무실에서 티타임을 가지자고 하셨단 말이야?”

아멜리아가 나를 데리고 온 곳은 레이넌의 집무실 앞이었다.

설마 하며 되묻자 아멜리아는 내가 왜 그러는지 이해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달랬다.

“……네. 생각이 있으시겠죠. 일단 들어가 보세요.”

아멜리아가 말한 대로 어쩌면 이게 나와 레이넌의 첫 번째 데이트라고 봐도 좋을 터였다. 그런데 그 장소가 집무실이라니.

이 넓은 공작저에 예쁘고 멋진 공간이 얼마나 많은데 집무실이라니.

조금은 실망한 상태로 레이넌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그는 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바로 내게 다가왔다.

“잘 잤나?”

“네.”

레이넌이 내민 손을 잡으며 대답하자 그는 나를 소파로 이끌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은 후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도, 그도 제대로 서로를 바라보지 못하고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을 깬 건 레이넌이었다.

“나는 잘 못 잤는데.”

“네?”

뜻밖의 말에 그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레이넌은 여전히 나를 보지 않았다.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에서 어쩐지 쑥스러움이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혹시 오늘 눈을 떴는데 그대가 또 도망을 다닐까 봐 말이지.”

그의 말에 나는 작게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또 도망을 갈까 봐 잠을 못 잤다니. 그것도 레이넌이.

내 웃음에 레이넌은 조금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농담이 아니라고. 그대가 여기 오기 전까지 얼마나 초조했는지 그대는 모를 거야.”

그의 진지한 말에 나 역시 웃음기를 지웠다.

“저도 사실은 잘 못 잤어요. 꿈이면 어쩌나 싶었거든요. 상상도 못 해 본 일이 일어나서…….”

“……여러모로 그대는 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게 많다니까.”

“공작님도 예상치 못한 일이라고 하셨으면서…….”

“그렇긴 하군.”

“그래도 좋네요. 서로 알아 갈 것들이 많은 거잖아요.”

밝게 웃으며 말하자 그는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금은 멍한 눈으로 나를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재빨리 다시 내 눈을 피했다.

그리더니 헛기침을 한 레이넌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론가 가려는지 걸음을 옮겼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 모습이 조금은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착각이겠지. 레이넌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레이넌은 곧 다시 목을 가다듬고는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뒤늦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래. 알아 갈 것이 많겠군. 기대되는 일이야.”

“네.”

내 대답을 들은 레이넌은 그제야 나를 내려다봤다. 시선을 계속 피하던 조금 전까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언제나처럼, 아니 평소보다 짙고 곧은 시선이 나를 꿰뚫을 듯이 와 닿았다.

갑자기 진득해진 시선을 받으니 이번에는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진 않았으나 그대로 마주하기도 조금은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피하고 싶어도 쉽지 않은 상황이기도 했다. 레이넌의 시선은 꽤 묵직하고도 집요해서 나를 단단히 붙들었다.

내 얼굴에 떠 있던 미소가 조금씩 어색하게 바뀌어 갈 무렵 레이넌은 손을 들었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감싸고 있는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잘 어울리는군. 내가 묶어 준 것보다 훨씬 나아.”

“……세실이 손재주가 좋은 편이긴 하죠.”

“역시 그대에게 잘 어울려.”

“감사합니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니 자연스럽게 레이넌의 품에 안긴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차라리 폭 안기는 게 덜 쑥스러울지도 몰랐다. 그와 나 사이에 생겨난 공간만큼 괜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레이넌은 언제 안절부절못했냐는 듯 나를 내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조금 전과는 입장이 바뀐 것만 같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너무도 근사해서, 마치 그림과도 같아서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넋을 놓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리본과 머리카락을 지난 그의 손은 어느새 내 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고, 공작님?”

“그래.”

천천히 손은 아래로 내려가 내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았다. 그리고 그만큼 레이넌은 서서히 내게 다가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보랏빛 눈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레이넌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너, 너무 가까운…….”

그는 내 말을 막기라도 하듯 훌쩍 내게 다가왔다. 어느덧 그의 숨결이 얼굴에 닿을 정도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내가 왜 티타임을 집무실에서 가지자고 했겠나.”

레이넌은 집무실 앞에서 내가 가졌던 의문을 알기라도 하는 듯 물었다.

“그, 글쎄요.”

“집무실에서는 그대와 둘이 있을 수 있지 않나.”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따스한 숨결이 입술에 닿았다. 짧은 말이었지만 레이넌이 말을 할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자 그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기분 좋은 웃음이 어느샌가 내 입술에 닿아 있었다.

찰나의 접촉이었다. 부드럽게 입술을 감싸던 감촉이 이내 떨어졌다.

“아…….”

“나는 상관없지만 그대는 다른 사람 눈을 조금은 신경 쓸 것 같아서.”

입술은 떨어졌지만 금방이라도 닿을 만한 거리에 있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내 입술을 스쳤다.

뭐든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을 때였다. 레이넌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다시금 입술을 겹쳐 왔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머금고 사라졌던 조금 전과는 전혀 달랐다. 따스함만이 같을 뿐이었다.

따사롭지만 짙게 내 입술을 탐하던 그는 곧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예상치 못한 그의 움직임에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레이넌은 감싸 쥔 내 목덜미를 슬쩍 쓰다듬었다. 괜찮다고 나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듯.

나도 모르게 그의 가슴에 손을 올려 조금 떨어지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 가까워질 뿐이었다.

어느새 내 허리를 감은 손은 나를 레이넌의 품 안에 가두었다.

나를 단단히 붙든 그의 온기가 느껴지자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어딘가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어 밀어내던 손을 멈추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레이넌의 웃음이 더운 숨과 뒤섞였다. 서서히 힘이 빠진 나는 그대로 그에게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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