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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101)화 (101/129)

“중요하진 않을 수도 있는데,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응. 괜찮으니까 말해 봐.”

“아까 드레스 이야기 때문에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요.”

“드레스? 아아, 에린이 가져간 거?”

“네. 그날 에린이 드레스를 옮기는 걸 제가 도왔잖아요.”

“응. 그랬지.”

“그날 에린 옷장 구석에 뭔가 이상한 게 있었거든요. 너무 티가 나게 수상쩍게 숨겨 놓은 게 있어서 그때도 마음에 걸렸는데…….”

“수상쩍게 뭘 숨겨 놨다고?”

“네. 저도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는데……. 아무래도 확인을 한번 해 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하긴, 이대로 에린은 제 방에 돌아가지는 못할 테니까 가지고 오는 건 어렵지 않겠네.”

“네.”

“그래서 그게 뭔데?”

“그건 모르겠어요. 봉투처럼 보였는데요.”

“봉투라…….”

“어떻게 할까요? 지금 가서 가지고 올까요?”

“굳이 지금 갈 필요는 없고. 내일 아침에 올 때 가지고 와 볼래? 찝찝한 건 확인을 하고 넘어가는 게 나을 것 같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멜리아와 세실은 내게서 조금 물러났다. 나 혼자 생각에 잠길 시간을 주려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과 잠시 대화를 하느라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금 빠르게 뛰려 하고 있었다.

“르네 님, 얼굴이 이상해요.”

멀리 떨어진 아멜리아가 조용히 말했다. 다행히 눈치 빠른 그녀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 짐작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다만 내 얼굴을 보고서는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르네와 한참 시간을 보내고 나온 레이넌은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로만이 레이넌의 저런 모습을 본 일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잘된 모양이군. 다행이다.’

로만 역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넌의 기분이 좋으면 어쨌거나 제 일도 한층 더 쉬워지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레이넌이 제 마음을 알아채는 게 가장 큰 고비라고 짐작했었다. 하지만 그가 마음을 인지한다고 끝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음을 자각하고 르네가 어떤 성격인지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다가가기만 할까 봐 로만은 걱정했었다.

아주 적은 가능성으로 반대일 경우도 있었지만, 이러나저러나 둘이 마음을 확인하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리려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돌아가지 않고 제대로 도달한 모양이었다.

하긴 레이넌이나 르네 두 사람 모두 에둘러 표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로만에게는 참으로 다행인 상황이었다.

마음을 인지한 두 사람이 제대로 표현할 생각이 없었다면 그 사이에서 이런저런 조율로 고생할 건 아멜리아와 로만임이 분명했다.

아멜리아는 꽤 즐거워할 테지만 로만에게는 그럴 여유는 없었다. 게다가 아멜리아에게 휘둘려 두 사람이 괜한 오해라도 한다면…….

로만은 상상만으로도 피곤해져 어깨가 무거워졌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무실에 도착한 레이넌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쌓여 있는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에린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좋은 기분을 망치는 질문은 아닐까 걱정했지만 지금 물어야 했다. 레이넌은 펜대를 내려놓고는 로만을 빤히 바라봤다.

아무리 기분이 좋아도 지금은 아니었나 싶어 로만이 움찔했을 때, 레이넌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모처럼 좋은 기분이니 선처를 좀 할까?”

“선처요?”

뜻밖의 말이었다. 로만이 되묻자 레이넌은 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직장을 구해 주는 걸로 하지.”

그의 말에 로만은 결국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넌의 기분이 좋으면 제 일이 편해지리라 여겼는데 어쩐지 더 종잡을 수 없어진 것만 같았다.

새로운 직장을 구해 준다니. 레이넌이 제가 한 말을 번복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나중에 후회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레이넌이 혹여 나중에 후회라도 하면 그 뒤처리는 전부 로만의 몫이었다.

잠시 그를 만류해 볼까 고민하던 로만은 일단 레이넌의 생각을 끝까지 들어 보기로 했다.

“생각해 두신 곳은 있으십니까?”

“소테람으로 보내지.”

로만은 조금 전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레이넌을 바라봤다. 걱정과 의문은 어느새 질색으로 바뀌었다.

“선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새로운 직장을 구해 주는데 선처가 아닌가?”

황당하다는 듯 물은 로만의 질문에 레이넌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황제 폐하의 영지니 좋아하겠지.”

레이넌의 말대로 소테람은 황제의 영지였다. 하지만 제국민들도 잘 알지 못하는 아주 외진 곳에 있었다.

물론 제국민들이 소테람을 잘 모르는 건 그 위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테람은 비공식적인 감옥이기도 했다. 큰 죄를 지은 범죄자나 혹은 제국민들에게 잊혀야 할 범죄자들을 주로 수감하는 섬이었다.

그 섬에 들어가서 살아 나온 사람은 아마 그들을 감시하는 섬지기 정도일 터였다.

소테람은 특이한 기후와 토양을 지닌 섬이었다. 그곳에서만 자라는 약초는 아를소티아 제국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약재 중 하나이자 가장 키우기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가는 약초이기도 했다.

소테람에 갇힌 범죄자들은 종일 약초를 재배하고, 수집하고, 가공까지 한다. 거의 하루 내내 일만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섬이 지닌 특이한 점은 또 있는데, 바로 섬이 대부분 높은 나무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었다.

햇빛을 거의 보지 못하고 온종일 일만 하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맹렬하게 반항하던 범죄자들도 의욕을 잃고 처지기 일쑤였다.

“웃으면서 선처라고 말씀하시니 더 잔인하게 들립니다. 거기에 가 보면차라리 죽이지 그랬냐고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에린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남자들도 버티기 힘든 곳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얼마나 버틸지는 로만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것까지 내가 알아야 하나.”

“아니죠. 아닙니다.”

웃으면서 되묻는 레이넌의 눈에 얼핏 분노가 스쳐 간 것 같아 로만은 얼른 손을 저었다.

르네와 잘되어 가는 것과는 별개로 에린에 대해서는 꽤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하긴, 르네를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대며 모함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지금은 르네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상태이기까지 하니 더욱이 그랬다.

“아, 그런데 황제 폐하께 허가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미 몇 정도는 보낼 수 있게끔 허락하셨으니 그 부분은 걱정 안 해도 돼.”

에린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이걸로 끝일 터였다. 몇 정도는 보낼 수 있다는 걸 봐선 아마 마빈의 끝 역시 별다르지 않을 듯했다.

“마빈과는 만나 봤나? 벨라가 말한 서류가 어디 있는지는 알려 주던가?”

“네. 마빈은 뭔지도 모르고 심부름만 한 모양입니다.”

“의외로 얌전히 전달했나 보군.”

“몇 번이고 벨라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어보긴 했습니다. 화가 많이 났더라고요. 벨라가 제 공을 채어 간다고 느낀 듯합니다.”

“그래? 그럼 안달이 나서 뭔가 더 털어놓을 법도 한데.”

“캐서린이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걸 확인했습니다.”

“캐서린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레이넌의 얼굴에는 옅은 씁쓸함이 떠올랐다.

시녀장까지 오를 정도로 오래, 그리고 성실히 일해 온 그녀가 실은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니.

로만 역시 마빈을 통해 캐서린이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조금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캐서린은?”

“워낙 예민해서 늘 잠도 잘 자지 못하고 신경이 곤두서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스틴이 예민함과 불면증을 모두 치료해 주는 약을 처방했습니다.”

“반응은?”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잠이 늘었는데, 캐서린은 몸이 안 좋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그래? 잠이 늘었다?”

“아무래도 예민함이나 불면 모두 사람을 안정시켜야 하니까요. 오스틴도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거라고 당분간 푹 쉬라는 추가 처방을 내렸습니다.”

“물론 잘 지키고 있겠지?”

“네. 조금의 틈도 없이 감시 중입니다.”

“그래. 그녀가 발이 묶이면 아무래도 슈나이더의 사람들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좁아지겠지.”

“그게 또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왜지?”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제가 캐서린의 정체를 이미 파악하고 있다고 하니 마빈이 많이 초조해했습니다.”

“그런데?”

“캐서린 말고 또 놀랄 만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누군데?”

“그걸 모르겠다고 합니다. 아마 캐서린도 모를 거라고.”

“캐서린도 모르는 슈나이더의 사람이 또 있다고?”

“네. 꽤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한 걸 보면 캐서린보다 더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슈나이더가 오랜 시간 많은 공을 들였군.”

“예상보다 더 치밀하게 준비한 것 같습니다. 에린이나 마빈은 그렇다 쳐도 캐서린에게 접촉한 건 전혀 파악되지 않았으니까요.”

“모르지. 처음부터 슈나이더의 사람으로 들어왔는지도.”

그렇게 말하고 레이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 캐서린도 모를 슈나이더의 사람이 누군지 짐작해 보려는 듯했다.

로만 역시 그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고민했지만, 누군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수상하다고 생각하면 모두가 수상했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모두가 믿을 만했다.

“일단 후보부터 추려 보지. 그리고 벨라가 말한 서류도 일단 가져와 보지. 맞으면 좋고, 아니면…….”

레이넌은 말끝을 흐렸지만 로만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

“무슨 의도인지라도 파악이 되겠죠.”

“그래.”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보낼까요?”

“가능한 한 가장 빨리.”

“알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막힘없이 지시를 내리던 레이넌이 잠시 망설임을 보였다. 금방 말이 이어질 거라 예상한 로만은 재촉 없이 가만히 기다렸다.

하지만 레이넌은 몇 번을 말을 하려다 말았다. 입만 열었다 닫았다 되풀이하던 레이넌을 보고 결국 로만이 먼저 그의 말을 재촉해야 했다.

“공작님?”

“내일부터 르네와 다시 티타임을 가질 테니까 준비하도록.”

그게 뭐 그렇게 어려운 말이라고 한참을 망설인 건지. 로만은 작은 미소를 띠었다.

레이넌은 그 일상적인 말을 하고서도 꽤 복잡한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에드윈 님도 함께 모실까요?”

“아니.”

에드윈의 이야기를 꺼내자 레이넌은 단박에 거절을 표했다.

“에드윈도 일정이 많지 않나. 그리고 계속 르네와 만나 왔고……. 일단 당분간은 에드윈 없이 둘만 티타임을 가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다른 때였다면 뒤에 붙은 설명은 하지 않을 레이넌이었다. 하지만 그는 변명하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무엇보다 그런 말을 하는 레이넌은 꽤 쑥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로만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제 주군의 모습을 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기분이 좋다면 평소보다 더 까불어도 봐줄 텐데.

잠시 그를 놀려 볼까 고민했던 로만은 그 생각을 바로 접었다. 지금은 사랑에 빠진 레이넌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즐거웠으니.

“알겠습니다.”

로만의 대답을 들은 레이넌은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고개를 숙여 진지하게 서류를 읽어 보는 그의 얼굴이 미약하게 붉어져 있었지만 로만은 모른 척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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