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왜요?”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나온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들은 레이넌은 황당해하는 대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대는 마음을 전할 때는 당당하더니 왜 반대의 경우에 더 당황하지?”
“아니, 그게…….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아서……. 진심이세요?”
“그래.”
레이넌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내가 들은 말을 확신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군.”
“당연한 일이요?”
“그대가 나에 대해 했던 가장 큰 오해 말이야.”
레이넌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나를 보고서도 레이넌은 서두르지 않고 하려던 말을 이어 갔다.
“그대가 옆에서 본 나는 어땠나?”
“네?”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대는 몇 번이고 내가 쉽게 사람을 죽일 거라고 생각했지.”
“아, 그건…….”
“그래. 이젠 나도 그대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했어. 가끔 이리저리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끝없이 뻗어 나가는 그대의 상상력을 알아.”
그냥 혼자 헛다리 짚고 마음대로 판단해 버리는 경솔함이 상상력으로 좋게 포장되었다.
“누군가와 감정을 나누는 일을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 냉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사람. 그게 나에 대한 평가가 아닌가.”
그의 말에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자신에 대해 말하면서 꼭 남 말 하듯 덤덤한 게 너무도 레이넌다워서.
“그래. 쉽게 감정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을 사람. 다들 날 그렇게 여기고 있는 것 같더군.”
“다 듣고는 계시네요.”
“그럼. 사실 로만이나 나나 그런 평판을 오히려 이용하기도 하니까.”
“아아.”
“그러니 내게 감정을 돌려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단 말이야.”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물론 그대가 말한 대로 신분이 다르다는 문제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대는 나에게서 돌려받을 감정이 없다고 짐작하지 않았나?”
그의 물음에 나는 생각에 잠겼다. 당연하게 그와 잘될 일이 없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혼자 좋아하는 거니 괜찮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마음을 접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레이넌의 다정한 눈빛과 말에 슬퍼진 건 아마 그래서였을 터였다. 그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걸 아는데 꼭 그의 마음이 나에게로 향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이 내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가 또 그럴 리 없다고 좌절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들이 반복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대는 은근 감이 좋지. 아마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느꼈을 것이고, 그 감은 틀리지 않았을 거야.”
“저기…… 공작님?”
“응?”
“조금 전에 저랑 같은 마음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그랬지.”
“그런데 지금 하신 말씀은 기대하지 말라고, 돌려줄 감정 같은 건 애초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혼란스러웠다. 역시 아까 그의 말은 잘못 들은 것일까.
하지만 분명 그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 감이 맞을 거라는 건 또 무슨 뜻인가.
대상이 나임을 떠나서 누가 되었건 간에 레이넌이 그런 감정을 품을 일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모순되는 말에 혼란을 숨기지 못하자 레이넌은 그런 나를 보고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군.”
“‘있겠군’이 아니라 누가 들어도 그런 의미인데요.”
“뭐, 그대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내가 누군가에 특별한 감정을 품을 일은 없다고 생각할 거란 의미였어. 심지어 나조차 말이지.”
늘 명확하고 간결하게 의견을 전달하는 레이넌이 오늘따라 유독 말을 길게 하는 것이 낯설었다.
하지만 그만큼 기쁘기도 했다. 이렇게 그의 속마음을 길게 들어 본 일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짐작하지 못한 나는 눈만 깜빡였다. 레이넌은 내 시선을 읽은 듯 말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나도 누군가를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사람이었더군. 매우 낯선 느낌이라 조금 늦게 깨달은 거지. 하긴, 아주 오래전부터 잊고 살았으니까.”
“아주 오래전?”
“어렸을 땐가……. 그러니 남자로서 애정을 품은 사람은 그대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겠군.”
레이넌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꽤 쑥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말을 할 때 레이넌은 나와 눈을 제대로 못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머리를 조금 긁적이기까지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흐트러진 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오려고 했다. 애써 입가에 힘을 주고 참았다.
“그러니까 지금 공작님 말씀은……?”
“그래. 다시 확실히 말하지. 그대를 좋아하고 있어.”
벌써 두 번째였다. 레이넌이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이. 게다가 중간에 내가 확인한 것까지 합하면 모두 세 번이었다.
그런데도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게 내가 말한 것과 다른 의미인가? 아닌데. 분명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성으로서 나를…….
“르네.”
“네?”
“내 말 들었나?”
“네.”
“그런데 얼굴이 왜 그렇지?”
현실감 없는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정리하려고 해 봤지만 그럴수록 더욱더 엉키어 갈 뿐이었다.
혼란 속에 빠져 있는 내 얼굴이 그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제 얼굴이 어떤데요?”
“떨떠름한 표정인데?”
“제가요?”
“그래.”
떨떠름한 표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지금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기에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나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다고 내 얼굴이 보일 리는 없었다.
“떨떠름하다기보다는…….”
“보다는?”
“그러니까 공작님도 저를 좋아하신다는 거죠? 저와 같은 의미로? 아니, 같은 마음으로?”
말이 횡설수설 흘러나왔다. 그런 나를 보며 레이넌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원하면 몇 번이고 말해 줄 수 있는데.”
그의 말이 나오기 전에 이미 확실히 정리되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그리고 그의 얼굴에 담긴 따스함이, 애정이 온전히 나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했던 모든 착각이 사실은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제야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입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얼굴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얼굴 근육을 바로잡는 대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레이넌은 그런 내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미소는 조금 전보다 훨씬 더 깊어졌다.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함께 웃었다. 손으로 가렸지만 그는 분명 내 표정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문득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얼떨떨하고 들뜬 기분이 드는 한편 멋쩍은 느낌이 함께 들었다. 그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듯했다.
레이넌의 입꼬리도 조금씩 내려가더니 결국은 어색한 미소만이 남았다.
그의 미소보다 더욱더 어색한 분위기가 금세 방을 가득 채웠다.
어설픈 내 헛기침과 갈 곳을 잃은 그의 시선이 우리 두 사람 모두 이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걸 그대로 알려 주고 있었다.
“다들 너무 오래 기다린 게 아닐까요?”
내 말은 열심히 머리를 굴린 결과물이었다.
레이넌은 내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그렇죠.”
레이넌이 반응하자 나 역시 달갑게 맞장구치며 그를 따라 일어섰다.
“역시. 다들 너무 오래 기다린 것 같군.”
내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한 그는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니,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아니, 다시 문으로 걸어갔…….
레이넌은 초조한 듯 같은 자리를 오가고 있었다. 그의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배웅하려던 나 역시 어설픈 자세로 멈춰 섰다.
한참 빙글빙글 돌던 레이넌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나중에 또다시…… 이야기하지.”
“……네. 그래요.”
엄숙하게 내뱉은 것에 비해 내용은 허탈했지만 나 역시 그의 분위기에 휩쓸려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레이넌은 걸음을 옮겨 방문 앞까지 갔다. 손잡이를 잡고 뒤돌아 나를 보던 레이넌은 다시금 망설이더니 곧 마음을 정한 듯 걸음을 되돌렸다.
성큼성큼 돌아온 그는 내 두 손을 잡았다. 뭔가 아쉬운 듯 손만 만지작거리며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럼 티타임부터 바로 다시 시작하는 걸로 알고 있겠어.”
“네.”
레이넌은 말을 하는 와중에도 손만 보고 있더니 내 대답을 듣고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안심한 듯 그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나를 향해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공작님?”
“혹시 내일부터 또 도망가면 곤란해서 말이지.”
진지한 그의 말에 웃으며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던 건 훌쩍 다가온 레이넌 때문이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 이마에 내려앉았다. 조심스러운 그의 입술과 두 손을 꼭 붙드는 힘이 묘하게 이질적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모양이었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떨어지며 내 눈도 조금씩 뜨이기 시작했다.
레이넌은 쑥스러운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럼 내일 보지.”
그 말만을 남기고 레이넌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뒤늦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하셨어요?”
금세 들어온 아멜리아가 물었지만 그녀의 질문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과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혹시 눈을 뜬 채 잠이 든 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잠시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에 닿은 감촉을 떠올리자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르네 님?”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니 더 빨리 뛸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심장이 더욱 세차게 뛰었다. 그리고 빠르게 흐르는 피가 모두 얼굴로 몰려드는 것만 같았다.
“르네 님?”
“응? 아, 아멜리아. 많이 기다렸지?”
“기다리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죠. 그런데 왜 이렇게 멍하니 앉아 계세요?”
“음……. 일단 생각을 정리해 볼게. 정신이 없어서…….”
내 말에 아멜리아는 순순히 물러났다. 이럴 때의 나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게 낫다는 걸 이젠 그녀도 잘 알기 때문일 터였다.
“아, 그럼 르네 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나중에 할까요?”
정신이 없다는 말에 세실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아니야. 지금 해도 괜찮아.”
세실이 굳이 지금 이런 질문을 꺼낸 건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는 상황 파악을 잘하고 신중한 성격이었으니까.
내가 이야기하라고 말하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