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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99)화 (99/129)

아주 잠시 레이넌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미 너무 많이 피했고, 또 내내 피하기만 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마음을 인지하지 않으려 도망치고, 겨우 마음을 인정하고서는 정작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도망쳤다.

좋아한다고 해 놓고 제대로 마주하지도 않았구나.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음…….”

이야기하자고 몇 번이나 나를 붙들었던 레이넌은 정작 내가 얌전히 앉아 있자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레이넌의 눈을 바라봤다. 이렇게 그를 응시하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인 듯했다.

이상하게도 내가 그를 바라보자 이번에는 레이넌이 내 눈을 피했다.

왜일까. 그저 시선을 한 번 피한 것뿐인데 알 수 없는 섭섭함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고작 시선을 피한 것만으로도 이런 기분이 들지 몰랐다. 게다가 겨우 한 번으로.

더불어 그간 내가 레이넌에게 했던 일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그를 피해 다니기만 했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데 그간 이유도 듣지 못했던 레이넌의 마음은 어땠을까.

물론 레이넌은 나와 달리 섭섭함은커녕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터였다. 왜냐하면 그간 레이넌은 내가 그를 피하는 이유를 몇 번이고 묻거나, 대화를 통해 풀어 보자며 여러 노력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만 생각하느라 정작 중요한 내 소중한 마음을, 그리고 그 마음이 향하는 대상을 소홀히 여겼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지난 행동을 반성했다.

“공작님.”

“그래.”

내 부름에 착실히 대답하면서도 레이넌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죄송해요.”

“응?”

그는 난데없는 내 사과에 잠시 나를 바라봤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제가 그간 공작님을 매우 답답하게 해 드린 것 같아서요.”

“응?”

“제대로 설명도 안 드리고 그냥 피해 다니기만 했잖아요. 죄송해요. 너무 제 생각만 했어요.”

“아니. 뭐 이렇게 사과까지 할 일은…….”

“해야죠. 몇 번이고 이유를 물어보셨잖아요. 제가 대답을 못 하니까 기다려 주셨고요. 말씀하신 대로 정말 많은 인내심을 제게 할애해 주셨는데…….”

“뭐, 그건 아무래도 좋은데……. 그렇게 피하는 건 아니라더니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하긴 하군.”

그의 말에 나는 작게 웃었다. 내가 왜 웃는지 레이넌은 이해하지는 못한 듯했지만, 함께 미소를 보였다.

“그러게요. 그렇게 물어보실 땐 대답을 못 했는데요.”

“그런데 지금은?”

“그냥 섭섭하셨을 것 같아서요. 지금에서야 그런 생각이 드네요.”

“뭐 아니라고는……. 아니, 그게 아니라. 섭섭하다기보다는…….”

보기 드문 모습이었다. 레이넌은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을 명확하게 했다.

이렇게 횡설수설하는 모습은 낯설었다. 하지만 그조차 인간적인 모습이라 새롭게 느껴지는 건 내가 레이넌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그리고 전에 얼떨결에 그런 식으로 말씀을 드렸는데…….”

“아.”

상황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아마 레이넌이 말한 ‘할 이야기’는 분명 전에 내가 했던 고백에 대한 것일 터였다.

피하려고만 했지만 정작 이제까지 계속 도망쳐 왔다는 걸 깨달으니 오히려 용기가 생겼다.

“공작님을 좋아한다는 말은 진심이에요. 아멜리아나 에드윈을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마음입니다.”

당황하지도, 진지하지도 않았다. 일상을 말하듯 잔잔하게 내 마음이 흘러나왔다.

레이넌은 어느새 나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 역시 레이넌의 눈을 제대로 마주 보고 다시 한번 확실히 마음을 전했다.

“공작님을 남자로, 그러니까 연애 감정을 가지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이렇게 후련한 기분이 든 적은 없었다. 아마 내 감정을, 그리고 레이넌을 이제야 소중히 여기게 된 걸지도 모른다.

내 담담한 고백에 레이넌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아니,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나오지 않는지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당황스러우신 것 알아요. 그래도 지난번처럼 얼렁뚱땅 넘어가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하긴, 그때 상황이…….”

“네. 솔직히 공작님께서 쉴 새 없이 몰아붙이시는 바람에 제가 말린 거죠.”

“……미안하군. 그냥 이유라도 짐작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역시. 일부러 그러신 거였구나.”

레이넌은 평소에 나를 재촉하는 일이 잘 없었다. 그렇게 피해 다녔지만 그는 오히려 조심스럽게 기다리겠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날따라 생각할 틈도 없이 질문과 말을 쏟아 냈다. 그의 말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터라 나도 모르게 그런 고백을 하고 말았다.

“공작님.”

“그래.”

“제 마음을 받아 달라는 건 아니에요.”

“뭐?”

고백해 놓고 마음을 받아 달라는 건 아니라니. 당황스러운 말일지도 몰랐다.

레이넌이라면 그런 내 말을 편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놀란 눈치였다.

“이제부터는 계약한 대로 약혼녀 역할 잘 이행할 거예요.”

“‘계약한 대로 약혼녀 역할을 잘 이행하겠다’라.”

그는 그 말을 조용히 읊조렸다. 조금은 언짢은 기색이 보였지만 그럴 만했다.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을 이제 와서 잘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니까.

“네. 물론 조금은 티가 날 수도 있겠죠. 그리고 시간은 조금 걸릴 수도 있겠지만 제 감정은 제가 알아서 잘 정리할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왜지?”

“네?”

레이넌의 질문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왜냐니. 일단 무엇을 묻는 것인지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자 레이넌은 오히려 제가 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왜 당연하게 정리한다고 말하는 거지?”

왜냐는 질문이 향하는 건 그 부분이었나 보다.

그게 의문이 들 만한 부분이었나? 레이넌의 의도를 알 수가 없어 어리둥절하게 대답했다.

“그야 계약을 하고 약혼녀가 되기로 했으니 그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건데…….”

“그러니까 그게 왜 그대의 마음을 접을 이유가 되는 건지 궁금하단 말이야.”

“전에 벨라도 말했잖아요. 결혼이라는 건 결국 계약과 같아 서로의 이익을 나누는 일이라고. 공작님도 당연히 후에 그런 결혼을…….”

“잠깐, 잠깐만.”

레이넌은 손을 들며 내 말을 멈췄다.

“벨라의 말이 틀린 건 아니야. 우리 세계에서 결혼은 그런 의미지.”

“네. 그러니까…….”

“그런데 나는 굳이 그런 의미의 결혼은 필요 없어. 그래서 애초에 결혼 생각도 없었고.”

“네?”

“만약 결혼 생각이 있었다면 그대와 그런 계약을 했을까? 차라리 하려던 결혼을 당겼겠지. 아니면 진작 결혼했거나.”

“……그것도 그렇네요.”

에드윈의 보모에게 잔뜩 빠진 레이넌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여자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여 주기 적절하니까.

그도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레이넌의 이야기는 굳이 시녀나 보모가 아니어도 됐었다는 뜻으로 다가왔다.

“그럼 굳이 시녀나 보모가 아니어도 괜찮았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물론 그쪽이 조금 더 효과적이긴 하겠지만 상대가 있었다면 그냥 바로 결혼을 진행했겠지.”

“그렇군요. 그런데 공작님.”

“그래.”

“지금 그런 이야기는 왜……?”

“그러니까 왜 그대 마음대로 마음을 접느냐고 묻는 거지.”

레이넌의 눈에는 작은 상처가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꼭 초조하게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나는 대답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였다. 저런 눈빛에 몇 번이고 마음이 설렜던가.

이러니 그에게 빠지지 않을 도리가 있나. 게다가 마음 정리가 쉬울 리도 없었다.

레이넌은 종종 내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처럼 나를 착각하게 했으니까.

“공작님.”

내 부름에 레이넌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를 부르는 내 목소리에 설움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러실 때마다 제가 착각하게 돼요.”

“착각?”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도 이렇게 그윽한 눈으로, 다정한 말투로 저를 대하시고, 또 진심으로 걱정해 주시는 것 같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공작님도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그런 착각을 하게 된다고요.”

어쩐지 레이넌에게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호통을 치기는커녕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일단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는데, 그대는 여러모로 오해하고 있어.”

“이거 말고도요?”

“그래. 착각이라고 말했지만 오해에 가깝겠군.”

“네?”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착각이 오해라는 건 또 무슨 말인가?

레이넌은 내 혼란을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그가 말할 시간이었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했으니 속은 후련했다. 직접 듣는 거절의 말은 마음이 아플지도 몰랐지만 그래도 각오를 다졌다.

어떤 거절에도 상처받거나 슬퍼하지 말자고.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앞으로 그와 보낼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레이넌이라면 아마 꽤 상냥하고 다정하게, 그렇지만 깔끔하게 거절할 것 같았다.

그게 나를 더 슬프게 만들겠지. 차라리 냉정하고 무심한 거절이 마음이 덜 아플지도 몰랐다.

“먼저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자면 나에게 결혼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야.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이야.”

“네.”

“두 번째 오해는 글쎄……. 나도 이제까지 잘못 알고 있었지만 나 역시 감정이라는 게 존재하더군.”

“네? 그야 당연히 공작님도 사람이니…….”

“그대는 당연하다는 듯 나에 대한 마음을 접을 필요도 없어.”

“이런 말들이 저를 착각하게 한다니까요…….”

“이게 그대가 하는 가장 큰 오해겠군.”

“가장 큰 오해요?”

“내가 그대를 좋아할 일이 전혀 없다고 단정 짓는 것 말이야.”

말의 흐름이 뭔가 묘했다. 조금씩 비껴가는가 싶더니 이제는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도달해 있었다.

“그대 마음대로 결론짓고 마음을 접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레이넌은 진지하고도 따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착각하게 하는 그의 말과 눈빛.

그가 말한 오해라는 건…….

“나 역시 그대와 같은 마음인 것 같으니.”

“……같은 마음?”

“그래. 그대의 표현대로 그대를 여자로, 연애 감정을 가지고.”

레이넌은 중간에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없이 빤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야 그의 말이 이해가 됐다.

그리고 이 침묵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대를 좋아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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