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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98)화 (98/129)

“르네의 사치품이라는 드레스는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을 텐데.”

“그, 그게…….”

에린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하긴, 이런 분위기에서 내 드레스가 제 옷장에 있다는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분위기에 그 말이 어떻게 작용할지 누구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에린의 옷장에 있습니다.”

침묵을 뚫고 대답을 꺼낸 이는 뜻밖에도 세실이었다. 그녀의 말에 에린은 황당함을, 나는 의아함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에린에게 그 드레스를 주는 걸 직접 본 이가 세실이었으니까.

얼떨떨하게 눈만 깜빡이는 나와는 달리 세실의 대답이 제게 불리하다는 걸 깨달은 에린은 바로 입을 열었다.

“말은 바로 해야지, 세실. 르네 님이 내게 주시는 걸 너도 봤잖아?”

에린의 물음을 들은 체 만 체 하고 레이넌은 내게 집중했다.

“르네.”

“네, 공작님.”

“전에 그대가 그랬지? 그대가 가지고 있던 드레스는 취향이 아니라고. 다른 사람의 것을 맡아 두고 있다고.”

“아…….”

그런 말을 했던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죠? 그래서 드레스를 르네 님의 취향에 맞춰 다시 샀잖아요.”

그때 적절히 끼어든 아멜리아의 말에 예전에 너무 휘황찬란한 드레스를 보고 기겁했던 기억이 났다.

옷장의 드레스를 보고 레이넌과 아멜리아가 내 취향을 멋대로 판단해서 생긴 일이었다.

그때 얼렁뚱땅 둘러댔었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아멜리아의 말에 방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에린에게 꽂혀 들었다.

“아,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그럼 그 드레스를 산 돈까지 합치면 꽤 많은 돈을 받았겠군. 누구에게? 왜?”

“아니에요! 정말 저는 억울해요! 르네! 말해 봐!”

에린은 이제 나를 ‘르네 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도 잊은 듯했다. 그 정도로 정신이 없으니 제대로 반박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물론 애초에 그녀가 지어낸 거짓말의 늪에 빠진 것이니 더욱이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다.

“르네가 저를 모함하는 거예요! 르네!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이제 대놓고 나를 탓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증오 어린 눈빛을 받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너는 늘 나를 질투했어! 그래서 그런 거지! 공작님을 나에게 빼앗길까 봐!”

이제 에린은 정말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당사자인 레이넌을 앞에 두고 저런 말을 할 정도로.

나는 에린과 말을 섞는 대신 레이넌을 바라봤다.

“이제 그만하시죠, 공작님.”

그가 거짓말임이 뻔한 이야기를 시간까지 들여 가며 들어 주고 여기까지 에린을 데리고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에린이 제가 한 거짓말에 칭칭 매여 이도 저도 못 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사이 레이넌에 대해 꽤 잘 알게 된 걸까. 제법 그다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하자는 내 말을 들은 에린은 아주 미약하게 희망을 품은 듯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희망을 줄 생각도, 이대로 에린이 바라는 대로 일이 흘러가게 둘 생각도 없었다.

다만 이 지루한 논쟁을 빨리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에린, 다 떠나서 지난번에 슈나이더 공작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직접 말했었어.”

“……뭐?”

“여기에 널 보냈다고 슈나이더 공작이 직접 말했다고.”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

“그리고 얼마 전에 벨라 님이 저택에 왔을 때 말이야.”

벨라의 이름이 나오자 에린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이미 정체를 들킨 에린 너를 왜 그냥 두냐고.”

“……뭐?”

“역시 아무런 언질도 못 들은 모양이네. 아예 버려졌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눈이 멀어 버린 이유가 대체 뭐야?”

“아니야…….”

에린은 넋이 나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레이넌은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지시가 안 내려온 지 꽤 됐을 텐데?”

레이넌의 말에 에린은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그리고 답은 금방 찾은 모양이었다.

에린은 금세 창백한 얼굴로 손을 떨며 고개를 숙였다.

“이상하다고 생각 못 했나? 하긴, 다른 데 정신이 팔렸으니.”

“아, 아니, 전부 다 오해…….”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허술한 거짓말을 믿을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나?”

“거짓말이 아니……. 저는 정말 공작님과 로에리안가를 생각해서…….”

“차라리 제대로 된 거짓말을 하나만 꾸며 내지 그랬나. 그랬으면…… 그래. 한 번쯤 고민해 봤을지도 모르지.”

“그, 그게…….”

“르네를 모함하고 나를 흔들려고 했으면 그 정도의 성의는 보였어야지.”

레이넌의 차가운 말을 들은 에린은 그제야 상황을 받아들인 듯했다. 하지만 그게 그녀의 감정을 추스르게 도와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에린의 감정을 폭발하게 만든 것 같았다.

“왜!”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에린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목소리보다 더 서슬이 퍼런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시선으로 물리적인 힘을 가할 수 있다면 나는 이미 갈기갈기 찢어졌을 터였다.

“왜 너야?”

“뭐?”

“넌 뭐가 달라서 공작님 옆에 있는 거야! 그렇게 당연하다는 얼굴을 하고!”

“적어도 너처럼 거짓말로 사람을 몰아가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내 것이라 당연히 여기진 않아.”

“웃기지 마. 너도 결국 꿍꿍이가 있어서 공작님을 유혹한 거잖아. 슈나이더 공작이 시킨 게 아닐 뿐, 너 역시 그 자리가 탐난 거잖아. 혼자 순수한 척, 고고한 척. 그게 제일 짜증 나.”

“그러면 차라리 대놓고 나를 싫어하지 그랬어. 누구보다 나를 생각하는 친구 노릇을 왜 했니?”

“네가 좋아서 했을까 봐?”

“그러니까. 결국 너는 나를 아래로 보고 있었던 거야. 나를 통해서 네 우월감을 충족하고 나를 밟아서 네 부족한 점을 모른 척하려고 했던 거지.”

“그게 나빠?”

당당한 에린의 태도에 헛웃음이 나왔다.

“응. 나빠. 다른 사람을 밟아서 그 위에 서려는 게 나쁘냐고 묻는다는 건 멍청하다고 스스로 말하는 꼴이라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야?”

내 말에 에린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니까 내가 공작님 옆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아래에 있어야 할 내가 너를 밟고 위로 올라간 것 같았으니까.”

“네가 나보다 위에 있다니…….”

“끝까지 들어.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내서 나를 모함할 정도로 이성을 잃은 건 그것 때문이잖아?”

“우리 르네는 똑똑하기도 하지.”

흐뭇한 학부모의 목소리로 레이넌은 나를 칭찬했다. 그러고는 상이라도 주듯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린의 몸은 더욱더 세차게 떨렸다.

저보다 못한 내가 레이넌의 옆에 앉은 것도, 그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보란 듯이 나를 소중히 대해 주는 레이넌의 모습에 쌓여 왔던 그녀의 분노는 터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끝난 것 같으니 데리고 나가.”

“알겠습니다.”

하지만 레이넌은 이제 배려는 끝이라는 듯 바로 에린을 쫓아냈다. 물론 그녀는 쉽게 방을 나서지 않았다.

“너는 뭐가 잘나서! 그 순진한 얼굴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며! 그래 놓고는!”

하도 난리를 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붙어서 힘겹게 그녀를 끌어내야 했다.

에린은 나가는 그 순간까지 나에 대한 욕과 저주를 퍼붓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하든 상처받지 않았을 테지만 제대로 그녀의 말을 들을 기회는 없었다.

에린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레이넌이 두 손으로 내 볼을 감싸 쥐고 제게 시선을 고정한 탓이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이야기를 해야겠지?”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같았다.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에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치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내 귓가에는 나직하고 묵직하게 내려앉은 레이넌의 목소리만 맴돌았다.

“아……. 그렇죠.”

“도망 안 치기로 약속한 건 잊지 않았지?”

“……네.”

그보다 너무 가까운데요. 왜 점점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걸까요.

“도망 안 갈 테니까 손 좀…….”

“왜지?”

“너무 가까운데요.”

“그런가.”

레이넌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아니,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이 정도도?”

레이넌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은근하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속절없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레이넌의 큰 손이 얼굴을 가려 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로만이나 아멜리아 한 명쯤은 남을 줄 알았는데 에린을 내보내며 다들 방을 나갔다.

“이제 겨우 조용해졌군.”

“그러게요.”

아무도 없는 와중에 이렇게 찰싹 붙어 있는 게 민망해서 엉덩이를 슬쩍 옆으로 뺐다.

하지만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다. 레이넌의 손은 여전히 내 얼굴을 감싸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일부러 에린을 여기까지 데리고 오셨어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굳이 두 번이나 들으시면서?”

“기왕이면 그대 앞이면 좋을 것 같아서.”

“네?”

레이넌은 내 얼굴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몰랐나 싶었는데 그대도 알고 있었나 보군. 에린이 그대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다는 걸.”

“아, 저도 오늘 이야기하다 보니 깨달은 거긴 한데…….”

“처음이야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뭔가가 그녀를 자극한 모양이야.”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내가 처음 르네의 몸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에린은 지금과 느낌이 달랐다.

그녀를 자극한 뭔가는 나와 레이넌의 약혼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에린은 내가 레이넌에게 냉담하게 내쳐지길 바라고 조언을 건넸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조언 덕분에 레이넌과 가까워졌다고 감사 인사를 했을 때 그렇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마음이 안 좋을 거 알아. 그래도 친구였던 사이니까.”

“음……. 조금 씁쓸하긴 한데 그 정도는 아니에요. 기억을 잃기 전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그 후엔 사실 여러모로 정신이 없어서 정을 쌓을 틈이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에린은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슈나이더는 물론 우리 쪽과도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보내야지.”

“혹시…….”

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끌자 레이넌은 웃으며 대답했다.

“죽인다는 뜻은 아냐. 말 그대로 멀리 보낸다는 이야기지.”

“아, 그렇군요.”

“어째서 그대는 툭하면 내가 사람을 죽이는 줄 알지? 그래서 도망가려고 하기까지 했지.”

“아. 그랬던 적도 있죠.”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졌다. 그때는 꽤 절박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황당한 추억과 같이 느껴지는 것이 신기했다.

“그런데 진짜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편견인가. 공작 정도 되는 사람은 쉽게 사람을 죽여 버린다는.

“아직 서로 알아 가야 할 게 많은 모양이야.”

“……네. 그렇네요.”

이제 그가 말했던 ‘우리 사이에 해야 할 말’을 할 때가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했던 그의 말은 내겐 꼭 상냥한 거절의 서두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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