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제 이야기 중인 거죠?”
“그래.”
“심지어 이게 전부가 아니라 더 있다는 거고요? 얼마나?”
“글쎄. 끝까지 들어 보고 이야기하지.”
“아니, 그 전에요.”
대강 들어도 말이 안 되는데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란다.
“뭐, 그래요. 더 들어 보죠. 저도 궁금하네요, 에린이 저에 대해 대체 어떤 말들을 했는지. 그런데 어제 일을 제가 꾸몄다고 하는 건 너무…….”
화가 나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 적절한 단어를 찾느라 잠시 말을 멈추자 레이넌이 뒷말을 재촉했다.
“너무?”
“짜증 나는데요.”
말 그대로 짜증이 솟구쳤다.
순간 치밀어 오른 감정을 참지 못하고 에린을 노려봤다. 나와 시선을 마주친 에린은 화들짝 놀라 눈을 내렸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들어 눈에 힘을 주고 나를 쏘아봤다.
“에드윈 님을 다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신 거잖아요!”
에린은 질 수 없다는 듯 오히려 목소리에 힘을 주어 내게 소리쳤다. 듣는 나는 이제 황당함에 힘이 빠질 지경이었다.
“에린, 왜 이러는 거야? 이러는 데엔 이유가 있을 것 아냐.”
“이유라니……. 르네 님이야말로 왜 이러세요. 아무리 그래도 에드윈 님을 해치는 건 아니잖아요.”
금세 눈물까지 매달고 말하는 에린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절절하기 그지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내가 정말 악독한 짓을 저질렀고, 에린은 그런 나를 진심으로 말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하아…….”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니 나오는 건 한숨뿐. 뭐라 반박할 의지도 사라졌다.
그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레이넌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일단 둘 다 그만하지.”
“그래요. 제가 대체 무슨 짓을 했다는 건지 들어 보기나 하죠.”
여전히 어이가 없는 나를 달래기라도 하듯 레이넌은 내 손을 잠시 꼭 잡았다가 놓았다.
나도 레이넌이 그랬듯 몸을 뒤로 기댔다. 소파에 파묻힌 건지 그의 몸에 파묻힌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힘도 없었다.
“계속하지.”
레이넌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르네 님이 슈나이더 공작님의 사람이랍니다.”
분명 에린이 말한 내용 같은데 정작 로만이 술술 읊고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로만은 레이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레이넌과 로만이 함께 움직인다면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마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끝나면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있겠지.
아니. 그보다 방금 로만이 뭐라고 했지?
워낙 정신이 없고 힘이 빠진 탓에 방금 로만이 한 이야기가 뒤늦게 머릿속에 들어왔다.
“내가 슈나이더 공작의 사람이라고?”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사실을 에린이 레이넌에게 말했을 것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걸 듣고 있었을 레이넌은 무표정했을 것이 분명했고, 로만은 속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겠지.
내가 웃자 에린은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울컥해서 로만에게 미뤄 두었던 이야기를 제가 하기 시작했다.
“르네 님은 처음부터 슈나이더 공작님이 보내서 여기로 온 거잖아요. 주기적으로 돈까지 받아 온 거 다 알아요.”
사실 이 부분은 나도 아는 바가 없으니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에린은 한층 더 기세등등해져서는 말했다.
“로에리안 공작님을 유혹해서 죽이려고 한 거잖아요.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으니 대신 에드윈 님을 노린 거고요.”
“요약하면 르네 님은 슈나이더 공작의 사람이고, 그의 지시에 따라 공작님의 아이를 유산하고, 또한 에드윈 님을 죽여서 공작님에게 타격을 주려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만의 말에 에린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할 말은 없나?”
“네?”
레이넌은 다른 때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에린에게 물었다. 이제까지 악에 받친 듯 날카롭게 말하던 그녀의 기세가 한순간에 꺾였다.
어쩐지 넋을 놓고 레이넌을 바라보던 에린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나를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려봤다.
꼭 내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여기는 것처럼. 질투와 분노가 가득한 눈이었다.
그리고 그때야 알았다. 에린의 태도가 왜 갑자기 이상하게 바뀌었는지, 그리고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까지 지어낸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래도 에린 역시 레이넌을 좋아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녀의 성격이라면 같은 시녀였던 내가 레이넌의 약혼녀가 된 것이 배가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더 하라는 말이야.”
여전히 나긋나긋한 레이넌의 말투가 어쩐지 무섭게 들렸다. 하지만 에린에게는 전혀 달리 들린 모양이었다.
“아니, 없어요. 다만…… 공작님께서 더는 르네 님께 속지 않으셨으면 해서…….”
에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닥에 엎드렸다. 애틋하게 레이넌을 바라봤다가 원망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에린은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그래. 그럼 이제 르네의 이야기도 들어 볼까.”
“네?”
레이넌이 내 이야기를 듣겠다고 하니 에린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제일 먼저 뭐였죠?”
“유산입니다.”
하도 어이없는 말이 이어진 탓에 순서도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능한 로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유산.”
다시금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 내 모습에 에린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래서 몇 번이고 정말 임신한 거냐, 아니냐 그렇게 집요하게 물어봤구나.”
“그, 그게 무슨……?”
“기왕 그렇게 캐물었으면 대답도 정확히 듣고 이런 일을 벌였어야지.”
“그건 그래서 물은 게 아니었는…….”
“나 임신 안 했어.”
“……네?”
“그런데 유산을 어떻게 해. 있지도 않은 아이로 어떻게 공작님께 심리적 타격을 주고?”
“……이, 임신이 아니라고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날이 서 있던 목소리에서 순식간에 힘이 빠졌다. 흔들리는 눈이 그녀의 당황스러움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거, 거짓말…….”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해?”
동요 따위는 없이 담담한 내 반응에 그녀는 잠시 입만 벙긋거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에린은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휴가 갔다 와서 속이 안 좋다고 한 건? 그래서 바로 칼슨 님이 와서……. 임신이 아니라니? 그럴 리가…….”
“왜? 다들 내가 임신한 게 확실하다고 했어? 그래서 약혼도 바로 진행되는 거고?”
“그거야 다들…….”
임신 안 했다는 내 말에 에린은 흘리던 눈물을 뚝 그쳤다.
게다가 몸이 덜덜 떨리는 걸로 봐서 처음부터 일이 제대로 꼬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실감한 듯했다.
“왜 이래. 이 저택에 뜬소문이 얼마나 많이 돌아다니는지 네가 더 잘 알잖아.”
“뜬소문이라니…….”
“그렇게 즐겁게 말을 옮기고 다니더니. 네가 그런 유언비어에 놀아나면 어떻게 해?”
언젠가 소문을 이야기해 주며 즐거워하던 에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녀처럼 나 역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듯 웃었다.
“다음은 뭐였지?”
에린에게 묻는 대신 이번에는 로만에게 바로 물었다.
“어제의 사고입니다.”
“아, 사고. 도대체 내가 그걸 언제 준비했다는 거지? 게다가 어떻게? 그게 나 혼자 가능한 일인가?”
“그보다 정작 에드윈을 구하고 다친 건 르네 아니었나?”
내 말에 대한 대답 대신 또 다른 물음이 레이넌에게서 나왔다.
“그, 그럼 일부러 그런 거죠! 에드윈 님을 구하는 척…….”
지지 않고 말을 했지만 에린의 얼굴에는 이미 절망감이 내려앉았다.
“그, 그리고 제가 전날 르네 님이 새벽에 정원으로 가시는 걸 봤다고요!”
“전날 새벽? 이상하군. 그날 밤부터 해가 뜰 때까지 르네 방 앞에는 내가 있었는데. 네가 본 르네는 누구지?”
이번에는 레이넌이 웃었다. 레이넌의 웃음과 함께 에린의 얼굴에 떠오른 절망감은 더 짙어졌다.
“그보다 에린, 어지간히 급했나 봐. 어제 사고가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는 거지?”
내 말에 에린은 눈만 깜빡였다. 어제의 일은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에린은 에드윈이 다칠 뻔했다는 내용만 알고 있었고 그걸 이용하려고 했을 터였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내용을 자세히 알았다면 내가 그 사고를 꾸며 냈다는 이야기를 꺼낼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나 상황 판단이 안 되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눈치도, 머리 회전도 빠른 여자였는데.
내가 잘못 본 건지, 아니면 제대로 된 판단이 안 될 정도로 욕심에 눈이 멀어 버린 건지.
그저 씁쓸하고 황당할 뿐이었다. 이젠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허술한…….”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절로 말끝에 한숨이 맺혔다.
“하아……. 이제 말하고 싶지도 않네. 이 정도만 하죠.”
어차피 에린과 마주칠 일도 없는데 여기서 그냥 대화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레이넌은 나와 생각이 달랐다.
“르네, 이대로 끝내면 곤란해. 가장 중요한 슈나이더에 관한 이야기가 남았는데.”
“그, 그래요! 슈나이더 공작님에 관한 것만큼은 진실이에요! 그간 르네 님이 받은 돈만 해도 얼마나 많은지 제가 말씀드릴 수 있어요!”
이제까지 제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스스로 말하는 꼴이라는 것도 모르고 에린은 구명줄이라도 붙든 양 소리쳤다.
“슈나이더의 사람은 르네가 아니라 너로 알고 있는데.”
“공작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에린은 믿었던 연인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얼굴로 부들부들 떨며 레이넌에게로 기어 왔다.
에린은 레이넌의 발목을 붙들고 눈물을 쏟아 냈다. 이번에야말로 진심이 담긴 눈물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그녀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눈물.
하지만 레이넌은 매몰하게 발로 그녀를 쳐 냈다.
“내가 에드윈의 보모를 들이면서 뒷조사도 안 해 봤을 거라고 생각했나.”
“쉽게 찾지 못하게 조치를 분명…….”
“그런데 넌 왜 그렇게 쉽게 나왔지?”
“……네?”
“아니, 쉽진 않았나?”
에린은 레이넌이 나와 자신의 뒷조사를 했을 거란 예상도 못 한 듯 얼빠진 표정을 했다. 그리고 레이넌은 로만에게 물었다.
“일부러 기록을 지우고 덮어 놓긴 했지만 찾아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니, 제 뒷조사를 왜……?”
“왜 르네가 너랑 비슷한 기록을 가지고 있을까.”
“비슷한 기록이요?”
“르네의 뒷조사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기록이 말끔히 지워져 있더군. 재밌는 건 너 역시 그랬다는 거고.”
“시기도 비슷했습니다. 일부러 르네 님의 기록을 건드려 연막으로 사용하려고 했겠지요.”
“무, 무슨 기록이 있었다는 거죠?”
에린의 질문에 로만은 귀찮다는 듯 설명을 덧붙였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기록이 남기 마련이지. 그런데 에린, 너는 로에리안저에 들어오기 전에…….”
로만이 중간에 말을 멈추자 에린은 초조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차마 재촉하지는 못했다.
“그래. 로에리안저에 들어오기 5년 전부터 1년 전까지는 어디서 뭘 했는지 확인이 안 되더군.”
“그럴 리가요……. 고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요.”
“르네 님 역시 딱 그 시기에 어디서 뭘 했는지 전혀 찾을 수 없었고.”
로만은 이제 아예 에린을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게다가 로에리안저에 들어오고 딱 1년이 되던 무렵부터 네게 거금이 들어왔지. 우편은 모두 확인 후 저택 내에 반입된다는 걸 알면서도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그, 그건…… 고향의 부모님이…….”
“고향의 부모님이 아주 힘들게 지내고 계시더군. 병으로 고생 중이신데 제대로 약도 못 먹을 정도로.”
로만의 말에 에린은 입을 다물었다.
“매달 꽤 거금을 받았더군. 우편을 추적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걸 몰랐나 보지?”
나 역시 처음 듣는 사실이라 눈을 크게 뜨고 로만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왜 반대로 생각해 주지는 않으시는 거예요?”
레이넌은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짜증이 묻어난 목소리로 말했다.
“로만의 이야기를 뭘로 들었지? 네겐 매달 거금의 돈이 들어왔어. 르네에겐 그런 기록이 없었지.”
“아, 아니에요! 제가 받은 돈은 모두 르네 님께 드렸어요! 에드윈 님의 보모가 되기 전에 얼마나 흥청망청 쓰고 다녔는데요.”
“아, 입지도 못할 드레스를 사는 데 썼다고?”
“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왜 저한테 돈이 들어온 걸로 된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 드레스는?”
“네?”
“그 드레스는 지금 어디 있지?”
레이넌의 질문을 들은 에린의 얼굴에선 핏기가 모두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