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르네를 이용한 건 에린 자신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만 당하면 되던 르네가 결국 레이넌의 옆자리까지 차지했다.
슈나이더와 르네를 엮는 일은 에린에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두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만 해도 충분했다.
슈나이더와 관련되었다면 레이넌은 배신감에 르네를 쳐 내리라 에린은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일단 유산 이야기부터 해 보지.”
그간 르네를 바라보는 표정이나 그녀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감정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했던 레이넌은 뜻밖에도 침착한 모습이었다.
“……유산이요?”
“그래. 증거는?”
“르네 님이 최근 들어 향수를 많이 쓰는 건 아시죠?”
“글쎄.”
덤덤한 레이넌의 대답에 에린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곧 그는 모를 수 있다고 여겼는지 차근차근 설명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향수라는 게 임산부에게는 아주 좋지 않거든요. 향을 유지하기 위해 배합하는 원료가 아이를 유산시키는…….”
“임산부가 향수를 뿌리면 안 된다는 건 나도 알아.”
향수는 아를소티아 제국에서도 극상의 사치품에 해당했다. 귀족 여성 사이에서는 자신만의 향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돈을 들이는 일도 종종 있었다.
문제는 향을 섞이게 하고, 또한 그렇게 만들어 낸 향을 유지하게 하는 데 들어가는 원료가 임산부에게는 치명적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임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향수를 멀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많은 이가 참석하는 파티에서 향수를 뿌리지 않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아무리 레이넌이라고 하더라도 사교계에 만연히 퍼진 향수에 관한 주의 사항을 모르지 않았다.
딱 자른 레이넌의 말에 에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음으로 준비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요즘 향수를 베개랑 침구에 가득 뿌리고 주무시더라고요. 아침까지 향이 남을 정도로.”
“그런데 왜 아무도 내게 보고하지 않은 걸까?”
“그야 저희가 모두 나간 뒤에 뿌리셨으니까요.”
“너는 어떻게 알았고?”
조금은 틀어지는 듯하다가도 레이넌은 에린이 바랐던 질문을 연달아 던졌다.
분명 몇 번이고 준비했던 대답이었는데 레이넌에게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샌가 손에 땀이 축축하게 차올라 에린은 몇 번이고 손을 스커트에 닦아 냈다.
“아침에 르네 님 침대 정리를 제가 하거든요. 그때까지 향이 남아 있을 정도면 도대체 밤에 얼마나 뿌리신 건지…….”
“그래서 르네가 모두 나간 뒤에 일부러 향수를 뿌렸다?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서?”
레이넌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가 르네의 행동 때문에 기막혀 한다고 확신한 에린은 힘주어 말을 이어 갔다.
“저도 설마설마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배 속의 아기를……. 그것도 공작님의 아이인데…….”
에린은 애써 감정을 누르듯 울먹였다. 그런 에린을 보는 레이넌의 얼굴에는 더욱더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미소에 문득 불안함이 든 에린은 준비한 말을 바로 해서 레이넌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다.
하지만 레이넌이 먼저 로만을 향해 물었다.
“르네가 산 물건 중에 향수가 있었나?”
“없었습니다.”
“그래. 나도 르네에게서 향수 냄새를 맡은 기억이 없군.”
“직접! 직접 샀을 겁니다!”
“향수라는 게 그렇게 아무나 살 수 있는 건 줄 아나? 게다가 돈은?”
“그야 르네 님은 공작님의 약혼녀이시니 아무나는 아니고……. 돈은 슈나이더 공작에게 받은 걸로…….”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에린이 바랐던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전혀 예상치 못한 말들이 쏟아지자 에린은 두 손으로 스커트를 말아 쥐었다.
그러지 않으면 손바닥에서 땀방울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제가 직접 봤습니다. 르네 님 화장대에서!”
“화장대?”
“네. 아무런 표식도 없는 아주 작은 향수병이…….”
“아무런 표식도 없는 아주 작은 향수병이라.”
레이넌은 ‘아주 작은’이라는 말을 특히 강조해 얘기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르네가 아이를 유산하면 내가 심리적 타격을 받을 거라 생각했다는 건가?”
“네! 바로 그겁니다!”
다시 에린이 바랐던 흐름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아이를 잃으면……. 게다가 에드윈 님도 함께 잃으면 아무리 공작님이라도 충격을 받으실 테니까…….”
사실 에드윈은 에린의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다. 순간 떠오르는 대로 내뱉었는데 생각하고 보니 나쁘지 않은 듯했다.
에린을 도와주기라도 하듯 어제 에드윈이 다칠 뻔하지 않았던가.
워낙 다들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 내막은 잘 알 수 없었지만 에드윈이 다칠 뻔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에드윈?”
에린은 얼른 몸을 일으켜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몸을 기울여 목소리를 잔뜩 낮춰서 레이넌에게 속삭였다.
“어제 있었던 일도 르네 님이 꾸미신 것 같아요.”
진지한 에린의 얼굴을 보고 레이넌은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예상치 못한 레이넌의 반응에 놀란 듯 에린의 몸이 튀었다. 하지만 에린은 긴장한 탓에 그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레이넌의 눈치를 살폈다.
에드윈이 다칠 뻔했다는 것과 르네가 함께 있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는데 너무 무리수를 둔 모양이었다.
에린은 말을 주워 담는 대신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그런 에린을 보고 레이넌은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을 했다.
“에드윈까지 건드릴 줄이야.”
“그러니까요. 제가 그간 르네 님 옆에 있어서 알아요. 처음부터 르네 님은 공작님 눈에 들려고 갖은 노력을 했어요.”
“그래?”
“공작님의 마음을 얻은 뒤에는 공작님과 에드윈 님을 망가트리는 게 목표예요.”
“슈나이더의 지시를 받아?”
“네.”
드디어 넘어왔다. 에린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르네를 떼어 내면 그 자리는 제 것이었다.
이제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고개를 기울여 에린을 빤히 바라보는 그림과도 같은 저 남자를.
“일단 일어나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에린은 눈만 크게 뜨고 깜빡였다. 당황한 에린을 모를 리 없으면서도 레이넌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지나쳐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뭐 하고 있지? 내가 너를 기다려야 하나?”
에린이 멍하니 있는 사이 레이넌과 로만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어디를 가려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레이넌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아, 아닙니다.”
에린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넌을 쫓았다. 쫓아가기엔 버거운 보폭이었지만 그녀는 열심히 따라갔다.
갑자기 레이넌의 기분이 나빠진 걸 보니 그간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이것저것 준비해 놓은 보람이 있었다.
고개를 숙여 흐뭇한 미소를 애써 감추고는 그녀는 뛰듯이 레이넌의 뒤에 바짝 붙었다.
역시나 그의 걸음이 멈춘 곳은 르네의 방문 앞이었다. 화가 난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도 레이넌은 매너 있게 문을 두드렸다.
***
“공작님?”
레이넌이 아침부터 찾아온 것보다 놀라운 건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사람이었다. 로만이 레이넌과 함께 있는 건 당연했지만 왜 에린이 그와 함께 있는가.
슬쩍 옆을 보자 아멜리아와 세실도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젠 잘 잤나?”
내 얼굴만 봐도 감정이 드러난다고 레이넌은 말했다. 내 의문을 읽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네. 푹 잤어요.”
“그거 다행이군. 몸은?”
“괜찮아요.”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아멜리아가 바로 내 말에서 빠진 부분을 덧붙였다.
“뒤늦게 놀라셨는지 조금 앓으셨습니다. 약한 몸살 증상 정도로 밤새 조금 앓으시고는 이제 괜찮으십니다.”
“푹 잔 게 아닌 모양인데?”
“아니에요. 잠은 푹 잤어요. 저는 앓았는지도 몰랐는데요.”
그 말은 정말이었다. 밤새 앓았다는 말은 아침에 아멜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해 줘서야 알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오늘도 칼슨에게 진료를 한 번 더 받도록 해.”
“네. 그런데 공작님?”
“그래.”
“왜 에린과 함께 오셨어요?”
에린이 함께 있는 것이 위험하니 시녀를 그만두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한 것이 바로 어제였다.
게다가 그 말을 먼저 꺼낸 사람 역시 레이넌이었다.
그런데 그가 에린을 직접 내 방으로 데려오다니. 무슨 이유가 있을 텐데 짐작이 전혀 되지 않았다.
“확인할 것이 있어서.”
레이넌은 내 말에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르네도 앉지.”
“네.”
일단 앉아야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아 그의 옆에 앉았다. 어차피 앉을 사람은 둘밖에 없었다.
하지만 레이넌은 좀처럼 이야기를 시작할 기색이 없었다.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내가 그를 재촉했다.
“공작님, 이제 설명을 좀 해 주세요. 왜 이렇게 이른 시각에 이런 조합으로 오신 거예요? 이유가 있으신 거죠?”
내가 먼저 입을 연 게 레이넌의 마음에 꽤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손을 내 등 뒤로 둘러 편히 앉았다.
자세를 잡은 레이넌이 에린을 바라봤다. 방에 들어올 때만 해도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는 지금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듯 레이넌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래. 어디서부터 시작했지?”
레이넌의 질문은 에린을 향했으나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머뭇거리며 입을 떼지 못하자 로만이 매끄럽게 대신 대답했다.
“르네 님이 일부러 공작님의 아이를 유산하려고 한다는 이야기부터입니다.”
망설임 없이 술술 흘러나온 이야기에 나보다 에린이 더 놀랐다.
“유산……이요?”
유산이라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레이넌은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내게 물었다.
“그대가 매일 밤 향수를 베개와 침구에 뿌리고 잔다지?”
“제가 그런대요?”
향수라니. 이곳의 향수는 독하기만 해서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걸 굳이 잠잘 때 뿌리는 악취미가 내게 있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향수와 유산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향수가 임산부에게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았다.
허탈한 웃음만 흘리고 있자 레이넌은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렇다는데?”
레이넌이 손짓하자 로만은 내 화장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화장품 중에서 로만이 확실히 찾는 게 있는 듯 보였다.
한참을 뒤적거리더니 큰 병 사이에 숨겨져 있던 작은 병을 찾아 레이넌에게 가지고 왔다.
“어떤 표식도 없는 작은 향수병이라. 이게 맞나?”
레이넌은 로만이 가져온 병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물었다.
“아…….”
에린은 살짝 내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그거예요.”
저게 에린이 말한 향수고, 에린은 내가 아이를 유산하려고 저걸 매일 밤 뿌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이런 흐름이라는 것 정도는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레이넌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무지 짐작 가지 않았다.
유산이 가능하려면 임신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걸 가장 잘 아는 이가 레이넌이지 않은가.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어제 에드윈 님이 다칠 뻔한 사고도 르네 님이 직접 꾸민 일이라고요.”
레이넌의 말에 이번에도 로만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리고?”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잠시만요.”
로만이 대답하기 전에 내가 끼어들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