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마무리될 때쯤에야 든 뒤늦은 의문이었다. 로만 역시 레이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실 만합니다.”
“다시 원점인가.”
“하지만 공작님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전혀 없지 않으십니까?”
“또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공작님과 달리 저는 여러 사람을 관찰하니, 공작님보단 제가 이런 쪽으로는 훨씬 뛰어날 겁니다.”
로만은 얄미울 정도로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레이넌은 작게 혀를 찼지만 그에게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 나가 봐.”
레이넌이 듣기에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닌지라 손을 저어 로만을 쫓았다.
“알겠습니다.”
로만이 나가자 비로소 집무실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레이넌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런 게 좋아한다는 마음이라는 거지…….”
마음을 인정하고 나니 한결 가벼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을 건드리는 작고 묘한 감각은 여전히 레이넌을 불편하게 했다.
이상하게도 르네를 떠올리면 그런 불편한 감각이 생생해졌고, 동시에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자신을 충만하게 만드는 게 있었던가.
르네에 대한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분명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 깨달은 이상 이미 늦어 버렸다.
번거롭고, 또한 그토록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던 약점이 생기고야 만 것이다.
그것도 제게는 치명적이고 큰 약점.
예전 같았으면 가차 없이 밀쳐 냈을 것들이었다. 불필요한 감정이라는 것도, 약점도.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떠올랐다. 레이넌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한 미소가.
그날 밤을 레이넌은 뜬눈으로 지새웠다.
물론 갑작스러운 사고의 수습으로 바쁘기도 했지만 그보다 르네에 관한 생각이 레이넌의 밤을 대부분 차지했다.
***
아침 해가 밝아 오고, 로만은 레이넌의 집무실 앞에 섰다. 밤사이에도 몇 번이고 레이넌을 찾아왔지만 여전히 노크하는 데는 조금의 용기가 필요했다.
분명 레이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아는데도 왜 이렇게 머뭇거리게 되는 건지.
로만은 한숨을 내쉬며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로만은 익숙하다는 듯 문을 열었다.
역시나 레이넌은 책상 앞에 앉아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로만이 들어온 걸 알 텐데도 그는 미동도 없었다. 마치 동상처럼.
분명 깔끔하게 정리는 한 것 같은데 왜 저렇게 분위기를 잡고 있는 건지.
역시 르네에 관련된 일이라면 레이넌은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 버렸다.
로만은 레이넌을 부르는 대신 그를 찬찬히 살폈다. 다행히 기분이 나쁘거나 지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를 둘러싼 공기는 다른 곳에 비해 무거운 느낌을 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숨도 자지 못하셔서 혹시 잠시 잠드신 건가.’
레이넌이 가지는 찰나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로만은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보고해.”
로만의 예상과는 달리 레이넌은 잠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히려 눈을 감고서도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로만의 기척을 읽을 정도로 멀쩡했다.
담담히 들려온 레이넌의 목소리에 로만은 걸음을 멈췄다. 그가 깨어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굳이 조심히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깨어계셨습니까.”
“그래.”
로만은 조금 전 레이넌을 보며 했던 여러 생각을 지워내고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려 입을 열었다.
“그 장소에서 티타임이 있을 줄 알았던 사람, 그리고 티타임 장소에 함께 있던 사람. 많은 수는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적지는 않습니다.”
“그래. 겹치는 사람이 대부분일 테니.”
“네. 게다가 다들 하나같이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 추려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르네는?”
“뒤늦게 놀란 모습을 보이셨지만 이제 안정을 찾으셨답니다.”
“다른 위협은?”
“지금까지는 조용합니다.”
“하긴, 하루도 안 되었는데 또 일을 벌이진 않겠지.”
“네. 하지만 이제 어떻게 몰아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아멜리아는?”
“잘 때도 르네 님 방에서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가끔 혼자 있고 싶어 하시지만 바로 방 밖에서 대기하고 있으니…….”
“혼자 있는 시간이라. 줄이면 좋겠지만 그러면 르네가 너무 답답하겠지?”
“일단 당분간이라도 조심하시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안전이 중요하니 아멜리아와 조금이라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로만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레이넌은 잠시 망설였다.
“그건 조금 두고 보지. 대신 아멜리아에게 절대 그녀의 곁에서 떠나지 말라고 제대로 당부해 놔.”
“알겠습니다.”
“혹시 르네가 방에 혼자 있더라도 꼭 방문 앞을 지키고 있도록.”
“알겠습니다.”
그 외에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일 및 앞으로의 보안에 관한 일을 다시금 점검하려는 때였다.
바깥이 웅성거린다 싶더니 곧 누군가의 날카로운 음성이 집무실의 두꺼운 나무 문을 뚫고서 들어왔다.
목청이 떨어져라 고함을 지르는 여자의 목소리는 레이넌에게도 로만에게도 귀에 익은 것이었다.
날 선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자 레이넌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공작님이 르네 님한테 속고 계신다니까!”
악에 받친 에린의 목소리를 들은 레이넌과 로만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갈 데까지 간 모양이군. 보이는 것도 없을 정도로.”
“그러게 말입니다. 치울까요?”
“아니, 들여보내. 들어나 보지.”
“네?”
어차피 에린의 처우는 결정한 바였다. 슈나이더의 눈에 띄지 않을 아주 먼 곳으로 버리기로 했다.
당연히 에린을 내보내기로 했으니 이런 난리를 친 걸 핑계 삼아 바로 쫓아낼 줄 알았다.
하지만 로만의 예상과는 달리 레이넌은 에린을 집무실에 들이라 말하는 것이었다.
“곧 떠날 텐데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가라고 하지.”
레이넌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선심 쓰듯 말했다.
하지만 로만의 귀에는 기왕이면 꼬투리를 있는 대로 잡아 더 멀리, 혹은 혹독한 곳으로 보내겠다고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는 로만은 밖으로 나가 사람을 물리고 에린을 집무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에린은 들어오자마자 상기된 얼굴로 서글프게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이넌도, 로만도 그녀의 울음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한 것과 달리 냉정한, 아니 아예 무심한 두 쌍의 눈을 마주한 에린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곧 에린은 레이넌의 책상 앞에서 힘없이 풀썩 주저앉았다. 그런 제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무척이나 잘 아는 것이 분명했다.
가련하다 못해 비참한 에린의 모습을 보고서도 두 사람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뭔가 질문이 나오든, 호통이 나오든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에린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르네 님이 어떻게 공작님께 이러실 수 있어요? 저는 이제 도저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르네가 어떻게 했길래?”
“그게…….”
일부러 르네의 이름을 거론하며 말을 꺼내 놓고는 정작 말하라고 하니 에린은 망설였다.
물론 머뭇거리는 그 모습마저 잘 계산된 것이라는 걸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잘 알았다.
걱정하는 말은커녕 어떤 말도 쉽게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레이넌의 눈치를 보며 에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공작님께만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에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만은 한심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눈치가 빠른 에린은 그런 로만의 기색을 알아채고는 움찔했다.
에린은 조심스럽게 눈을 굴려 레이넌과 로만의 눈치를 살폈다. 로만은 얼굴로도 제가 느낀 것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에린에게는 다행인 점은 레이넌은 언제나와 다름없이 무표정한 얼굴이라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로만에게 다시 설명할 일은 없었으면 좋겠군.”
에린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기왕이면 레이넌과 단둘이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조금 더 레이넌과 가까워질 기회를 만들어 보고 싶었지만 일이 생각처럼 흐르지 않았다.
폐쇄된 공간에서 단둘이 있게 된다면 레이넌도 제게 흔들리게 될 텐데. 르네 같은 게 아니라.
에린은 르네에 대한 미움을 씹듯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그래도 굳이 나만 들어야 한다면 그만두도록 하지.”
“아닙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금방이라도 에린을 쫓아내려는 듯한 레이넌의 태도에 에린은 다급하게 대답했다.
레이넌과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제까지는 아무 말도 없다가 갑자기 오늘부터 르네의 시녀직을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았다.
“르네 님을 더 이상 모시지 말라니요?”
“당분간 그렇게 하도록 해. 이 기회에 좀 쉬고. 일단 따로 말이 있을 때까지는 대기하도록 해.”
캐서린도 아니고 아멜리아에게서 받은 통보였다. 캐서린이라면 따져 보거나 이유를 물어볼 수라도 있었겠지만, 아멜리아에겐 무리였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그만두라는 말만 남기고 아멜리아는 자리를 떠났다.
틀림없이 르네의 짓이었다. 보통 시녀의 이동은 캐서린의 일이었지만 아멜리아의 입을 통해 전달된 것이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아닌 척하더니 이렇게 레이넌에게서 자신을 떼어 놓으려고 하다니.
홀로 남은 방에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서도 분을 참지 못한 에린은 그대로 레이넌의 집무실로 향했다.
아무리 할 말이 있다고 해도 좀처럼 들여보내 주지 않는 시종 때문에 화가 더 차올랐지만, 다행히 레이넌은 에린을 무시하지 않았다.
레이넌을 만난 것만으로도 이제 모든 일이 잘될 것이 분명했다. 에린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말한다고 하지 않았나?”
르네에 대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절로 부들부들 떨렸다. 에린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아마 레이넌의 눈에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처연해 보이리라. 그렇게 믿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간단히 하도록.”
“그게…….”
말하겠다고는 했지만 에린은 자꾸 로만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을 끌어 봤자 레이넌이 자신과 단둘이 남을 일은 없으리라는 걸 깨달은 에린은 거침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도 한때는 친구였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시는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장황한 서론으로 말을 시작했다. 굳이 빙빙 돌리는 말을 다 들어 줄 이유는 없었던 레이넌은 손을 들었다.
“서론은 뛰어넘지.”
“아……. 죄송합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뭐지?”
“그게…… 아무래도 르네 님께서 배 속의 아이를 유산하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유산?”
에린의 말에 레이넌과 로만은 동시에 되물었다.
집무실에 들어서고 최초로 되돌아온 반응에 에린은 힘을 얻은 듯 말을 이어 갔다.
“네. 워낙 조심스러운 일이라 한참을 지켜봤는데…….”
“르네가 왜?”
레이넌이 눈썹을 슬쩍 올리며 물었다. 의문을 품은 듯 레이넌의 표정을 보고 에린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예 생각도 못 했던 일이라면 충격과 배신감은 더 클 터였다.
“네?”
“르네가 왜 그래야 하지?”
시작은 생각과 전혀 달랐지만 정작 말을 시작하니 에린이 바랐던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에린은 목소리를 조금 죽여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르네 님은 슈나이더 공작이 작정하고 보낸 사람이니까요. 공작님을 유혹해서…….”
“유혹이라.”
“네. 공작님을 유혹해서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유산해서 공작님께 심리적인 타격을 주려는 거죠.”
“르네가 일부러 나에게 접근했다고? 슈나이더의 명을 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