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만은 제 귀를 의심하며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레이넌은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울컥 화가 치민 표정을 했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공작님?”
“됐어. 못 들은 걸로 해.”
그리고 로만의 문 앞에서 그대로 문이 다시 닫혔다. 부딪히든 말든 배려 같은 건 없는 거친 움직임에 로만은 얼른 뒤로 물러났다.
“발이 끼일 뻔했다고요.”
레이넌에겐 들리지도 않을, 설사 들린다고 해도 신경을 쓰지 않을 로만의 작은 불만은 그대로 묻혔다.
“이제야 좀 진전이 있는 모양인데. 하필 이런 시기에…….”
로만은 그 자리에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레이넌이 감정에 대해 자각하는 건 분명 그를 위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위협이 시작된 시기였다.
아주 사소한 방심이 큰 위협을 가지고 올 수도 있었다.
“뭐, 그렇다고 하실 일을 놓치실 분은 아니니까.”
문제는 이제까지 레이넌의 메마른 삶에 있어 누구도 고려하지 않았던 감정이라는 것이 생겨났다는 점이었다.
“보모라도 된 기분이지만. 일단 지켜보는 것도 보모의 도리지.”
로만은 그렇게 말하고는 제게 주어진 여러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
혹시나 해서 로만에게 질문을 던져 봤지만 그의 황당하다는 얼굴을 보고 레이넌은 금세 후회했다.
로만에게 물으면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과의 접촉이 적었고, 무엇보다 태생부터 무덤덤했던 레이넌이었다.
게다가 귀족들의 세상에서 감정이라는 건 불필요한 것, 혹은 약점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감정이라는 건 레이넌에게 무척이나 어려운 문제였다.
“하아……. 좋아한다, 라.”
며칠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장면이었다. 어떻게 참았는지 또박또박 따지듯 질문을 던진 르네의 얼굴은 너무도 태연해서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제가 공작님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데 이걸 어떻게 해결하시겠다는 거예요?”
좋아한다는 말처럼 많은 의미를, 많은 대상을 포용하는 말이 있을까.
그녀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고민하는 사이 르네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말한 감정의 의미는 상당히 좁혀졌다.
모호한 건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명확하게 물을 수도 없었다.
갑자기 다가온 그녀의 따스한 손이 입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한 말보다 그런 행동이 사람을 더 자극한다는 걸 르네는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또한 말보다 얼굴과 행동에서 그녀의 감정이 더 잘 나타난다는 것 역시.
경계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녀의 접촉에 어쩐 일인지 레이넌도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다른 때였다면 장난이라도 쳐서 당황한 르네의 얼굴을 보려고 했을 터였다.
“어째서였을까.”
부드러운 손의 감촉이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후로 자꾸 그녀의 손이 닿았던 입에 손을 대곤 했다. 지금처럼.
“그녀를 붙들어서 뭘 말하고 싶었던 거지, 나는.”
도망가려고 애쓰니 더욱더 붙들고 싶었다.
그리고 르네와 분명히 해야 할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레이넌도 정확히 모르겠다는 점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대화 좀 하자고 쫓아다녔다니.”
레이넌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요즘의 자신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누군가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이 낯설었지만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기까지 했다. 그게 레이넌을 혼란스럽게 했다.
레이넌은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건 분명 제 감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떠오르는 건 르네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새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왔다는 게 느껴졌다. 참으로 다양한 표정이, 그녀의 감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가질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더욱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럴수록 떠오르는 건 르네의 얼굴뿐이었다. 그리고 예전엔 그저 흥미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뭔가 간지러운, 아니 숨이 차오르는 것 같은데.”
레이넌은 저도 모르게 입으로 중얼거리고서는 고개를 저었다. 입 밖으로 뱉어 내니 더욱 생소했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심장 어딘가가 따끔했다.
간지럽고 이상한 느낌 역시 레이넌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아프거나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작게 꿈틀거리는 감각이 묘하게 불편했다.
차라리 대놓고 베이거나 찔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주 작게 움찔거리는 생경한 감각은 좀처럼 참기가 힘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레이넌은 곧바로 칼슨을 불렀다.
“역시 어딘가 많이 안 좋으십니까. 그렇게 창백한 얼굴을 하신 건 처음 봤습니다.”
칼슨을 불렀더니 로만이 먼저 와서는 이런저런 걱정을 늘어놓았다.
가든 아치가 넘어가 르네와 에드윈을 덮쳤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로만이 정색할 정도로 창백했던가. 레이넌은 얼굴을 슬쩍 쓸었다.
“어디가 얼마나 안 좋으시길래 직접 칼슨을 부르셨습니까?”
레이넌이 직접 칼슨을 부르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로만은 더 놀란 듯했다.
“그렇게 호들갑 떨 것 없어. 그냥 확인 하나만 하면 되니까.”
“공작님, 칼슨입니다.”
“들어와.”
칼슨 역시 레이넌이 직접 부른 상황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어디가 얼마나 안 좋으시길래……?”
“왜 다들 이렇게 소란인지. 그냥 여기가 조금 불편하달까. 묘하게 거슬리는군.”
레이넌이 가슴께를 조금씩 쓸면서 말하자 로만이 의아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혹시 체하신 겁니까?”
“그런 걸로 칼슨까지 불렀을까? 원인을 모르겠는데 꺼끌꺼끌한 게 기분이 나쁘군.”
레이넌의 말을 들은 칼슨이 진료를 시작했다. 평소보다 꼼꼼히 레이넌을 살핀 후 칼슨이 입을 열었다.
“건강상 문제는 없으십니다.”
“확실합니까?”
로만이 의심스럽다는 듯 되묻자 칼슨은 담담한 목소리로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문제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건강하십니다.”
로만도 뭔가 말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레이넌이 손을 들어 그를 막고는 칼슨에게 물었다.
“그럼 이런 증상은 왜 나타난 거지?”
“글쎄요. 심리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심리적인 문제라…….”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르네 님이 오스틴에게 진료를 받았을 때도 비슷한 이유라 하였지요.”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비슷한 증상인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스틴이 알면 화내겠군요. 제 환자 정보를 마음대로 일러 줬다고요.”
“오스틴과 르네에겐 비밀로 하지.”
“감사합니다.”
칼슨은 용무를 마쳤다는 듯 조용히 방을 나섰다.
하지만 로만은 나갈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꼿꼿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르네 역시 비슷한 이유로 오스틴을 불렀다는 말을 한참이고 곱씹던 레이넌은 뒤늦게 로만이 남아 있음을 알아차렸다.
“할 일은 다 했나 보지?”
“그럴 리가요. 아무래도 오늘 밤을 새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공작님 쪽도 정리가 필요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또 쓸데없는 소리를…….”
“아까 분명 제게 물으셨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어떤 감정이냐고.”
“하아…….”
레이넌은 귀찮다는 듯 손짓을 하다 곧 마음을 바꿨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에 앉는 레이넌을 보고 로만 역시 그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정리는 좀 되셨습니까?”
“그래. 정리는 된 것 같군.”
“그런데 왜 이렇게 복잡한 표정이십니까?”
“왜 못 들은 걸로 해 달라고 했을까?”
중얼거리듯 흘러나온 레이넌의 말에 로만이 물었다.
“앞뒤 상황을 좀 정확히 알려 주시겠습니까?”
“여자가 좋아한다고 해 놓고 자기가 놀라서 못 들은 걸로 해 달라고 도망갔단 말이지.”
레이넌의 건조한 목소리로 들으니 뭔가 큰 잘못을 하고 놀라 도망간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레이넌이 말한 여자가 르네라고 한다면…….
르네도 레이넌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는 제 추측이 맞았던가. 이제껏 레이넌을 피해 다니던 것이 그 때문이었나.
게다가 르네가 고백이라니. 이건 로만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로만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으니 레이넌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재촉했다.
“앞뒤 상황을 말했는데도 할 말이 없나?”
“그런데 공작님.”
“그래.”
“그걸 왜 굳이 저에게 확인하십니까?”
의아한 로만의 물음을 들은 레이넌은 멈칫했다. 그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적인 듯 보였다.
“중요한 건 그 말을 들은 사람의 마음이 아닙니까.”
“……그렇군. 그 말이 맞는군.”
로만의 말을 들은 레이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 느껴 보는 불편한 감각, 자꾸 떠오르는 르네의 얼굴, 그리고 그럴 때마다 벅차게 뛰는 심장.
“이게 좋아한다는 감정인가.”
그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르네에게 자꾸 다른 모습을 보이고, 또 뭔가 기대를 하곤 했던 모양이었다.
레이넌은 금세 한결 가벼운 얼굴을 했다. 그런 레이넌을 보고 로만 역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확신이 서신 모양입니다.”
“그래.”
“그렇다고 너무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시면 르네 님은 도망갈지도 모릅니다.”
“그러려나.”
“그럼요. 공작님은 목표가 있으면 앞뒤 안 보고 저돌적이시니까요. 일 처리 하듯이 다가가면 안 됩니다. 일이 아니라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렇군. 일 처리와는 다르다는 거지.”
로만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듯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르네에게 다가가란 말인가.
다시 새로운 고민이 생겨났다. 차라리 밤을 새워서 일하는 게 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진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누구는 설레고 행복한 일이라고도 하던데요.”
“설레고 행복하다고? 더 어렵군.”
“어쨌든 정리도 끝났고, 확신도 얻으셨으니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가장 중요한 조언을 했으니 로만의 일은 끝이었다.
괜히 마음을 자각하고 무턱대고 몰아붙였다가 르네가 물러서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다행히 레이넌은 로만의 조언이 무얼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한 듯 보였다.
아마 이제 르네와 관련된 일로 찬바람 부는 일은 없겠지.
로만은 일을 하나 줄인 기분이라 아주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하실 말씀이 남으셨습니까?”
“내가 르네라고 말했던가?”
레이넌의 말에 로만은 헛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런 로만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레이넌은 짙게 인상을 썼다.
“공작님께 좋아한다고 고백할 만한 여자가 르네 님 말고 또 있겠습니까?”
“……하긴.”
레이넌은 로만의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자세한 설명도 없이 로만이 모든 걸 알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 분명했다.
“공작님과 르네 님만 모르셨을걸요.”
“뭘?”
“두 분이 서로 좋아한다는…….”
말을 하다가 로만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성인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좋아한다는 말이라니. 조금…….”
“조금?”
“귀엽네요.”
뜻밖의 표현에 레이넌의 얼굴은 구겨졌다.
“뭐, 두 분께는 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제 나를 앞에 두고 욕하기로 한 건가?”
“할 말은 해야 병이 안 나는 체질이라서요.”
“한 김에 계속해 보지.”
“보통은 성인 여자와 남자 사이의 감정이 조금 더 애틋하고 열정적인 감정으로 표현되지 않습니까. ‘좋아한다’보다는 ‘사랑한다’라는?”
“사랑이라…….”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하시죠.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이 열정적인 사랑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일지도 모르니까요.”
“참 마음에 안 드는데.”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런 점이 공작님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했는데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그런데 말이지.”
“네.”
“감정에 관해서 너한테 조언을 듣는 게 맞는 일인지 문득 의심이 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