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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93)화 (93/129)

무척 심각한 얼굴로 방에 들어왔던 로만은 움찔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러니까 지금은 때가 아니라니까…….”

뒤에서 아멜리아가 슬쩍 중얼거리자 로만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살짝 노려봤다.

물론 나로서는 아주 적절한 때에 들어와 준 그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하아…….”

레이넌은 가슴 아주 깊숙한 곳에서 감정을 끌어 올려 숨으로 뱉어 냈다. 한숨이라고 표현하기에는 꽤 복잡하고 무거운 것들이 담겨 있었다.

“지금?”

“……네.”

“그만큼 중요한 일이어야 할 거야.”

“그, 그럼요.”

로만은 안절부절못하고 대답했다. 저 분노를 잠재울 만큼 중요한 일이어야 할 텐데, 하는 불안함이 아주 순간 그의 얼굴에 비쳤다.

“그래. 네 판단은 틀리지 않을 테지.”

이를 아득 물고 씹어 내듯 말을 뱉어 낸 레이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주변의 눈치를 보며 슬쩍 일어섰다.

하지만 곧장 밖으로 나갈 것 같던 레이넌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그대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흔들림 없는 눈빛이 와 닿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로만과 아멜리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공작님?”

로만은 조심스럽게 레이넌을 불렀다. 그제야 레이넌은 멈췄던 시간이 움직인 듯 눈을 깜빡였다.

“다시 이야기하지. 부디 도망가지 않겠다는 말을 지키면 좋겠군.”

레이넌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그럼요. 도망…… 안 가죠.”

나도 모르게 머뭇거리자 레이넌은 눈썹을 슬쩍 위로 올렸다.

“정말, 도망 안 가요.”

레이넌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보며 속내를 읽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신뢰는 안 가지만……. 괜찮아. 어차피 이 저택 안에서 도망가 봤자니까.”

그의 말에 몸이 살짝 움찔했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레이넌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어쩐지 제 발 저린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레이넌은 허탈하게 웃었다.

“역시 도망갈 생각이었군.”

“아니요. 말씀하신 대로 저택 내에서 도망가 봤자인데요. 하하하.”

전혀 믿지 않는 듯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레이넌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가 방을 나서자마자 소파에 엎드렸다.

“하아…….”

“무슨 대화 중이셨길래 도망을 가니 마니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는 거예요?”

머리 위에서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 힘도 없어 그대로 대답했다.

“정확히는 아직 얘기를 시작도 못 해 봤는데…….”

소파에 얼굴을 묻은 채라 목소리가 뭉개졌지만, 아멜리아는 정확히 알아들은 듯했다.

“일단 놀라셨을 테니까 따뜻한 차라도 한 잔 드세요.”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준비한 모양인지 아멜리아는 테이블 위에 찻잔을 올려놓았다.

“고마워.”

따뜻하게 데워진 찻잔을 들자 문득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그러리라 예상했는지 아멜리아는 평소보다 차를 적게 따라 놓았다.

“어? 왜 이러지?”

“인지를 못 하셨을 뿐이지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아멜리아는 옆에 앉아 내 양팔을 쓰다듬어 주었다.

찻잔과 아멜리아의 손을 통해 내 몸에 전달되는 온기가 다른 어느 때보다 따뜻하게 다가왔다.

“고마워.”

“충분히 놀라실 만했어요. 아주 담대하게 잘 대처하셨어요. 덕분에 에드윈 님도 많이 놀라지 않으신 것 같아요.”

“몰라서 그랬던 거지, 뭐. 그래도 큰 소리 난 거 말고는 다른 기억은 크게 없긴 해서…….”

“그럼 다행이고요.”

“에드윈은 좀 어떠려나. 가 보지 않아도 될까?”

“에드윈 님이야 늘 씩씩하시잖아요. 오히려 르네 님 걱정하느라 바쁘실걸요.”

“그럼 역시 한번 가 보는 게…….”

“아니에요. 워낙 르네 님이 덤덤하셨고, 괜찮다고 전달 드렸더니 안심하신 모양이에요.”

아멜리아의 말대로 에드윈은 밝고 씩씩한 성격이니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역시 내가 제일 큰 문제일지도.

“그런데 아멜리아…….”

“네.”

“아멜리아는 뭐든 아는 게 참 많잖아?”

“그런가요?”

“응. 뭐든 아니까……. 그래서 혹시 이런 것도 아나 싶어서…….”

“뭔데 이렇게 뜸을 들이세요?”

“혹시 내가 했던 말을 도로 주워 담는 법이라든지, 내 말을 들은 사람의 기억을 없애는 법 같은 거 알아?”

“있죠.”

조심스럽게 물은 것과 달리 아멜리아는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뭔데?”

“그 사람을 없애 버리거나, 없애겠다고 협박을 해서 못 들은 척 살아가게 하거나?”

산뜻한 미소가 무색하게 무척이나 험악한 답변에 내 희망은 저 멀리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농담이겠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아멜리아의 표정을 보고 깨달았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 무섭다는 걸 아멜리아는 알까.

“농담이라고 말해 줘.”

“없애 드려요?”

“아니야……. 마음은 고마운데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잘 이겨 내 볼게.”

“그런데 누가 무슨 말을 들었길래요?”

“……하아.”

눈치 빠른 아멜리아였지만 이번만큼은 아멜리아도 영문을 알 수 없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곧 아멜리아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레이넌에게 고백했다는 건 아멜리아도 쉽게 눈치채지는 못하겠지.

“웬일이야? 재밌는 일 같다고 신나서 물어볼 줄 알았는데?”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아요. 아직도 손을 떨고 계신걸요.”

“아아…….”

아멜리아의 말이 잊고 있던 내 떨림을 되살렸다. 손만이 아니었다. 몸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르네 님이 다치셨는걸요.”

“알잖아. 보이긴 이래도 큰 상처는 아니라는걸.”

“그럴지도요. 하지만 르네 님의 작은 상처에라도 마음 아파할 사람이 많다는 걸 알아주세요.”

“응. 그럴게.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까 그 크고 무거운 아치에 사람이 깔렸으면…….”

이미 지나고 나서야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떨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소름까지 돋아났다.

“르네 님, 그 아치가 다행히 사람을 덮치진 않았잖아요. 일어나지 않은 일을 굳이 상상하지 마세요.”

“응.”

아멜리아의 말에 조금은 식었지만 내 몸보다는 따뜻한 차를 천천히 들이켰다. 목을 타고 온몸으로 온기가 천천히 퍼져 나갔다.

급격히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아멜리아는 내 얼굴만 봐도 그런 마음을 알아챈 듯했다.

찻잔을 비우고 내려놓자 그녀는 천천히 내 몸을 일으켜 침대로 이끌었다.

“일단 아무 생각 말고 푹 쉬세요.”

“응.”

특별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건 다행인 일이었다. 눈을 감아도 별달리 펼쳐지는 광경이 없었으니.

눈을 감고 어둠이 펼쳐지자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

언제나 정돈되어 있고 아름다움을 뽐냈던 정원은 전혀 다른 장소가 되어 있었다.

가든 아치가 무너지며 망가트린 테이블과 의자는 물론 움푹 파인 땅과 먼지들로 꽤 처참한 모양새였다.

직접 현장을 본 레이넌은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그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인 수준이군.”

“그렇죠.”

레이넌은 부서진 테이블을 발로 툭툭 쳤다.

“일부러 건드렸습니다. 상태를 보니 어젯밤 정도로 예상됩니다.”

“어젯밤?”

“네.”

어젯밤이라는 말에 레이넌도, 로만도 심각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오늘 여기서 두 사람이 티타임을 가진다는 건…….”

“며칠 전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두 분 모두 오랜만에 만난다고 설레서 장소를 미리 정하셨거든요.”

“물론 그 사실을 아는 건 몇 안 될 텐데.”

“네. 그래도 어제는 아는 사람이 영 적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요.”

“흠…….”

“확실한 건 미리 준비해 놓는 거야 쉽지만 때맞춰 넘어지게 하는 건 어렵다는 점입니다.”

“때맞춰 밀었거나 어떤 식으로든 건드렸다는 뜻이겠군.”

“네. 그러면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모두가 수상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은?”

“그게…… 다들 기억을 못 합니다.”

“기억을 못 해?”

“갑자기 일어난 일이고 모두 르네 님과 에드윈 님께 집중했던 터라…….”

“쓸모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군.”

“죄송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상한 점은…….”

“또 있나.”

“네.”

“어쩐 일인지 테이블과 의자가 원래 놓여 있던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테이블과 의자의 위치가 변했다고?”

“네. 조금 옮겨져 있었습니다. 잔디가 눌려 있는 걸 보고 알았습니다.”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이미 엉망이 된 잔디를 살폈다. 그의 말대로였다.

테이블과 의자가 늘 놓여 있던 자리는 잔디가 눌려 더 자라지 못했다.

“왜 굳이 옮겨야 했을까.”

“저도 그게 너무 이상합니다. 안 옮겼다면…….”

“안 옮겼다면?”

“의자 위로 아치가 떨어졌을 겁니다.”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면 깔린 건 테이블이 아니라 르네와 에드윈이었을 거란 이야기군.”

“그렇습니다. 실수일까요?”

“글쎄. 그럴 것 같진 않은데. 현장에서 건드릴 정도면 방향도 예측할 수 있었다는 얘기니까.”

“그럼 왜 그랬을까요?”

“일부러 저 큰 걸 넘어트려 놓고 치명상은 입히고 싶지 않았다?”

“모순적이네요.”

“그렇군.”

범인이 테이블과 의자의 자리를 옮기지 않았더라면…….

아찔한 상상이었다. 레이넌은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았다.

“괜찮으십니까?”

“뭐가.”

“얼굴이 창백하신데, 칼슨이라도 부를까요?”

“신경 쓸 것 없어. 그보다 이것 때문에 꼭 지금 가야 한다고 했던 건가?”

“……중요한 일이지 않습니까?”

“지금 들으나 한 시간 뒤에 들으나 달라질 건 없을 일 같은데?”

“……죄송합니다.”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일임은 분명했다. 르네와 에드윈의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가 일부러 그들을 해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니.

하지만 로만은 그런 말 대신 고개를 숙였다.

아까 르네와의 시간을 방해했을 때 레이넌의 살벌한 눈빛이 떠오른 탓이었다.

뭐라고 하거나 무섭게 노려볼 줄 알았건만 뜻밖에도 레이넌에게서는 어떤 반응도 없었다.

“됐어.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군. 나 역시 정리가 필요하니까.”

“정리요?”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뭘 정리한다는 말인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더 짚어 본다는 말인가. 아니면 르네와의 관계를……?

레이넌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와 로만의 생각은 중간에서 멈췄다.

“일단 돌아가지. 그 자리에 있던 인물, 그리고 티타임 장소를 알고 있던 인물 모두 정리해 놓도록.”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레이넌은 그 외에도 끊임없이 지시를 내렸다. 길고 긴 지시가 끝날 무렵 집무실이 눈앞에 보였다.

이 일에 대해 분명 더 할 이야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로만은 레이넌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문은 로만이 들어가기 전에 닫혔다.

이번에야말로 방해하면 무슨 모진 소리를 들을지 몰랐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섰다가 나중에 일을 잔뜩 떠맡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연 로만은 화들짝 놀랐다. 레이넌이 기다렸다는 듯 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던 탓이었다.

“공작님?”

로만의 부름에 레이넌은 잠시 머뭇거리며 멋쩍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어떤 감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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