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공작님?”
나는 갑작스러운 레이넌의 행동에 놀라 발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두지 않았다.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러지 말라는 듯 내 발목을 살짝 붙들었다.
“이렇게 움직이면 아픈가?”
“아니요. 괜찮은데요.”
레이넌은 내 발목을 이쪽으로, 저쪽으로 돌려 봤다.
“정말 괜찮다니까요.”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야. 놀라서 지금은 모를 수도 있어.”
레이넌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려놓고는 다른 쪽 구두도 벗겨 냈다.
“공작님, 정말 안 아파요.”
하지만 레이넌은 들리지 않는 듯 신중하게 내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를 말리기를 포기하고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단단하고 따뜻한 손이 발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다른 손은 더 조심히 내 다리로 올라왔다.
그는 집중해서 내가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손 때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가?”
“괘, 괜찮다니까요.”
레이넌은 나를 진지한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불과 몇 시간 전, 그에게 말도 안 되는 고백을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공작님.”
“그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나? 여기?”
나는 대답 대신 힘을 주어 그의 손에서 발을 빼냈다.
“정말 괜찮아요. 아픈 곳 없어요.”
레이넌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하려는 순간 칼슨이 도착했다.
“일단 공작님부터 진료를 보시는 게…….”
“나는 신경 쓰지 마. 정말 괜찮으니까. 그대가 먼저야. 밖에서 기다리지.”
레이넌과 아멜리아의 걱정과는 달리 정말 다친 곳은 팔뿐이었다.
그것도 약하게 쓸린 거라 약만 잘 발라 주고 물이 닿지 않게 조심하면 금방 나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칼슨이 직접 설명했음에도 레이넌은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했다.
“다른 데는 괜찮은 게 확실한 거지?”
“그렇습니다.”
칼슨은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질문에도 전혀 흐트러짐 없이 대답했다.
“그래. 칼슨이 그렇다면 안심해도 되겠지.”
이미 몇 번이고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셨는데요?
레이넌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은 나와 달리 칼슨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떴다.
“에드윈 님도 특별히 다친 곳은 없다고 합니다.”
오스틴의 진료는 진작 끝났는지 아멜리아가 에드윈의 상태를 알려 주었다.
“다행이네.”
“일단 아멜리아도 앉지.”
“네.”
셋 모두 자리를 잡은 후에도 한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도 상황을 잘 모르는 나는 두 사람의 무거운 분위기에 눌려 이쪽저쪽으로 눈만 굴렸다.
“이렇게나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네요.”
침묵을 깬 건 아멜리아였다. 레이넌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도 이 정도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어.”
“저기…… 두 분은 정말 이게 그냥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가요?”
“일단 너무 겁먹지 말고 듣도록 해.”
“네.”
그런 서론이 사람을 더 겁준다는 걸 레이넌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슈나이더가 그대를 본격적으로 노리기 시작한 것 같아. 벨라가 찾아온 이유도 그래서였고.”
“벨라는 무슨 상관인가요?”
“정말 약혼한 사이가 맞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러 온 거겠지.”
“그래서 계약이니 조건이니 그런 이야기를 꺼낸 걸까요?”
“그렇겠지. 확신을 하고 돌아간 모양이야. 그렇다면 그대만 한 사람이 없어.”
“저만 한 사람이라면?”
“에드윈도 그대를 따르니 나와 에드윈을 동시에 흔들 수 있는 사람.”
“아……. 제가 다치거나 죽는 것만으로도 큰 타격이 될 거라 생각하는 거군요.”
담담한 내 말에 레이넌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공작님?”
“그렇게 담담하게 말할 일이 아니야.”
“아니, 그들이 바라는 건 그게 맞지 않나요?”
“그래. 그렇지만……. 아니야. 일단 그 이야기는 뒤로 미뤄 두고. 정말 사고라고 생각하지 않냐고 물었지?”
“네. 일부러 꾸몄다기엔 너무…….”
“절묘하지.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넘어지는 구조물이던가? 그렇다면 그게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게 그렇게 때맞춰 그 방향으로 넘어지는 게 가능한가요?”
“그래. 그래서 그대에게도 일러두는 거야. 웬만하면 그대에게까지 알리고 싶지 않았어.”
“네?”
“그대가 두려워할 만한 일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레이넌은 정말 내키지 않는다는 듯 설명했다.
“설마 그대가 티타임을 하는 중에 가든 아치가 넘어갈 줄은 몰랐어. 앞으로도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
“네.”
“그러니까 아멜리아와 웬만하면 떨어지지 말도록 해. 그리고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무조건 피하고 보는 거야. 알겠나?”
“네.”
“그리고 에린은 자르도록 하지.”
“아…….”
“그대의 친구였다고 하지만…….”
“아니요. 말리려 했던 게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던 부분이거든요.”
“그래?”
“네. 요즘 심상치 않아 보여서요.”
“그랬군. 에린은 이미 슈나이더의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그것도 눈치 못 채고 있겠지.”
“에린이 눈치는 빠른 편인데요?”
“그 빠른 눈치가 제 역할을 못 할 정도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거지.”
“어디에요?”
“나한테.”
레이넌은 당당하게 에린의 정신을 온통 빼앗은 건 자신이라 답했다.
그의 말에 가까이 붙어 뭔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정확하게는 그대일지도 모르겠군. 내 곁에 있는 그대.”
“아.”
“그래. 그대를 밀어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모양이야.”
레이넌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말은 어쩐지 에린이 바라는 건 레이넌이 아니라 나를 밀어내는 것이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주변의 시선을 무척 신경 쓰는 성격인데도 주변이 보이지 않는 듯이 행동할 정도니까요.”
“그래.”
“그 정도로 지금 에린은 악에 받쳐 있습니다. 왜 그렇게 르네 님께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멜리아가 말끝을 흐린 순간 레이넌과 그녀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닿았다.
“저도 모르죠.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어쨌거나 지금 르네 님 곁에 두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당장 오늘부터 르네 님을 모시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모두의 의견이 같아 다행이군.”
생각지도 못하게 에린의 일이 해결된 건 다행이었다. 하지만 상황 자체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심각한 얼굴을 한 레이넌과 아멜리아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무튼 르네, 당분간은 최대한 조심하도록 해.”
“네.”
“그리고 아멜리아는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지.”
“알겠습니다.”
아멜리아는 레이넌의 말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재빨리 그녀의 스커트를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르네 님?”
제발 둘만 남겨 두지 마.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눈으로 애타게 그녀에게 매달렸다.
애절한 내 눈을 본 아멜리아는 난감한 얼굴로 나와 레이넌을 번갈아 바라봤다.
“르네.”
“……네.”
대답은 했지만 레이넌을 바라보지는 못했다. 그를 바라보는 순간 손에서 힘을 빼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든 탓이었다.
여전히 아멜리아를 붙든 손에 힘을 꼭 주고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자 레이넌은 나를 달래듯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 해야 할 이야기가 있을 텐데?”
이런 분위기에 다정한 목소리는 내 손에 힘을 빼기는커녕 더 세차게 아멜리아를 붙들게 했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걸?”
“부탁드립니다.”
“그럴 수는 없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지.”
아멜리아를 올려다보는 눈빛만큼이나 간절한 목소리는 단번에 거절당했다.
대답 없이 버티고 있자 레이넌은 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아멜리아도 함께 듣는 걸로 하지.”
레이넌의 말에 아멜리아를 붙들었던 손에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두 손을 들어 더는 아멜리아를 잡지 않고 있음을 피력했다.
“놨어요.”
“르네 님, 뭔지 모르겠지만…… 대화를 잘 나눠 보세요.”
아멜리아는 미안한 얼굴로 내게 말하고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다시 그녀의 스커트를 붙들고 싶었다.
움직이려는 손을 그 자리에 묶어 두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은 몰랐다.
“적어도 내일쯤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어째서지? 이런 이야기일수록 빨리 정리하는 게 낫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 아직 창피함이 사라지지도 않았는데요.”
울적한 내 목소리를 들은 레이넌은 슬쩍 웃음을 흘렸다.
웃음이 나오는구나. 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나는 한층 더 울적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여 스커트만 만지작거렸다.
“르네.”
“네.”
“일단 얼굴을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네.”
다른 때보다 무거운 고개를 힘겹게 들자 레이넌의 얼굴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의 무겁고 심각한 분위기는 이미 사라진 채였다. 얼굴에 맴도는 미소는 주제가 바뀌었음을 무엇보다 확실히 알려 주었다.
레이넌이 이렇게 나오는 이상 피하는 건 무리였다.
“못 들은 척해 주실 생각은 없으신 거죠?”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정도는 더 매달려 보고 싶었다.
“못 들은 척이라……. 그러고 싶지 않은데.”
“네. 그러면 하다못해 내일로 미루는 걸 한 번쯤 고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일로 미루면 언제까지 미뤄질지 알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이넌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대가 열심히 도망 다닐 게 뻔하지 않나.”
“아니요? 도망 안 치고 제대로 마주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그게 더 마음이 불편할 텐데. 왜 이렇게 그대답지 않게 자꾸 피하려고만 들지?”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 닥치면 피하고 싶을 것 같은데요.”
“그것도 그런가. 어쨌거나 오늘은 여러모로 정신이 없으니 간단하게 말하지. 그리고 자세한 건 이따가 다시 얘기하도록 하고.”
“또 한다고요?”
놀라서 되묻자 레이넌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나를 다시 만날 기회가 생기는 게 그렇게 싫은가?”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창피한 고백이 그의 입에서 결국 다시 나오고 말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레이넌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일단 좋아한다는 것부터 확실히…….”
나에게는 다행히도 레이넌과의 대화는 제대로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노크를 하고 들이닥친 로만 때문이었다.
“공작님, 지금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급한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진심으로 짜증이 난다는 듯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