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만 굴려 내 손을 내려다본 레이넌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내 손을 치우지도 않았고, 말을 하려는 듯한 움직임도 없었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말도 안 되는 부탁이라는 걸 알았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않았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천천히 그의 입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그 자세 그대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멀어지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넌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시간이었다. 겨우 집무실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레이넌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을 올렸다.
“르네?”
나를 붙들려는 것만 같은 그의 모습에 나는 그대로 문을 열고 달리기 시작했다.
“르네 님?”
갑자기 집무실을 뛰쳐나와 달리기 시작하는 나를 보고 세실은 당황했지만 곧 나를 따라잡았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알겠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당장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울고 싶기만 했다.
물론 이 저택에서 그럴 수 있는 공간은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내 방이라는 곳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택을 뛰어다니는 내게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또 무슨 말이 어떻게 돌까. 아주 잠깐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갈 때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 걸려 방에 도착했다. 숨을 몰아쉬며 급하게 방에 들어서니 에린이 화들짝 놀랐다.
침대 정리를 하는 중이었던 듯 그녀는 베개를 들고 있었다.
“나 좀 혼자 있을게. 다들 나가 있어 줘.”
“네. 다만 오늘 에드윈 님과 일정이 있으니…….”
“알았어. 오래 안 걸려.”
세실은 그대로 방을 나가려고 했지만 문제는 에린이었다.
“르네 님, 무슨 일 있으셨어요? 조금만 더 정리하면 되는데…….”
“괜찮아. 정리가 필요한 건 침대가 아니니까.”
단호한 내 말에 에린은 당황했다. 그대로 그녀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세실이 에린을 데리고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없던 일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시녀를 바꿔 달라는 말을 하러 가서 왜 고백을…….”
게다가 그렇게 분위기 없는 고백을 살면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레이넌을 상대로 하게 될 줄도.
아무래도 이제 정말 최선을 다해서 레이넌을 피해 다녀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그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아니 상처 입지 않고 다시금 관계를 재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
“어머니?”
“응. 에드윈, 왜?”
에드윈의 부름에 그를 바라보자 걱정이 담긴 푸른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응? 아니. 왜? 얼굴이 이상해?”
오랜만에 에드윈과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지만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나왔다. 에드윈도 요즘 여러모로 바빠져서 만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에드윈도 기대하고 있었을 시간이었고, 나 역시 기다렸던 시간이라 미룰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심란한 상태라 멍하니 있으니 에드윈의 눈에도 내가 이상해 보인 모양이었다.
“얼굴이 이상하지는 않은데……. 안 좋아 보여요.”
에드윈의 말에 나는 새삼 감동했다. 이럴 때 에드윈은 늘 얼굴이 이상하다고 표현했는데 안 좋다는 표현을 쓰다니.
“그새 많이 컸나 봐.”
“네?”
“에드윈 말이야.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컸어. 어쩌지? 오늘도, 내일도 쑥쑥 클 텐데?”
내 말에 에드윈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리고 어깨를 펴고서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보다 멋진 남자가 될 거예요.”
“응. 분명 그럴 거야.”
하루가 다르게 크는 나이였다. 이렇게나 잘 컸으니 앞으로도 에드윈은 잘 클 것이 분명했다.
과연 에드윈이 어디까지 자리는 걸 볼 수 있을까.
여러모로 심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에드윈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나마 다 잊어버리는 편이 나았다. 에드윈까지 걱정시킬 수는 없었으니까.
에드윈을 바라보며 생긋 웃자 그 역시 나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흐트러진 그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던 그때였다.
“에드윈 님! 르네 님!”
누군가의 다급한 부름이 들려왔다. 그러고는 큰 소리와 함께 시야가 뒤엉켰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바로 알 수 없었다. 다만 온몸이 아프다는 것,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가 아닌 잔디밭에 누워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르네 님!”
“에드윈 님!”
다급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로 날카로운 철제들이 치워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나를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응……. 에드윈은?”
“꼭 안고 계시네요.”
나도 모르게 에드윈을 품에 안은 모양이었다.
“에드윈, 괜찮아?”
나는 에드윈을 얼른 품에서 빼내어 여기저기를 살폈다. 먼지는 묻었지만 눈에 띄는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전 괜찮은데, 어머니가…….”
에드윈이 나를 보고 울먹이며 말했다.
“나? 나 괜찮은데……. 그보다 무슨 일이야?”
“가든 아치가 갑자기 넘어갔어요. 그게 하필 두 분이 앉아 있는 쪽으로요.”
그나마 다행인 건 빈 공간이 우리가 앉은 곳과 맞닿았다는 사실이었다. 갑자기 넘어온 아치 때문에 함께 넘어졌지만 다행히 깔리지는 않았다.
“큰일 날 뻔했네. 진짜 다행이다, 안 다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와는 달리 모두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왜 그래?”
“나중에 따로 말씀드릴게요.”
아멜리아가 조용히 속삭였다. 에드윈이 있는 자리라 말하기 힘든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어머니 치료부터 해요.”
“치료?”
“팔이…….”
에드윈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스커트를 붙들었다.
“팔?”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넘어지면서 바닥에 쓸린 모양이었다. 다행히 잔디밭이라 상처가 심하진 않았지만 팔 전체가 쓸려서 보기엔 꽤 아파 보이긴 했다.
“괜찮아. 아프지 않아. 에드윈이 말해 주기 전까진 알지도 못했는걸?”
“저 때문에 더 다치신 거예요?”
“아니야. 무슨 소리야, 그게.”
내 위로에도 에드윈은 눈물을 끝내 떨어트렸다.
제 탓이라고 우는 에드윈은 너무 애달프면서도 귀여웠다. 눈물을 닦아 주려는데 더러워진 내 손이 눈에 들어왔다.
아멜리아가 눈치 빠르게 손수건을 건넸고, 나는 조심스럽게 에드윈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다행히 에드윈은 오래 울지는 않았다. 나는 눈물이 묻지 않은 면으로 에드윈의 얼굴에 묻은 먼지까지 닦아 내고는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정말이야. 에드윈 때문이 아니야.”
“그래도…….”
“그보다 에드윈이 걱정인데. 팔 움직여 볼까? 다리도? 돌아 볼까?”
에드윈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내가 시키는 대로 모두 했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워서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 시키고 말았다.
“이제 다리를 들어 볼까?”
마지막 요청에 에드윈이 양쪽 발을 차례차례 들어 보이자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다행이네. 아픈 곳은 없는 것 같아서. 그래도 오스틴한테 한번 봐 달라고 하자.”
“네.”
“체이스.”
“네. 제가 모시고 가서 바로 오스틴 님을 부르겠습니다.”
“응. 나중에 진찰 결과 알려 줘.”
“알겠습니다.”
체이스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나는 에드윈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나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같은 자리에서 웃으며 서 있었다.
“르네 님도 일단 가셔서 치료부터 하시죠.”
“진짜 그 정도는 아닌데.”
“죄송합니다.”
괜찮다는 말에 아멜리아는 심각한 얼굴로 내게 사과를 했다.
“아멜리아?”
“르네 님을 보호해야 한다는 제 가장 큰 본분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아니. 일단 고개부터 들고…….”
안절부절못하고 아멜리아의 팔을 붙들었지만 그녀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런 사고까지 아멜리아가 어떻게 막아? 다행히 그 사이로 빠졌잖아.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니까?”
내 말에 아멜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내게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그냥 사고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응?”
“물론 자세히 조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가든 아치가 저렇게 쉽게 넘어갈 리가 없죠.”
“그렇긴 하지만…….”
“특히 르네 님이나 에드윈 님, 공작님이 티타임을 가지는 정원인데 그렇게 소홀히 관리할 리는 더더욱 없고요.”
“그럼 누군가가 나와 에드윈을 노렸다는 거야?”
“일단 방으로 돌아가시죠. 오스틴은 에드윈 님께 갔을 테니 칼슨을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괜찮다고 했지만 아멜리아는 나를 부축했다. 그리고 본 적 없이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게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달려든 것도 아니고 갑자기 구조물이 넘어온 건데 이런 상황을 막지 못했다고 저렇게나 죄책감을 느낄 줄은 몰랐다.
늘 내게 위로가 되어 주고 웃음을 주는 그녀에게 나는 위로 한마디 하지 못했다.
“아멜리아.”
“네, 르네 님.”
“고마워.”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아멜리아는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 오히려 더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이야. 늘 위로도 받고, 아멜리아 덕분에 웃기도 하고…….”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책망할 정도로 나를 걱정해 줘서 정말 고마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그녀는 알아들은 듯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명령으로 르네 님을 모셨지만 지금은 진심이 더 큽니다.”
“알아.”
나는 아멜리아의 마음이 조금은 풀린 것 같아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방에 돌아갔다.
“르네 님? 이게 무슨…….”
먼지를 뒤집어쓴 나를 보고 세실과 에린이 놀라 다가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했다.
아멜리아가 내 앞을 막아선 탓이었다.
“둘 다 나가 있어. 오늘은 내가 르네 님을 모실 테니까 둘 다 쉬도록 해.”
심상치 않은 분위기임을 알아챈 두 사람은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아멜리아는 나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일단 조사는 해 봐야 알겠지만…….”
아멜리아는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방에 다급하게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공작님?”
레이넌의 얼굴은 핏기가 사라진 듯 창백했다. 칼슨이 여기 올 테니 잘됐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 일어나자 레이넌은 얼른 다가와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괜찮나?”
“네.”
“곧 칼슨이 올 겁니다.”
“정말 그 정도는 아닌데……. 저보다 공작님이 더 아프신 것 같은데요. 괜찮으세요?”
“내가 아플 일이 뭐가 있다고.”
“아니에요. 지금 공작님이 먼저 칼슨의 진료를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보다 일단 앉지.”
레이넌은 내가 서 있는 것 자체가 큰일이라는 듯 얼른 나를 소파에 앉혔다.
제가 더 아픈 듯이 다친 팔을 바라보던 레이넌은 내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달리 심한 상처가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한 레이넌은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구두를 벗겨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