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과 에린이 오자 아멜리아는 로만을 만나러 가야 한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때까진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뒤통수에 따끔따끔한 시선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내 머리를 단장해 주던 세실이 슬그머니 상체를 숙여 속삭였다.
“조만간 사고 한 번 치겠는데요?”
살벌한 시선으로 내내 나를 노려보는 에린을 향한 말이었다. 어쩐 일인지 오늘따라 에린은 나에 대한 적개심을 좀처럼 숨기지 못했다.
“응.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네.”
왜 오늘따라 에린까지 저럴까. 내가 에린을 바라보자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자기 기분 나쁘다는 걸 알리고 싶다는 건지, 아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대놓고 보든가.
잘 지냈던 시간은 아주 짧았다. 이제 에린과는 친구라고 하기도 힘든 사이가 되었다.
오히려 에린을 떠올리면 짜증부터 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옛정이든 미운 정이든 모두 상관없는 사이가 되어 버린 듯했다.
“진짜 무슨 일 날까 걱정인데요.”
“걱정 마. 나도 이제 좀 참기 힘드니까. 오늘 공작님께 말씀드려 봐야겠어.”
“잘 생각하셨어요.”
“솔직히 에린이 없어도 문제없을 정도니까.”
내 말에 세실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단장이 끝났는지 뒤로 물러났다.
거울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한숨이 나왔다. 당장 오늘 레이넌을 만날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어제만 해도 예전처럼 대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르네 님.”
“응?”
“얼굴이 갑자기 왜 이렇게 빨개지셨어요?”
“응? 내가?”
레이넌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얼굴이 달아오른 걸까. 모른 척 두 손으로 양 볼을 가렸다.
그런 와중에 에린은 나와 세실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슬금슬금 이쪽으로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으려 애쓰는 모습이 거울을 통해 보였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에린은 화들짝 놀라 원래 있던 자리로 서둘러 돌아갔다.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고 안 보이면 보라는 듯이 노려보고. 어쩌라는 건지.
“하아……. 에린.”
“네, 르네 님.”
내 부름에 에린은 얼굴에 미소를 가득 띤 채 가까이 다가왔다.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대화로 풀어 볼 생각은 없어?”
“무슨 말씀이세요?”
에린은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알았다.
에린은 나와 대화를 할 생각도, 뭐가 됐든 풀어 볼 생각도 없다는 걸.
“아니야. 가서 일 봐.”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니 더는 용건이 없었다. 하지만 내 말에 에린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내 팔을 붙들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그럼 말씀을 해 주세요. 뭐든 고칠게요.”
얘가 또 왜 이래. 갑자기 바뀐 태도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쫓겨나면 저는 어떻게 해요.”
누군가가 보고 있나.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에린의 태도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세실 역시 황당하다는 얼굴로 에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작님께 다녀올게. 에린은 여기 있어. 세실이랑 다녀오면 되니까.”
“흑……. 네.”
다른 때였다면 세실만 데려간다고 심통 난 표정을 지어 보였을 에린이었다.
더욱이 조금 전처럼 이상한 행동을 했다면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더 매달려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에린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반가운 듯이 아주 짧은 순간 기쁜 내색을 비쳤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에린의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을 나섰다. 세실 역시 방을 나오자마자 뒤들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죠?”
“그러게.”
레이넌의 집무실로 향하는 걸음은 다른 때보다 훨씬 느렸다.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내가 이상하다고 여길 법도 한데 세실은 아무 말 없이 보조를 맞췄다.
최대한 늦게 도착하고 싶었지만, 어쨌건 도착지가 있는 이상 마냥 걸을 수는 없었다.
어느새 레이넌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나는 일단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오늘따라 비장하시네요.”
나를 보고 세실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세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 올게.”
“네.”
혹시 바빠서 못 보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아주 작은 기대를 품어 봤다. 하지만 기대는 기대일 뿐이었다.
레이넌은 집무실에 있었다. 아멜리아가 로만과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짐작한 바였지만 역시 레이넌은 혼자였다.
나를 보고 그는 어떤 인사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인사보다 먼저 건넨 건 미소였다
반가움이 가득 묻어나는 미소에 나는 긴장도 잊고 그와 함께 미소 지었다.
“일단 앉지. 차라도 내어오라고 할까?”
“아, 아뇨. 바쁘실 텐데 얼른 말씀드리고 일어날게요.”
“그렇게 바쁘진 않은데…….”
내가 앉는 걸 확인하고 소파에 앉는 레이넌의 얼굴엔 어쩐지 실망스러움이 내려앉아 있었다.
“용건이 있어 온 거로군.”
“아, 네.”
내 대답에 그는 조금 전보다 더 낙담한 듯한 얼굴을 했다. 곧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실망이 꽤 컸는지 감정을 깨끗하게 숨기지는 못했다.
이야기를 바로 시작하는 게 맞았지만 레이넌의 저런 표정을 보니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뭔가 실수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레이넌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어색하게 웃고는 눈만 다른 곳으로 굴렸다.
“이제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그 말을 들은 게 불과 몇 시간 전인 것 같은데.”
“하하하. 그랬죠, 제가…….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것 같은데.”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다행히 레이넌은 내 말에 동조했다.
“그래. 마냥 피해 다니던 때보다 낫긴 하군.”
동조인지, 혹은 질책인지 조금 헷갈리는 말이기도 했다.
“어제 찬 바닥에 너무 오래 앉아 계셨잖아요. 몸은 괜찮으세요?”
“나야 그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지내봤으니 문제 될 것 없는데 그대야말로 괜찮나?”
“아, 몸이 조금 굳기는 했는데 아멜리아가 마사지를 해 줘서 이제 괜찮아요.”
“다행이군. 아멜리아가 못 하는 게 없어서 이럴 땐 참 편하단 말이지.”
“그러게요.”
정말 아멜리아 한 사람만 있으면 웬만한 일은 다 해결이 되곤 했다. 그가 말한 편하다는 의미가 뭘 뜻하는지 알 것 같아 웃다가 레이넌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 버리고 말았지만.
순간 레이넌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와서 그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돌렸다.
“그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조금이지만 기다리겠다는 말도 진심이었고.”
“네.”
“나는 그대가 다시 나를 피해 다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설마요. 아니에요. 저도 어제 진심……이었는데요.”
레이넌과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나를 보고 거보라는 듯 레이넌은 웃었다.
“르네.”
“네.”
“강요할 생각은 없어. 그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아.”
“네.”
“하지만 지금 이 상태인 것도 나는 불편하군.”
“그렇죠…….”
“이유를 알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지 않겠나?”
“딱히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러면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피해 다니고 눈도 못 마주치는 채로 지내겠다는 건가.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소재를 던져 주고 싶은 건 아닐 텐데.”
“그럼요. 그것만은 피해야죠.”
“그래. 그러니까 말해 봐. 뭐가 무제지?”
“문제는 없는데요. 정말이에요.”
“그럼 뭐든 고쳐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말해 봐.”
“그런 것도 없어요. 정말 그냥…….”
“그냥?”
“하아……. 뭐라고 하지. 그냥 제가…….”
“지쳐서, 힘들어서, 갑자기 실감이 나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처음에야 그럴듯했지만, 그대가 그런 이유로 그렇게 오래 끙끙댈 성격이 아닌 걸 나도 아는데.”
이제 안 통하는구나. 한 번 더 써먹어 볼까 했지만 입 밖으로 내어 보지도 못하고 차단됐다.
“게다가 그게 나만 피할 이유가 되진 않지.”
“……그렇죠.”
“계속 이대로 지내겠다는 건 아니지?”
“네. 정말 괜찮아질 거예요. 이제 안 피해요.”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당장 어제 그대가 그러지 않았던가. 오늘부턴 예전처럼 지낼 수 있다고.”
“그거야 시간이 좀…….”
“그러니까 그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대도 모르니 이유라도 알자는 말이야. 그래야 해결책을 찾지.”
강요할 생각 없다면서요. 부담 주고 싶지 않다면서요.
그 말이 무색하게 레이넌은 조곤조곤 질문을 쏟아 냈다.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대답을 했다 싶으면 또 다른 질문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생각을 할 틈도, 말을 포장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허둥지둥 대답만 하기에도 바빴다.
그간 쌓인 게 이렇게 많았나. 그럴 거면 왜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부담 주기 싫다고 밑밥을 깔았어요?
내가 반대로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유를 알아도 해결책은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이유를 아는데 어떻게 해결책을 찾기가 어렵지? 이해할 수가 없군.”
“그게…… 그럴 만한 일도 있지 않을까요?”
“이유를 알면 어떤 식으로든 당연히 여러 방법을 찾아볼 수 있지 않겠나. 여러 사람이 함께 생각하면 답도 여러 개가 나오는 법이지.”
“아니, 제가 공작님을 좋아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데 이걸 어떻게 해결하시겠다는 거예요?”
내 질문에 드디어 레이넌의 입이 꾹 닫혔다. 쉴 새 없이 몰아치던 질문이 멈추자 나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보세요. 해결책이…….”
나는 아무 말 없이 굳은 채로 나를 바라보는 레이넌에게 거보란 듯이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하게 딱딱하게 굳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제가 지금 뭐라고 했죠?”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그도 나도 잠시 눈만 깜빡이며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먼저 움직인 건 나였다.
천천히 입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뒤늦게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야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왜 이렇게 됐지? 아니, 그보다 못 들었을 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레이넌을 보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못 들었을 리가 없는 얼굴이었다.
일단 이럴 때는 도망인데……. 발이 절로 뒤로 빠지려고 할 때 레이넌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보다 내 손이 더 빨랐다. 내 입을 막기엔 늦었지만 다행히 레이넌의 입은 막을 수 있었다.
“아니에요. 말씀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