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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89)화 (89/129)

요즘 레이넌은 좋은 기분을 느껴 본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중에 오늘은 아마 최악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을지도 몰랐다.

로만과 르네가 다정하게 붙어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둘이 뭔가 비밀을 나눌 일도 없고 그렇다고 마음을 나눌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레이넌 자신이었다. 잘 아는데 왜 짜증이 나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짜증의 대상은 비단 로만만이 아니었다. 벨라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도 무례하고 귀찮기 그지없는 여자였는데 오늘따라 유독 짜증을 돋우기까지 했다.

갑자기 찾아온 것도, 아니 그보다 누구 마음대로 르네를 불러낸단 말인가.

“감히 르네를 깔보기까지 했으니…….”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것뿐이었고 짜증 나는 일투성이였다.

“짜증이라.”

레이넌에겐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가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보통은 짜증보다는 화나 귀찮음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기 때문일까. 뭔가 안에서 부글부글하고 속도 괜히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 르네의 얼굴은 또 계속 떠올라 혼란스러웠다.

오랜만에 저에게 와 닿던 곧은 눈빛과 웃으며 벨라에게 대응하던 흐뭇한 모습까지…….

짜증과 만족을 쉴 새 없이 되풀이하던 레이넌은 결국 밤이 찾아오자 르네에게로 향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의 방문 앞에서 레이넌은 한참을 망설였다. 누군가를 찾기에 늦은 시각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방문으로 르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되어서였다.

오늘처럼 심란한 날에 르네의 솔직한 반응을 마주하면 제 마음이 어떨지 알 수 없었다. 혹여 르네에게 화라도 내면 어쩔까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르네의 방문 앞을 맴돌던 레이넌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문에 닿기 직전 레이넌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곧 그는 숨을 들이쉬고는 방문을 두드렸다.

역시나 르네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심지어 문도 열지 않았다. 쉽게 열지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정작 그런 일이 일어나니 마음이 허했다.

하지만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다는 걸 곧 확인할 수 있었다.

한동안 레이넌을 바로 보려고 하기는커녕 도망을 다니기 바빴던 르네였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긴장해서 딱딱한 목소리를 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풀어졌다.

늘 그랬듯 르네는 금세 뭔가 조잘조잘 열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익숙하면서도 어색했다. 이런 르네가 당연했는데…….

“문득 이런 것들이 그리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군.”

나무 문을 통해 몸을 울리던 그녀의 목소리는 잦아든 지 오래였다. 조금씩 느려지던 목소리는 곧 규칙적인 숨소리로 바뀌었다.

“언제쯤 다시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올 건가.”

잠든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레이넌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직접 말할 수는 없었다. 예전엔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이 꽤 귀여웠지만 지금은 씁쓸했다.

일어나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주변이 밝아 오기 시작할 무렵까지 레이넌은 자리를 지켰다.

맨바닥에 한참 앉아 있게 한 데다가 그대로 잠들게 한 게 뒤늦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엔 문 앞에 푹신하고 따뜻한 걸로 뭐든 깔아 놓으라고 해야겠군.”

레이넌은 밤을 새웠지만 어느 때보다 가벼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누구든 르네를 찾아올 시간이니 아쉽지만 떠날 때였다.

레이넌은 오랜만에 르네와 시간을 보낸 덕에 가벼운 걸음으로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복도에 앉아 밤새우셨다더니, 전혀 피곤해 보이지 않으십니다?”

로만은 집무실 앞에서 레이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보자마자 싱글거리며 말을 걸어 왔다.

“아침부터 신났군.”

“바닥에 그냥 앉으셨다면서요? 저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그 상태로 밤까지 지새우시다니……. 직접 보지 못한 게 너무 아쉽습니다.”

로만은 모처럼 레이넌을 놀릴 거리를 찾았다는 듯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레이넌의 기분이 어떤지 로만만큼 파악하는 사람이 없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레이넌은 아무 말 없이 그의 말을 웃어넘겼다.

“확실히 기분이 굉장히 좋으시네요.”

“그래.”

로만이 문을 열어 주며 말하자 레이넌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집무실에 한 발 들이고서는 뒤로 돌았다.

“하지만 이 기분이 너 때문에 망가진다면…….”

“적당히 하겠습니다.”

로만 역시 오랜만에 레이넌의 좋은 기분이 망쳐지는 걸 바라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하자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들어와.”

보통 레이넌은 책상에 자리하고 로만은 그 앞에서 보고를 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집무실에 들어선 두 사람은 곧장 소파로 향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았고, 그러고도 한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앞뒤 없이 던져진 레이넌의 질문이었지만 로만은 뭘 말하는지 한 번에 알아들었다.

“벨라도 접근해 왔습니다. 저희가 찾던 걸 주겠다고 하던데요.”

“우리가 찾던 걸?”

“정확하게는 어디 있는지 알려 주겠다고 합니다.”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생각에 잠겨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의 손가락이 규칙적으로 내려앉는 소리를 들으며 로만은 말을 이어 갔다.

“어디 있는지는 알지만 자기는 빼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벨라는 어디 있는지 알려 주고, 너는 그걸 빼내고?”

“네. 반으로 나누자고 하던데요. 슈나이더에게 배신당할 경우를 대비할 거랍니다.”

“그래. 둘 다 어떻게든 서로의 약점을 최대한 쥐고 있으려고 하겠지.”

“일이 잘 풀린 후에도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로만의 말에 레이넌의 얼굴엔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러고도 남지. 그래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모호합니다. 공작님께 전달되기를 바라고 한 말인지, 혹은 그럴 리 없다고 굳게 믿은 건지…….”

“슈나이더와 벨라가 그렇게 탄탄한 관계가 아닌 건 확실한데……. 만약 이쪽을 떠보려고 하는 거라면 왜? 그럴 이유가 있나?”

“없지요. 게다가 굳이 그 서류를 미끼로 내밀면서 유인할 이유는 더욱이 없습니다.”

“그렇지. 근데 왜 뭔가 찝찝하지.”

“아, 그러고 보니 이걸 주던데요?”

로만은 벨라가 준 반지를 꺼냈다. 그게 뭔지 레이넌은 바로 알아본 듯했다.

“이걸 줬다고?”

“네.”

“이건 단 하나 있고, 또 벨라의 것임이 분명한 물건인데 이걸 네게 줬다고?”

“네.”

“더 모르겠군. 일단 슈나이더는 준비를 거의 다 한 모양인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얼핏 언질을 주더군요.”

“그래.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다는 이야기기도 하지. 일단 바라는 대로 미끼를 무는 게 좋겠어. 벨라에게 그게 어디 있는지 알려 달라고 해.”

“알겠습니다.”

“그럼 마빈은 어떻게 할까…….”

“아직은 두시죠. 벨라와 경쟁이 붙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아는 게 없다고 해도 뭔가 흘려 줄지도 모르고, 벨라와 연락할 수단이기도 합니다.”

“좋아. 대신 에린은 이제 정리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슈나이더가 준비를 거의 다 했다면 우리도 다시 점검해야겠군. 폐하께 알현 신청을 하도록 해. 명분은…… 결혼 허가가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러면 르네 님도 동행하십니까?”

“로에리안저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 편이 나아. 아멜리아에게 철저히 지키라고 해. 아무래도 이제 슬슬 르네에게도 손을 대려는 것 같으니.”

“르네 님께요?”

“그래, 명심하도록 해.”

“네.”

언젠가는 르네에게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벌써 위협이 눈앞까지 다가왔다는 사실에 로만은 조금 놀란 듯했다.

레이넌의 명에 로만은 짧은 대답을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

“르네 님?”

몸이 기우뚱하더니 털썩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눈을 떠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뭔가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는데 잠기운이 그를 이겼다. 다시금 눈이 감기는데 누군가가 내 몸을 흔들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계세요?”

“아멜리아?”

나는 졸린 눈을 끔뻑끔뻑했다. 뿌연 시야가 맑아지니 전혀 본 적 없는 광경이 눈앞에 있었다.

뭐지, 이 각도는…….

“르네 님?”

아멜리아의 부름에 눈이 번쩍 뜨였다. 벌떡 일어나 앉으니 어제 앉아 있던 그대로 몸만 넘어간 듯했다.

“나 여기서 잤나?”

“제가 묻고 싶은데요…….”

언제부터 잤지?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멜리아 말고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같은 자세로 오래 있어서일까, 차가운 바닥에 오래 앉아 있었던 탓일까.

“아아아…….”

“오랜만에 마사지라도 해 드려야겠네요. 아니, 왜 여기서 주무시고 계세요?”

“아, 아니야. 혹시 밖에…… 누구 없었어?”

“누구? 누구를 말씀하시는 걸까요?”

“응? 아무도 없었으면 됐어.”

내 반응에 아멜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질문을 시작했다.

“누군데요? 왜 그러고 계셨어요? 밤새 그렇게 계신 거예요?”

“아니야.”

재빨리 그녀에게서 멀어지고 싶었지만 굳은 몸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아멜리아는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레이넌은 진작 돌아간 모양이었다.

나는 아멜리아의 부름을 못 들은 척하고 얼른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잘 자.”

시야가 어두워지자 어렴풋이 레이넌의 인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기도 했다.

잠들 때까지 그러고 있었던 건가.

어젠 호기롭게 평소처럼 대하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자신이 없어졌다.

어둠 속에 있으니 괜히 어젯밤의 일이 계속 생각나는 것 같아 다시 이불 밖으로 나왔다.

“어머, 르네 님. 얼굴이 무척 빨개지셨는데요? 도대체 누굴 생각하셨길래요?”

“생각은 무슨. 저기서 잠든 게 창피해서 그렇지.”

“으흥. 그러시구나. 일단 엎드려 보세요. 간단하게라도 마사지를 받으시는 게 나을 거예요.”

“고마워.”

이제 놀리는 건 끝인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아멜리아에게 몸을 맡겼다.

춥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몸은 꽤 많이 굳어 있었다.

레이넌은 괜찮을까. 그도 내내 앉아 있었을 텐데…….

“르네 님.”

“응.”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지고 있어요.”

아멜리아는 덤덤하게 내 얼굴 상태에 대해 알려 줬다.

“계속 이러진 않겠지…….”

변명하기도 지친 나는 힘없이 말했다. 어차피 아멜리아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굳이 힘 빼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럼요. 너무 걱정 마세요.”

축 처진 내가 불쌍해 보였던 걸까. 한 번쯤 더 놀릴 줄 알았던 아멜리아는 상냥한 목소리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건지 말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으니.

어제 레이넌도 그러지 않았던가. 자신이 편이 되어 줄 테니 당당하게 그의 약혼녀로 지내라고.

“그럼 뭐 해. 제일 중요한 게…….”

“네?”

“아니야.”

제일 중요한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걸.

이 말은 속으로 꾹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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