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크라우스 아가씨께서 가지고 오신 건 뭘까요? 이 정도로 자신만만하신 걸 보니 절로 기대가 큽니다.”
“로에리안 공작이 지금 찾고 있는 것.”
“공작님이 찾고 계신 것?”
로만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짐작 가는 것이 없는 듯한 표정을 보고 벨라는 가소롭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시치미 떼기는. 슈나이더가 빼돌린 돈, 그리고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그게 명확하게 남겨져 있을 서류.”
“…….”
“슈나이더를 확실히 무너뜨릴 수 있는 그의 약점.”
벨라의 담담한 목소리에 로만의 얼굴에 드리웠던 웃음기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진지해진 건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벨라는 어쩐지 그런 로만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 내 이야기가 제대로 들리는 모양이야?”
“그걸 주시겠다고요? 로에리안 공작님 손에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는데요?”
“주겠다고는 안 했어. 그리고 그게 로에리안 손에 들어가게 될지 어떨지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떠보시는 겁니까?”
“글쎄. 네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내겐 대책이 있다는 이야기지.”
“대책이라…….”
“어쨌거나 너희가 찾는 게 어디 있는지 내가 알아. 어떻게 할래?”
“어디 있는지 안다고요? 가지고 계신 게 아니군요.”
“내가 빼낼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게 관리할 리가. 게다가 그랬다면 굳이 너를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겠지?”
“그것도 그렇지요…….”
“뭔가 껄끄러운 것 같은데?”
“마빈이 뭐라고 말을 전하던가요?”
로만의 질문에 벨라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나야 모르지. 내가 아는 건 그가 너와의 협상 여지를 얻어 왔다는 것 정도? 나는 그걸 이용하려는 거고.”
“그래서 직접 저에게 접촉하시는 거라고요?”
“그래. 어쨌든 너도 뭔가 믿을 구석은 필요할 것 아냐. 난 돈만 쥐여 주면 전부인 줄 아는 슈나이더와는 달라. 하여간 그 인간은 돈밖에 모른다니까.”
벨라는 평소대로 투덜거렸지만 그 속엔 여러 정보가 담겨 있었다.
그녀도 슈나이더를 온전히 믿지 않는다는 것, 돈만으로 로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그녀에게는 로만과 벨라의 안전을 함께 보호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제가 아무래도 벨라 님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해.”
벨라는 로만의 말을 작게 되뇌고는 웃었다.
“철없고, 생각은 더 없고 할 줄 아는 건 없는, 예쁜 얼굴과 든든한 집안만 믿고 응석만 부리는 아가씨라고 생각했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치고 들어오는 대담함이 있으실 줄이야.”
“파트너로는 나쁘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할래?”
“저더러 그 서류를 빼내 오라는 겁니까?”
“그래. 나는 어디 있는지 알지만 빼낼 방법이 없어. 하지만 넌 반대잖아.”
“저라도 슈나이더가에, 그것도 벨라 님도 접근 못 할 만큼 엄중히 관리되는 곳에 사람을 보낼 능력은 안 됩니다만.”
“겸손은.”
벨라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로만의 말을 비웃었다.
“그걸 얻으면 반씩 나눠 가지는 걸로 하지. 어차피 너도, 나도 그 서류의 반이면 각자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하는 셈이니.”
“음…….”
로만은 벨라를 빤히 바라보며 턱을 쓸었다. 꽤 구미가 당기긴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잡을 만한 손이 아니긴 했다.
“확실히 벨라 님의 말씀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저도 고민스럽습니다.”
“믿어? 새삼스러운 말을. 너도, 나도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지. 잘 재 보도록 해. 조만간 마빈을 통해 소식을 전하지.”
“알겠습니다.”
“대신.”
“네.”
“이쪽으로 넘어올 때 이건 꼭 언급해 줬으면 좋겠는데?”
“뭘 말씀이십니까?”
“내 설득이 너를 움직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아아, 슈나이더 공작님의 약점을 내어준다고 하셨으니 틀린 말은 아니군요.”
로만은 금세 싱글거리는 얼굴로 벨라에게 말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본 벨라는 짜증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농담입니다. 하신 말씀은 잘 새겨들었으니 염려 마시죠.”
“이건 선물.”
그녀는 제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 하나를 빼내어 로만의 손에 쥐여 줬다.
“이건…….”
크라우스가의 문양이 새겨진 반지는 금액을 뛰어넘는 가치를 품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걸 기념해서 아버지가 선물한 반지야.”
심지어 로만이 예상한 것보다 더 큰 가치를 품고 있었다. 놀란 로만이 반지를 도로 돌려주려고 다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벨라는 반지를 되돌려받는 대신 팔짱을 꼈다.
“이 정도로 내가 진심이라는 거야.”
“이제까지 본 어떤 것보다 확실하네요.”
“빨리 결정하는 편이 좋을 거야.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기회는 날아가 버릴 테니까.”
“……얼마 남지 않았단 말씀이로군요.”
“역시. 말이 잘 통하니 좋아. 슈나이더도 직접 만났다면 아마 제안한 것 이상을 주려고 했을 테지.”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럼 다음 기회에 또 뵙지요.”
로만은 그녀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네고는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팔짱을 끼고 로만을 지켜보던 벨라는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지금 하셨던 모든 이야기를 제가 로에리안 공작님께 그대로 전달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전달하려고?”
벨라는 상체를 숙인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까지 소리를 낮춰 이야기했던 것과는 달랐다.
이번만큼은 참기가 어렵다는 듯 흥미로움이 가득 담긴 웃음소리가 주변을 울렸다.
“그럴 거였으면 이런 질문도 안 했겠지.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그에게 하면? 로에리안이 얻어 갈 수 있는 건 뭐지?”
“제가 서류가 있는 장소만 알아내고 넘어가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대비도 없이 접근했을까? 슈나이더도, 나도.”
“대비…….”
“그래. 무엇보다 슈나이더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꽤 혹할 만하지 않나? 나도 듣고 놀랄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너무 후하셔서 오히려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였죠.”
“그게 참 의외였단 말이야.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긴 합니다.”
벨라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천천히 로만을 위아래로 훑었다.
“슈나이더는 널 정말 손에 넣고 싶은 모양이야? 그 쪼잔한 인간이 그렇게나 내어준다니. 뭐, 그러니 나 역시 대비책으로 두기엔 너만 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러고 있잖아.”
“그래서 직접 저에게 이런 제안을 하시는 거다? 물론 슈나이더 공작님 모르게?”
“사실 꽤 고민했거든. 그리 내키지 않았단 말이야. 돈에 쉽게 흔들리는 사람만큼 못 미더운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제안을 주셨네요.”
“오늘 얘기해 보고 마음이 조금 바뀌었지.”
“이제 조금은 내키십니까?”
“반지까지 줄 정도로? 돈에는 솔직한데 속내는 참 잘 숨기는 게 마음에 들어서 말이야.”
벨라는 그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여기가 어디인 줄 아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는 걷는 걸까.
무엇보다 벨라는 혼자서 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안내해야 할 누군가가 분명 있었을 텐데…….
“사용인 관리를 꽤 잘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구멍이 이렇게나 많을 줄이야.”
걱정스러운 내용과는 달리 로만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 끝에는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벨라를 노려보는 마빈이 있었다.
도도하게 걸음을 걷는 벨라의 시선 역시 그쪽을 향한 걸 보면 그녀 역시 마빈의 존재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빤히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멀리서도 마빈이 화가 난 듯 몸을 떠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힘들게 쌓은 제 공을 빼앗길 거라 생각하는 거겠지.”
로만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금세 시선을 돌렸다. 시큰둥한 얼굴과 달리 돌아가는 걸음은 제법 바빴다.
응접실 가까이에 다다랐을 무렵 멍하니 걷고 있는 르네가 보였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그녀를 안내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놀란 마음에 로만은 얼른 르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혼자 다니지 마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는데……. 왜 그러십니까?”
가까이에서 보니 르네의 얼굴은 멍한 것만이 아니었다. 뺨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은 혼란스러운 듯 흔들리고 있었다.
로만이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지만 여전히 르네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르네 님?”
로만의 의아한 부름이 있고서야 르네는 그제야 그를 알아차린 듯 화들짝 놀랐다.
“로만?”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르네는 놀란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저기서 천천히 다가왔습니다. 물론 몇 번이고 말도 걸었습니다.”
“아……. 그, 그랬구나.”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르네는 얼른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못 들으신 것 같아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렇게 혼자 다니시면 안 됩니다.”
“응.”
르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과연 제대로 알아듣기는 한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로만은 대신 다른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이렇게 르네와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흔치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떠볼 수 있는 기회였다.
로만은 일단 주변을 살폈다. 근처에 지나는 사람이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소리를 죽여 그녀에게 물었다.
“계약이 끝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로만의 질문에 르네는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 반응에 로만은 후회를 느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물어볼 걸 그랬다. 어느 부분에서 르네가 반응한 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음……. 처음 말했던 대로 1년 안에 끝날까?”
르네는 로만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요…….”
로만은 일부러 턱을 쓸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가 말을 할 듯 말 듯 시간을 끌자 르네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더 길어졌으면 하시는군요.”
“응? 아니, 꽤 큰일 같은데 1년 안에 해결이 될까 싶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했는데 여기 남는 것도 이상해질 것 같은데……. 그러네. 파혼을 하고 다시 여기에 남는 것도 이상하겠네.”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던 르네는 스스로 뭔가에 대한 답을 찾은 듯 보였다.
르네는 그 결론이 그리 달갑지 않은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르네 님?”
“질문이 뭐였지? 아, 1년보다 더 길어졌으면 하냐고?”
“네.”
“……모르겠어.”
르네는 조금 전보다 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고민이 가득한 르네의 얼굴을 보고 로만은 다시 없을 기회가 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지금이 아니면 르네의 마음을 떠볼 틈은 물론 솔직한 그녀의 생각을 들을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신 것 같은데요.”
다른 때보다 로만의 목소리가 나긋해진 것도 깨닫지 못하고 르네는 입을 달싹였다.
말할 것처럼 굴어 놓고 좀처럼 제대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 르네를 기다리다 못한 로만이 더 부드럽게 그녀를 다독였다.
“원래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정리가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말씀해 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