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주고받았죠. 그런 걸 계약이라고 표현해도 될까요?”
르네는 레이넌을 올려다보며 벨라에게 답했다. 레이넌 역시 그윽한 눈으로 르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시선을 마주하던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살포시 접힌 순간 벨라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마음? 재밌네요.”
그녀의 목소리에 레이넌은 불쾌한 듯 헛기침을 뱉어 냈다. 얼른 그녀가 자리를 떠나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역력히 드러나는 행동이었다.
아니면 자신이라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어쩐 일인지 르네가 생글생글 웃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레이넌 역시 이런저런 충동을 꾹 눌러 담고 르네의 옆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르네, 님이야 그렇다고 쳐도, 로에리안 공작님이 마음, 사랑, 이런 것들로 미래를 결정하신다고요?”
벨라는 르네의 이름 뒤에 ‘님’ 자를 붙이기 전에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벨라.”
하지만 르네의 담담한 부름에 벨라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사라졌다.
“공작님에 대해 잘 알 정도로 가까우신 줄 미처 몰랐네요.”
“가깝기는 무슨.”
벨라를 향한 말에 레이넌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대꾸했다.
한결같이 벨라를 적대하는 레이넌의 태도에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다만 조금씩 그녀의 미소는 무너지고 있었다.
입매가 굳기도, 파르르 떨리기도 했지만 벨라는 금세 고운 미소를 되찾고는 입을 열었다.
“가깝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도 있지요.”
“생각보다 제법 경솔하시네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그게 전부라고 판단하시다니.”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라고 생각하세요?”
“그거야 제가 더 잘 알겠죠? 이런 시시한 잡담이나 나누자고 여기까지 오시다니요. 다음엔 공작님이 아니라 제게 약속을 청하세요.”
르네의 말에 벨라의 얼굴이 조금씩 굳었다. 아니, 일그러졌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어울릴지도 몰랐다.
그런 벨라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 르네는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물론 저도 바쁘지만 벨라, 님과 이런 담소를 나누는 것도 꽤 재밌긴 하네요.”
벨라가 그랬듯 르네 역시 그녀의 이름 뒤에 ‘님’ 자를 붙이기 전 시간을 끌었다.
레이넌은 흐뭇한 얼굴로 르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넌과 르네를 번갈아 보던 벨라는 뭔가 마음을 먹은 듯 숨을 들이쉬었다.
“설마 이렇게 시시한 잡담이나 나누자고 왔을까 봐요.”
금세 여유를 찾은 듯한 벨라를 보고는 레이넌은 몸을 뒤로 기댔다.
“이제야 본론이군.”
“슈나이더 공작님께서 궁금해하시더라고요.”
“뭘?”
“에린을 왜 그냥 두시는지?”
뻔뻔한 그녀의 질문에 레이넌과 르네는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같았다. 황당함이었다.
“그걸 물어보려고 그대를 여기에 보냈다고? 슈나이더 공작이?”
“뭐……. 사실 슈나이더 공작님은 여전히 에린이 잘 지내고 있다니 이래저래 다시 써먹을 생각이 드는 모양이더라고요.”
누구도 믿지 않을 말이었다. 아주 작은 성의조차 담기지 않은 거짓말에 레이넌은 차게 웃었다.
“그래서? 말실수는 본인이 했으나 처리는 이쪽에서 하라?”
“어머,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나요?”
벨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제 입으로 제 사람이라고 말실수는 했는데 내가 가만히 두고만 보는 게 불안하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 얼른 처리하라고 재촉하려고 그대를 보냈나 보지?”
“설마요. 이렇게 사랑스러운 르네 님의 안위를 무척이나 염려하고 계신답니다.”
“염려…….”
잠시 나직하게 벨라의 말을 되뇌던 레이넌은 이윽고 웃음을 터트렸다. 공기를 상쾌하게 울린 웃음소리의 끝엔 근사한 미소가 남았다.
그윽한 시선이 벨라에게 닿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나의 르네를 걱정해서 일부러 그대를 보냈다고?”
이번엔 레이넌의 곁에 있던 르네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런 르네를 바라보고 있던 레이넌은 가려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녀의 뺨을 두 손으로 품었다.
“제법 한가한 모양이야. 슈나이더 공작도, 그대도.”
르네를 바라보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한 탓에 누구를 향한 이야기인지 벨라는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뒤늦게 이해하고 입을 열려는 찰나 레이넌이 선수를 쳤다.
“일단 고맙다고 전달하게.”
전혀 고맙지 않은 말투였다. 아니, 말투의 문제가 아니었다. 레이넌은 이미 벨라를 이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취급을 했다.
“저는 이미 방해꾼이네요. 말씀은 잘 전달해 드리지요.”
그녀의 차가운 마지막 인사는 두 사람에게 도달하지 못했다.
서로를 빤히 바라보는 레이넌과 르네는 말은 없었지만 시선으로 뭔가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철저히 무시당한 벨라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감정을 알려 주는 건 오직 손뿐이었다.
들어왔을 때처럼 벨라는 도도하게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응접실에 둘만 남고도 한동안 그대로 멈춰 있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르네였다.
“고, 공작님.”
“그래.”
“손 좀…….”
아주 작은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숨소리와 같이 들린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레이넌은 모른 척 그녀에게 다가갔다.
“잘 안 들리는데?”
순식간에 다가온 레이넌의 얼굴에 르네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뭐라고?”
레이넌은 당황한 르네의 얼굴을 보고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더욱더 다가왔다.
“손 좀 떼 주시겠어요?”
르네는 결국 목소리를 높여 레이넌에게 말했다.
“아, 아직 그대를 붙들고 있었군.”
레이넌은 금방이라도 르네를 놓아주려는 듯 말했지만 행동은 달랐다. 붙들고 있었을 뿐이었던 손은 천천히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놓아주시겠어요?”
“음…….”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는 얼굴을 한 채로 레이넌은 아주 천천히 손을 뗐다.
그녀에게서 떨어지는 것이 아쉽다는 듯 손가락 하나하나가 아주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마지막 손가락이 르네의 볼을 떠나는 순간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저도 이만…….”
레이넌이 잡을 틈도 없이 르네는 뛰는 듯한 걸음으로 응접실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그녀를 붙들어 보려던 레이넌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공중에 뜬 채 갈 곳을 잃은 손을 잠시 허탈하게 바라보던 레이넌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랑스러운 르네 님의 안위를 무척이나 염려한다고? 재밌군. 대놓고 르네를 노리겠다고 선전 포고할 줄은 몰랐는데.”
레이넌은 그대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슈나이더의 행동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패턴이었다. 무엇을 하든 모른 척, 최대한 은밀히 진행해 오던 그였다.
“준비를 거의 다 했다는 뜻인가.”
슈나이더는 오래도록 로에리안을 없앨 준비를 해 왔다. 이번 슈나이더 공작의 경우는 그보다 더 큰 목표가 있었다.
그런 슈나이더를 되받아치기 위해 레이넌 역시 오랜 준비를 해 왔다.
“하지만 아직 부족한 게 있는데……. 곤란하군.”
잠시 벨라의 말을 통해 슈나이더의 속내를 짐작해 보던 레이넌은 곧 소파에 몸을 깊이 기댔다.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엔 또 다른 근심이 담겨 있었다. 무거운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오랜만에 겨우 마주 보나 싶었더니 금세 빠져나가 버렸군.”
그는 천천히 두 손을 위로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꼭 르네와 같았다. 분명 제 손으로 품었는데 이렇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잡을 수도 없이.
하지만 그녀의 온기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따뜻하고도 부드러운 감촉 역시.
주먹을 쥐어 봤지만 잡히는 건 없었다. 레이넌은 빈 주먹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자신을 바라보던 르네의 맑은 눈빛이, 당황해서 커진 눈이, 순식간에 붉어지던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왜지?”
레이넌은 자리를 벌떡 박차고 일어났다. 손에서는 그녀의 감촉이, 머릿속에서는 그녀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벨라에게서 말도 안 되는 도발이나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짜증이 치솟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르네의 목소리에 금방 짜증은 사라졌다.
웃는 얼굴로 또박또박 제 할 말을 하는 르네의 모습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평생을 누구에게서 무시당할 일도 없었고, 오히려 깔보며 살아왔던 벨라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보다 우위였을지도.
레이넌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레이넌은 알지 못했다.
그저 잠시 제 손에 들어왔던 르네의 감촉을 떠올리고는 유난히 아쉬운 이유를 찾아보려고 고민할 뿐이었다.
***
“어머, 나를 기다린 걸까?”
응접실을 나선 벨라의 눈에 들어온 건 로만이었다. 그녀는 망설임도 없이 그에게 다가가서 생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럴 리가요. 르네 님이 나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벨라의 농담과도 같은 당당한 말에도 로만은 표정 하나 흐트러짐 없었다. 그저 무미건조하고도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런 로만의 반응이 꽤 재밌었는지 벨라는 작게 소리를 내어 웃고는 그에게 팔짱을 꼈다.
“잠시 이야기 좀 하지.”
로만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벨라를 따라 걸었다. 딱히 그녀를 말리거나 거절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런 로만의 태도에 벨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의 팔을 손으로 슬쩍 쓸며 말했다.
“슈나이더 공작님이 무척이나 탐내는 인재라 나도 한 번쯤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거든.”
“저를 이렇게나 절실히 찾아 주시는 분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울 정도군요.”
“그만큼 네 능력이 출중하다는 뜻이겠지. 사실 지금의 로에리안 공작님도 네가 없었다면 진작에 슈나이더 공작님께 당했을 거란 이야기도 많으니까.”
벨라의 말에 로만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런 로만을 보고 벨라는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으슥한 구석진 곳에 도착해 있었다.
“다들 쉬쉬하고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이야기 아니었던가요. 직접 말로 들은 건 처음이라 꽤 참신합니다.”
벨라를 마주하고 로만은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었던지 그의 얼굴에는 흥미로움이 가득했다.
“어차피 다들 알고 있는 것을. 말만 안 한다고 사실이 달라질까?”
“그렇긴 하군요.”
“슈나이더는 네가 바라는 건 가능한 선에서 모두 쥐여 줄 생각이야. 그 정도로 네가 욕심난다는 뜻이겠지.”
“그래서요?”
“그렇게 슈나이더가 탐낼 정도면 나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서.”
“좋은 관계요?”
“어차피 슈나이더가 원하는 걸 얻으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꽤 공고한 협력 관계라고 여겼습니다만.”
“진심은 아니겠지? 필요하다면 언제든 가차 없이 버릴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텐데.”
“하긴, 높으신 분들은 그러시더라고요.”
“그래. 그가 약속을 지킬지 아닐지 확률도 반반이야. 그러니까 나도 내 살길 정도는 미리 찾아 놓고 싶어서.”
벨라의 솔직한 말에 로만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좋네. 돌려 말하지 않아서. 어차피 슈나이더의 사람으로 넘어갈 거라면 내게도 한 다리를 걸치는 게 어때?”
“한 다리를 걸치라고요?”
“어차피 넌 슈나이더 쪽으로 넘어간다고 해도 그를 믿진 않을 테니까. 내 살길이 네 살길이 될 수 있지 않겠어?”
벨라의 당당한 말에 로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빈같이 멍청한 것이 아니라 진작 벨라 님을 보내셨으면 이야기가 빨랐을 텐데요.”
로만의 솔직한 말에 벨라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조금씩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