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은 제가 잘못 들었나 해서 귀에 손가락을 넣어 휘휘 저었다.
“울어요?”
“그래.”
“르네 님이?”
“그래.”
잘못 들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뭘 좀 물어본다고 해서 르네가 울 거라 생각하다니.
도대체 레이넌이 르네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그런 걸로 울까요? 여리긴 하지만 마음은 생각보다 굳건하신 분 아닙니까.”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답답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말이 나오는 대신 무거운 한숨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말해 봤자 네가 알겠냐는 무시가 담겨 있었지만 로만은 오히려 웃었다.
저렇게 티를 잔뜩 내고 다니면서 왜 정작 본인은 아직 모르는 걸까. 르네에 대한 마음을 이제 알아차릴 때도 됐거늘.
뭐, 그게 또 그와 어울리긴 하지만…….
레이넌이 누군가를 마음에 품을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해 본 적은 없었다.
그저 다른 이들이 그러하듯 이익을 위해 의무적으로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이런 상황을 가장 예상하지 못한 건 레이넌 본인일 터였다.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를 대상으로 특별한 감정이 생겨난다는 경험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러니 지금 제 모습이 어떤지 알 리가 없지.
잠시 레이넌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로만은 다시 지친 얼굴로 돌아왔다.
이런 것까지 제 업무에 포함이 되었던가.
속으로 제 신세를 잠시 한탄하던 로만은 업무 이야기를 하듯 무덤덤한 얼굴로 레이넌에게 말했다.
“어차피 계획에는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두 분의 약혼 관계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음…….”
“물론 에드윈 님과 사이가 너무 좋아서 저희의 원래 계획과는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다른 방향으로 더 일이 잘 풀렸으니 문제가 될 것이 없을 텐데요.”
“다른 방향으로 더 잘 풀렸다?”
“그럼요. 에드윈 님의 안전을 가장 우선시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닙니까. 오히려 지금 상태라면 처음 계획보다 에드윈 님은 더 안전합니다.”
“더 안전하다…….”
“네. 르네 님과의 후사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여 에드윈 님을 아예 승계에서 제외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지금 상태라면 르네 님이 공작님과 에드윈 님의 가장 큰 약점으로 보일 테니 무엇보다 가장 먼저 노려질 건 르네 님이겠지요.”
“그게 예상치 못한 문제지 않나.”
“문제요?”
알면서도 로만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르네가 에드윈의 몫까지 위험해지리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어.”
“어차피 르네 님이 아니어도 됐을 자리입니다. 우선순위를 중시하라 말씀하시던 분이 오늘따라 왜 이러십니까.”
“우선순위라.”
“네. 에드윈 님의 안전이야말로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니 문제는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까?”
레이넌은 로만의 말에 뭔가 반박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로만은 그런 그의 모습을 못 본 척 넘어가 주지 않았다.
“왜 그러십니까.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정신 산만하니까 이만 나가 봐.”
로만은 레이넌의 축객령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예 대놓고 말해 줄까. 레이넌이 심란한 이유는 르네에 대한 감정 때문이라고.
직접 말해 주지 않으면 그가 제 마음을 과연 알아챌 수는 있을까 의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르네의 반응이 모호했다.
그녀 역시 레이넌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재밌는 건 그러면서도 동시에 전혀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여전히 그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애초에 르네는 왜 레이넌을 피하는 걸까. 그 이유라도 알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아멜리아가 르네의 곁에서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르네는 레이넌에게 전혀 마음이 없는데 레이넌이 제 마음을 자각하면 그것도 피곤한 일이었다.
겁많은 르네에게 레이넌이 무작정 돌진할 것이 뻔했으니까.
“아니. 지금도 충분히 돌진 중인가.”
“뭐? 나가라니까 혼자 뭘 중얼거리고 있어.”
레이넌은 귀찮다는 듯 나가라고 손짓했다.
“알겠습니다.”
역시 말하지 않는 편이 나을 듯했다. 괜히 제가 사서 일을 만들 필요는 없겠지.
레이넌은 제가 얼른 나가라고 해 놓고서는 로만이 문고리를 잡자 그를 불렀다.
“그 전에.”
“네, 공작님.”
“에드윈과 르네의 안전에 우선순위를 나누지 않을 것이다. 모두를 지키는 것이 목표라는 걸 인지하고 있도록.”
“물론입니다.”
로만은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있냐는 듯 당연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그의 뻔뻔한 목소리에 레이넌의 얼굴에 짜증이 비쳤다.
“그럼 저는 이만.”
로만은 불똥이 튀기 전에 얼른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레이넌은 굳이 로만을 붙들어 싫은 소리를 늘어놓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다는 말이 맞을지도.
“어차피 답도 못 찾을 고민에 빠져 멍하니 허공을 보고 계시겠지.”
로만은 조용히 혼잣말을 읊조렸다. 그러고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얼른 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의 집무실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듯이.
***
르네와 레이넌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에 사용인들도 어색하다고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이었다.
저택을 웅성거리게 할 사람이 로에리안 저택을 방문했다.
외모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은 그녀가 누구인지 사용인들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이미 전에도 방문한 적이 있었으며, 레이넌과 약혼 이야기가 오갔던 적도 있었으니까.
“이번엔 약속을 잡고 왔는데, 만족스러우신가요?”
벨라는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로운 웃음을 보이며 레이넌에게 물었다.
“방문 요청을 거절했는데 찾아온 걸 약속을 잡았다고 표현하나? 한결같이 무례하군.”
냉담한 레이넌의 말에도 벨라는 당황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나타나신 걸 보면 약속이 된 걸로 봐도 되지 않을까요?”
“내 보좌관이 일 좀 하라고 하도 잔소리를 해 대서 말이지. 용건만 얼른 말하고 돌아가도록.”
“아아, 유능하기로 소문난 그 보좌관 말이죠.”
“그래서 용건은?”
“제 용건은 공작님께 있는 게 아닌데요. 조금만 기다리시죠.”
꽤 건방진 말투였지만 레이넌의 신경을 건드리는 건 그 내용이었다.
“용건이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
미간을 찌푸리는 레이넌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는지 벨라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그녀가 지칭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르네 님 드십니다.”
그 말에 레이넌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미간 사이에 잡힌 주름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누가 그대를 여기로 데리고 왔지?”
평연한 얼굴로 레이넌을 향해 걸어오던 르네는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아, 그게…….”
르네는 대답 대신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뒤에는 로만이 서 있었다.
잠시 무서운 얼굴로 로만을 바라보던 레이넌은 곧 표정을 풀었다. 제 얼굴 때문에 르네가 겁먹는 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슈나이더 공작님의 말씀을 전달하러 누군가가 왔다고 하길래요. 무시할 순 없잖아요. 게다가 공작님도 계신다고 하니 온 건데 왜 그런 눈으로…….”
로만은 슬금슬금 르네의 뒤로 움직였다. 르네 역시 레이넌의 무서운 얼굴에 놀랐지만 금세 돌아온 그의 표정에 안도했다.
정작 로만은 그런 레이넌의 표정에 더 겁을 먹었는지 그녀의 뒤에 숨었다.
“그런다고 가려질까.”
레이넌은 한심하다는 듯 작게 말을 뱉어냈다.
“그럼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말씀들 나누시지요.”
로만 역시 르네의 뒤에 오래 숨을 수 없다는 걸 알아챘는지 얼른 자리를 피했다.
르네만 그 자리에 서 있자 레이넌이 일어나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일단 앉지.”
“공작님께서 부르신 게 아니었군요.”
르네는 벨라가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게.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레이넌은 벨라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벨라의 시선은 두 사람이 붙든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여전히 사이가 좋으시네요.”
“용건은?”
레이넌은 르네를 자리에 앉히고는 벨라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벨라의 시선은 르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렇게 금방 또 만나네요?”
벨라는 정말 반갑다는 듯 인사를 건넸고, 르네는 그녀 역시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래서 하실 말씀은 뭔가요?”
직접적인 르네의 물음에 벨라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생김새와 달리 성격이 꽤 급하신가 보네요.”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은데 빨리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벨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채로 르네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르네의 미소를 보던 벨라의 입꼬리는 천천히 내려갔다.
“보통 저희 세계에서 결혼이란 말이죠.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계약과도 같답니다.”
“계약……. 차가운 관계네요.”
“그런데 로에리안 공작님께서는 한낱 보모와 잠시 놀아난 것도 아니고 무려 약혼까지 하셨죠.”
대놓고 르네를 깔보는 말에 반응한 건 레이넌이었다.
“말이 심하군. 일어나지.”
레이넌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벨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레이넌을 보고 벨라는 태연하고도 능청스럽게 말했다.
“어머, 이제 시작인데 벌써 일어나시게요? 다음에 또 뵙죠, 그럼.”
레이넌이 르네를 일으키기도 전에 벨라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르네, 이야기를 이어서 해 볼까요?”
벨라는 얼른 레이넌이 떠나길 바라는 듯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제법 친근한 태도와 말투였지만 이 방에서 그렇게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르네를 쉽게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은 레이넌은 무서운 눈빛으로 벨라를 바라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본론만 말하되 예의 정도는 지켰으면 좋겠군.”
“가시는 게 아니었군요.”
벨라는 짐작했다는 듯이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좋아요. 물론 저야 르네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며 더 친해지고 싶긴 했는데…….”
“‘르네 님’이겠지.”
그가 아까부터 거슬렸던 호칭을 바로잡자 벨라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직 공작 부인이 되신 것도 아닌걸요.”
“예의도 없고, 생각도 부족한 모양이군. 약혼이란 의미를 모르나.”
“여전히 말씀은 참 시원시원하게 하시네요.”
“시원시원…….”
벨라의 어휘 선택에 르네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뇌었다. 벨라의 말 포장 솜씨에 질린 얼굴이었다.
“뭐, 아무려면 어떻겠어요.”
벨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더니 목소리를 슬쩍 낮추어 은밀히 속삭였다.
“그보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지 뭐예요?”
뭔가 신난 듯한 벨라와 달리 레이넌과 르네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두 사람의 반응에도 벨라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즐거운 듯 보였다.
“사실 두 분이 다른 형태의 계약을 주고받은 게 아닐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레이넌은 불쾌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르네는 재미있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