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빈과 로만은 전에 만났던 장소에서 다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전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마빈의 얼굴에 떠오른 자신감 정도일까.
로만은 그런 그를 보고는 슬쩍 비웃고는 입을 열었다.
“얼굴을 보니 꽤 그럴듯한 걸 가지고 왔나 보군.”
“그럼요.”
마빈은 입꼬리를 씩 끌어 올리며 자신만만한 말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로만과 접촉했고, 그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를 슈나이더에게 전달하고서 답변을 기다리는 시간은 길기 그지없었다.
슈나이더는 쉽게 답을 주지 않았다. 마빈을 믿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빈에게는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슈나이더와의 모든 연락이 끊어지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로만이 아니라면 이제 버려지는 일만이 남았다. 그렇다면 슈나이더와 레이넌, 둘 중 누구의 손에 죽을지만 기다려야 하는 운명이었다.
다행히 슈나이더에게서 지시가 내려왔다. 마빈도 예상치 못할 정도로 후한 조건으로.
“슈나이더 공작님께서 큰 결정을 하셨습니다.”
역시. 로만을 선택한 건 옳은 결정이었다. 이 남자를 어떻게든 끌어들여야 했다.
제가 살아남을 길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었다.
“됐고. 그래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그를 하찮게 보는 로만의 눈빛과 말투도 아무래도 좋았다. 마빈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로에리안 저택과 로에리안 공작령의 반을 떼어 주시겠답니다.”
마빈의 말에 로만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긴. 마빈도 처음 들었을 땐 귀를 의심했다. 그 정도로 슈나이더가 원했던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큰 결정이군. 이렇게나 후하게 쳐줄 줄은 나도 몰랐는데.”
로만은 꽤 탐난다는 얼굴로 턱을 쓸었다. 그런 로만의 얼굴을 본 마빈은 그간의 마음고생이 씻겨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로만이 조금씩 말을 흐리는 바람에 꺼져 가던 불안감이 다시금 피어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너무 후해서 말이야…….”
“후한 게 문제가 됩니까?”
마빈은 초조하게 되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던 그의 얼굴은 지극히 어두워져 있었다.
“이렇게 후한 대가를 덥석 내어준다고?”
도대체 그게 어디가 문제입니까. 마빈은 로만의 목을 붙잡고 흔들며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게 도대체 왜 문제가 되는 겁니까……?”
마음과는 달리 마빈은 소심하게 되물었다.
“글쎄. 뭔가 탈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아서 말이야.”
“로만 님의 능력을 그만큼 높이 사신 게 아니겠습니까.”
마빈은 초조한 마음으로 로만을 추켜세웠지만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돈도 좋지만 저런 거 잘못 먹었다간 저세상 가기에 십상이지. 목숨이랑 바꿀 정도로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마빈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돈이면 뭐든 하는 사람이 바로 로만이 아니었던가.
그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모양이었다. 로만은 틀린 생각은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야 돈이면 뭐든 하지.”
“그런데 왜……?”
“하지만 나도 목숨은 하나라서.”
“네? 그, 그러면…….”
아니, 그러면 지금 너무 많이 줘서 고민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덜 달라는 말은 아닐 텐데.
덜 주면 덜 준다고 뭐라고 했을 사람이 더 준다고 고민된다고 하면 어쩌란 말인가.
마빈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이제야 겨우 일이 잘 풀려 간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난관이 생겨났다.
도대체 이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란 말인가. 마빈은 재빨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당연히 잘 풀리리라고 예상했던 일이 꼬여 당황한 이유가 컸지만, 아마 맑은 정신이었다고 한들 적당한 방법을 찾아내지는 못했을 터였다.
그런 마빈을 바라보는 로만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걸렸다.
“슈나이더 공작님도 꽤 답답하시겠군.”
“네?”
마빈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로만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바보 같고 답답한 것들뿐이라면 그럴 수밖에.
그의 한숨에 그런 말이 섞여든 것 같아 마빈은 울컥했다. 하지만 마빈은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대신 로만을 설득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럼요. 그러니 과한 대우는 아닙니다. 로만 님이라면 그 정도는 아깝지 않다고 하셨으니까요.”
슈나이더는 그런 말을 한 적 없었다. 그냥 그에게 건넬 조건을 주며 진행하라는 간략한 명령을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마빈은 듣지도 않은 말까지 지어내며 그를 설득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시고 이제 마음의 결정을…….”
“아직 부족해.”
“네? 부족하다니요? 조금 전까지 분명 너무 후하다고…….”
“그래. 물질적인 대가야 후하지만 나를 안심시킬 만한 건 부족하군.”
“하아…….”
마빈은 도대체 어쩌라는 건가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자신을 놀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로만은 그런 마빈을 보고 오히려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오히려 더 답답하다는 듯이.
“하아……. 이런 것까지 일일이 알려 줘야 하는 사람을 보내 놓고 뭘 믿으라는 건지.”
신랄한 로만의 말에 마빈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됐어. 역시 이건 아니야.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마빈의 모습에 오히려 신뢰를 잃었다는 듯 로만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하지만 로만은 채 한 발짝도 앞으로 내딛지 못했다.
마빈이 애타게 그의 팔을 붙들었기 때문이었다.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게 뭐든 제가 얻어 오겠습니다.”
마빈은 이제 두려울 것이 없었다. 제가 붙들 것은 로만뿐이었으니.
속내가 모두 드러나 보인대도, 그의 비웃음을 산대도 아무래도 좋았다.
로만은 마빈의 팔을 떼어 내고는 그가 붙든 곳을 손으로 툭툭 털어 냈다. 더러운 것을 털어 내는 듯한 손길이었지만 마빈은 전혀 마음 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빈의 신경은 온통 로만의 얼굴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만은 옷을 가다듬고는 마빈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담긴 알 수 없는 미소를 보고 마빈은 망설임 없이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제발…….”
“일단 너한테는 내가 꽤 큰 의미라는 건 알겠고. 왜? 슈나이더 공작님께 버림이라도 받을 것 같은가?”
“슈나이더 공작님, 아니면 로에리안 공작님 두 분 중 누구의 손에 죽을지 모를 목숨이 아닙니까.”
“흐음…….”
마빈의 말에 로만은 흥미롭다는 듯 감탄사를 뱉어 냈다.
“로에리안 공작님께선 이미 의심, 아니 확신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슈나이더 공작님의 사람이라고.”
마빈은 차라리 솔직히 말하고 매달리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로만을 상대로 머리싸움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레이넌은 제가 슈나이더의 사람임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왜 아무런 반응 없이 내버려 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물론 그래서 두려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슈나이더 쪽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연락이 끊어진 걸로 봐선 그도 마빈의 존재가 드러났음을 알아챈 듯했다.
하지만 왜 그 역시 어떤 반응도 하지 않는가.
사실 로만을 데려간다 한들 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건 해 볼 수 있는 건 해야 할 때였다.
“뭐든 말씀만 해 주십시오. 제가 무조건 받아 내 오겠습니다.”
“흠. 글쎄. 보아하니 슈나이더 공작님께도 버려진 네가?”
“그러니 이렇게 로만 님께 매달리는 것이 아닙니까. 로만 님은 원하시는 것을 얻고, 저는 목숨만 부지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이라…….”
로만의 말에 마빈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간절함이 담긴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로만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나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는, 혹은 내가 안심하고 그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걸 가져오도록 해.”
“그게 무슨……?”
“예를 들면 슈나이더의 치명적인 약점이나 치부 같은 것? 간단하지 않나.”
“간단……?”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으니 기대해 보지.”
로만은 가볍게 이야기하고는 그대로 방을 나섰다.
“뭐가 간단하다는 거야…….”
마빈은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진 탓이었다.
모든 것이 잘되어 가나 싶었더니 로만이 이렇게 나올 줄이야.
오히려 금전적인 것을 요구했다면 훨씬 쉬웠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나오니 조금은 안심이 되기도 했다.
만약 어떤 의심도 없이 좋다며 덥석 받아들였다면 그 또한 찝찝했을 테니까.
“이걸 뭐 어떻게 하란 말이야?”
슈나이더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돌려 묻는다고 한들 알아채지 못할 리도 없었다.
로만도 이제 자신을 사지로 내몰려는 것인가, 싶어 마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뭔가 약점이 될 만한 게 있는지, 아니면 그렇게 보일 만한 것이라도 직접 찾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그렇게 보이기만 해도 좋을 텐데.”
문제는 그런 걸 자신이 찾을 수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게다가 로만의 눈에 찰 정도로 그럴싸한 정보를 무슨 수로 구하나.
그나마 제가 가지고 있는 정보 중에 쓸 만한 걸 떠올려 내기 위해 마빈은 재빨리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몇 번이고 반복했던 후회가 다시금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처음부터 발을 들이면 안 됐는데.”
마음 편하게 두 발 뻗을 날이 오기는 할까.
누구에게는 소소한 일상이 그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무겁디무거운 마빈의 한숨이 어두운 창고를 스산하게 맴돌았다.
***
마빈과의 만남을 마치고 레이넌의 집무실로 돌아온 로만은 문을 열자마자 그대로 다시 닫을 뻔했다.
멍하니 공중을 바라보고 있는 레이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저렇게 멍한 모습이라니.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았지만 일단 로만은 모른 척하기로 했다. 괜히 얽혀 더 골치 아픈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요즘 자리를 자주 비우는군.”
레이넌은 여전히 시선을 공중에 고정한 채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부재를 언제부터 이렇게나 신경 쓰셨습니까.’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로만은 현명하게도 입 안으로 삼켜 냈다.
“제가 워낙 하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업무를 조금만 줄여 주시면 공작님 곁에 착 붙어 있을 텐데요.”
능글거리는 로만의 말에 레이넌의 시선이 드디어 그에게 닿았다.
“더 바쁘게 움직이도록.”
레이넌의 입꼬리가 한쪽만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잠시 로만을 비웃은 레이넌은 다시 허공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업무를 이어 가던 로만은 결국 참지 못했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지만 저런 모습을 옆에 두고서야…….
로만 역시 긴 한숨을 내쉬고서는 말했다.
“그렇게 고민하실 정도면 직접 물어보시지요.”
“뭘?”
“르네 님 때문에 이러시는 게 아닙니까?”
“……그래.”
“그냥 직접 물어보시죠. 여기서 이렇게 청승맞은 얼굴로 허공만 바라보지 마시고.”
화를 낼 줄 알았던 레이넌은 뜻밖에도 힘없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다 울면 어쩌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