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공작님 기분이 매우 저조한데…….”
“그런데?”
에드윈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은 왜 굳이 말하냐는 듯 되물었다.
“에드윈 님이 요즘 다른 때보다 르네 님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게다가 즐겁게 보내고 계시니…….”
함께, 그리고 즐겁게, 라는 단어에 묘하게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스산하게 들리는 로만의 목소리에 에드윈은 불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그래서?”
“공작님께서 진지하게 고려 중이시더라고요.”
“뭘?”
에드윈은 이미 로만이 무슨 말을 할지 눈치챈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담긴 확인과 같은 질문이었다.
물론 나는 전혀 알아채지 못해서 로만의 이어질 말에 집중했다.
“에드윈 님이 익혀야 할 학문은 훨씬 많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은 즉, 에드윈의 수업을 늘리겠다는 말이었다.
에드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늘어트렸다. 하지만 영 싫은 이야기만은 아닌 듯 보였다.
다만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하긴, 에드윈은 배움 자체를 굉장히 즐기는 성격이었다. 수업이 늘어난다는 것만으로는 오히려 에드윈이 더 좋아할 만한 일일지도 몰랐다.
다만 지금도 중간중간 시간을 틈틈이 내어 나를 찾아오는 중이었으니 수업이 늘면 나를 만날 시간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어 모호한 표정을 하는 듯 보였다.
“아버지가 확실히 마음을 정하신 것 같아?”
“글쎄요. 여러 과목을 이미 정해 두긴 하신 것 같은데……. 르네 님 미움을 사고 싶진 않아서 고민 중이신 것 같습니다.”
“내 미움?”
뜬금없는 말에 내가 놀라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로만은 주제가 나로 돌아온 것이 반갑다는 듯 앞으로 몸을 더 기울이며 말했다.
“네. 그러니까 제발 잠시라도 좋으니 공작님이랑도 좀 놀아 주세요.”
“노, 놀아 주라니.”
“요즘 티타임도, 식사도 함께 안 하시잖아요. 르네 님이 에드윈 님께 내주시는 시간보다 적어도 좋으니 공작님과 함께 보내 주신다면…….”
“나는 안 가지만 공작님과 에드윈은 계속 만나고 있잖아.”
“티타임이든 식사든 르네 님만 빠지고 공작님과 에드윈 님만 만나게 하시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왜 의미가 없어. 부자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건데.”
“부자간의 오붓한 시간은 르네 님이 함께 계셔야 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로만은 꽤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물론 모두의 안녕이 르네 님께 달려 있습니다.”
로만은 간절했지만 나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소파에 푹 기댄 모습이 될 때까지.
에드윈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반응을 살피는 듯 보였다.
아마 내가 조금이라도 싫은 내색을 보이면 로만을 쫓아내려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나와 보낼 시간이 훅 줄어들지도 모르는 상황에 심란함 역시 감추지 못했다.
로만이 말한 ‘모두’에 에드윈도 포함이 된 걸까.
“아니, 그보다 왜 내가 모두의 안녕과 관련이 있지?”
“그야 공작님이 요즘 기분이 나쁘신 게 르네 님이 피하셔서니까요.”
“아니, 그러니까 피한 게 아니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하라는 듯한 로만의 눈빛에 목소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요즘처럼 이렇게 마음이 힘든 적이 없습니다.”
로만은 마지막까지 부탁의 말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볼일은 마쳤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방을 나갈 줄 알았던 로만은 뜻밖에도 그대로 선 채로 에드윈을 응시했다.
“에드윈 님, 에드윈 님도 이만 저와 함께 돌아가시죠.”
“……응.”
에드윈은 로만이 한 말을 모두 이해한 것 같았다. 나를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결국 로만을 따라나섰다.
신나게 들어온 것과 달리 풀 죽어 나가는 에드윈의 뒷모습이 어쩐지 애처로웠다.
“아니, 내가 공작님을 피한다고 로만이 저런 얼굴이 된다고? 일할 시간이 많이 늘어서 피곤한가?”
한차례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나간 기분이었다. 나는 로만의 얼굴이 한창 바빴던 휴가 전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확실히 그때 로만이 꽤 바쁘긴 했었지.
“근데 일을 많이 하는 걸 로만은 좋아하지 않았나?”
혼잣말과 같은 내 말을 들은 아멜리아는 작게 웃으며 내 앞자리에 앉았다.
“그러게 말이에요. 괜히 르네 님께 엄살이라도 부리고 싶은 모양이에요.”
아멜리아의 표정을 보니 그녀는 상황 파악을 모두 끝낸 것이 분명했다.
내가 내뱉은 혼잣말과는 분명 다른 상황이라는 것쯤은 그녀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그런 말은 전혀 없이 내 말에 맞장구만 쳤다.
내가 아무 말도 없이 아멜리아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자 그녀가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멜리아는 왜 다 알면서도 말해 주지 않는 걸까, 해서.”
“재밌잖아요.”
놀랍지 않은 대답이었다. 이럴 때마다 아멜리아는 흥미로움을 굳이 숨기지 않았으니까.
“괜찮아요. 꼭 아셔야 할 일이면 제가 먼저 말씀드릴 텐데요, 뭘.”
그건 또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리아가 말하지 않는 건 내가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서라는 것쯤은 이제 알았다.
내가 알아서 괜히 겁먹을 만한 일이거나,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사소한 일이거나.
이번엔 뭘까. 아멜리아는 내 궁금증을 알기라도 하듯 답을 내어주었다.
“르네 님께서 안 그래도 심란하신데 굳이 마음이 더 복잡해지 필요는 없잖아요.”
내가 요즘 레이넌을 피하는 이유를 알기라도 하는 것만 같은 아멜리아의 말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요즘 달라진 분위기나 로만의 말에 담긴 의미를 조금이라도 물어볼까 했던 내 의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아무래도 이럴 때는 아멜리아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여러 날 그녀를 겪어 오며 얻은 교훈이었다.
뭘 물어도 아멜리아는 지금처럼 모호한 대답만 해 주고, 더욱더 즐거워만 할 테니까.
***
로만과 함께 르네의 방을 나선 에드윈은 그의 옆에서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수업을 늘리신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르네 님께 미움받고 싶진 않으니까 참고 계세요. 그래도 수업이 늘면 좋긴 하시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지금도 겨우 어머니를 보는데 수업이 늘면 못 본다는 말이잖아.”
“혹시 못 참고 늘리더라도 한두 개 정도일 겁니다. 어쨌거나 에드윈 님 덕분에 르네 님이 잘 지내시는 것 같아 안심하고 계시니까요.”
“흐음…….”
로만의 말에 에드윈은 조금이나마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조용히 로만에게 물었다.
“그런데 진짜 어머니가 왜 아버지를 피하시는 거래?”
“에드윈 님, 제가 그걸 알았으면 이렇게 애절하게 르네 님을 찾아왔겠습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네.”
“직접 물어보신 것 같긴 한데……. 왜 오히려 그 후에 더 조심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실수라도 하셨나.”
“실수?”
“네. 그래도 르네 님이 워낙 성격이 무던하고 좋아서 웬만한 실수로 저렇게까지 피하진 않으실 텐데.”
“그건 그렇지. 아멜리아라면 이유를 알 것 같은데…….”
아멜리아의 이름이 나오자 로만과 에드윈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동시에 앞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말해 줄 리가 없죠.”
“응. 아멜리아는 그걸로 오히려 나를 놀리겠지.”
“그렇고 말고요.”
아멜리아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아는 두 사람은 그녀에게 묻는 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시 대화가 멈춘 사이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에드윈 일행을 보고 잠시 멈칫한 그녀는 곧 웃는 얼굴로 재빨리 그들 앞에 다가와 인사했다.
그들 앞에 선 이가 에린임을 확인한 순간 로만과 에드윈은 무심하게 그녀를 지나치려고 했다.
하지만 에린은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친근한 목소리로 에드윈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넸다.
“어머, 에드윈 님, 여기 구김이 있네요. 그리고 이 색보다 네이비 계열이 에드윈 님께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언제부터 친했다고 에린은 에드윈의 옷깃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물론 에린의 손길이 닿자마자 로만이 그녀의 손을 쳐 냈지만.
“함부로 손을 대선 안 될 분이라는 걸 모르나.”
“아,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하루가 다르게 늠름해지시는 에드윈의 모습에 흐뭇해서…….”
에린의 말에 에드윈은 차가운 얼굴로 웃었다.
“흐뭇? 그 말이 네 위치에 맞는 말인가?”
아이라기엔 무시할 수 없는 기운에 에린은 움찔했다. 생각지도 못한 무겁고 딱딱한 분위기에 그녀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도 서서히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분위기 파악을 끝낸 에린은 얼른 공손하게 제 잘못을 사과했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녀에게 고개를 들라고 말하지 않았다.
잘못한 에린으로서는 에드윈이 자리를 비키기 전, 혹은 그가 고개를 들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르네의 옆에서 생글생글 잘 웃고 귀엽기만 하던 아이가 아닌 것만 같았다.
도대체 지금 제 앞에 있는 아이, 아니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에드윈의 모습을 한 다른 사람 같았다.
차라리 고개를 숙이고 있는 편이 에린에게는 다행일지도 몰랐다. 생각지도 못한 에드윈의 차가운 분위기에 그녀는 무척 당황한 상태였으니까.
“어른들 사이의 일이야 내가 참견할 바 아니야. 하지만 그게 어머니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라면 그건 내가 참견해야 할 일일 거야.”
에드윈은 단호하게 말했다. 보지 않아도 매서운 눈길이 에린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듣고 있던 에린이 저도 모르게 흠칫할 정도로 에드윈의 목소리에는 사나움이 담겨 있었다.
“잘 기억해 두도록 해. 네 앞날을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한 부분이 될 테니.”
에드윈은 그 말만을 남기고 에린을 지나쳐 갔다. 그가 지나가는 것을 확인하려 슬쩍 눈을 올린 순간, 에린은 에드윈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에드윈의 눈에 담긴 감정은 무시와 혐오였다.
에드윈의 모습이 사라지고도 에린은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도저히 화가 나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손톱이 손을 파고들어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르네……. 도대체 르네가 뭐라고…….”
분명히 레이넌도 제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불필요한 말을 한마디만 해도 냉정하게 지나치는 사람이 에린의 말은 끝까지 들어 줬다.
물론 시큰둥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녀를 무시하거나 모진 말로 물리지는 않았단 말이었다.
하지만 르네가 레이넌과 이상한 분위기를 만들며 그의 신경은 온통 르네에게 향했다.
그러자 에린은 레이넌에게 다가가기조차 쉽지 않았다.
레이넌이 에드윈에게서 느꼈던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고 에린을 아예 없는 사람처럼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그런 거야. 나한테 빼앗길까 봐.”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르네의 자리는 제 손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게 불안한 르네가 일부러 레이넌을 흔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라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아? 네가 한 거, 나라고 못 할까.”
손톱이 파고든 손에서는 끝내 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에린은 깨닫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