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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81)화 (81/129)

분명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마음을 인정하는 것이 힘들었지, 그 후에는 딱히 힘들 만한 일은 없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바라는 것만 없다면 힘든 일은 없어야 하지 않나?

하지만 그건 나의 아주 큰 착각이었다.

“이제 좀 괜찮나?”

“아, 네! 그럼요! 완전히 괜찮습니다!”

망했다. 망했어.

오히려 피해 다니던 때가 자연스러워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레이넌과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싶었을 때 도망쳤어야 했다.

조금 덥나 보다, 하고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내 얼굴이 무척이나 경직되어 있다는 걸 내가 느낄 정도였다면 다른 사람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레이넌의 질문에 대답을 하고 나는 다시 도망치듯 그를 지나쳤다.

와, 세상에. 책을 소리 내서 읽어도 그것보다는 자연스러웠을 텐데.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늘 르네 님은 참 활기차시다니까.”

아멜리아의 웃음기가 가득한 칭찬에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이렇게 넓은 저택에 쥐구멍이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뭐라도 찾으세요?”

“응? 아니? 그냥, 음……. 새삼 저택 관리가 잘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쥐구멍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렇게 넓은 저택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니.

하나같이 능력이 있는 자들을 잘 골랐고, 잘 다스리고 있었구나, 레이넌은.

엉뚱한 말이었지만 아멜리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더 얼굴이 달아올랐다.

꼭 그녀가 내 마음속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 아멜리아가 아는 건 그렇게 창피한 일은 아니었다.

정말 걱정스러운 건 아멜리아가 알아챈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금세 알아채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 후로도 레이넌을 마주치는 일은 많았다. 하지만 그를 보기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로 모자라 점점 더 삐걱대는 내 말과 행동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또다시 레이넌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말 대놓고 피해 다니는 수준이었다. 어디서든 그가 보이면 얼른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으니.

그런 나를 볼 때마다 레이넌은 나를 붙들려고 했지만 멈칫하고는 그대로 보내 주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내가 울었던 일이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괜히 레이넌에게 눈치를 보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아……. 답답해.”

나도 모르게 그의 앞에서는 이상하게 행동하는 나 자신이 정말 답답했다.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를 가장 바라는 건 나였다.

그래야 레이넌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오래 볼 수 있을 텐데.

마음을 자각하자마자 그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다니. 좋아하는 마음을 접기는커녕 애타는 마음만 커질 뿐이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시간을 더 주세요.

레이넌에게 들릴 리 없었지만 속으로 그에게 부탁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나도 진정하지 않을까.

그러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어쨌거나 레이넌은 굳이 나를 붙들어 이유를 물어볼 것 같지 않았으니 나름대로 시간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주변의 분위기는 조금씩 어두워져 갔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세실까지 간혹 무거운 표정을 지어 보일 정도였다.

혹시 나 때문에 레이넌에게 안 좋은 소리라도 들은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모든 무거운 분위기를 중화시켜 주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 이건 웬 꽃이야?”

“제가 틈날 때마다 열심히 키운 꽃이에요. 어머니 방에 두면 좋을 것 같아서 가지고 왔어요.”

에드윈도 이런 분위기를 모르지 않을 텐데 그는 오히려 평소처럼 행동했다. 덕분에 에드윈만 나타나면 다들 한결 가벼운 표정을 보였다.

에드윈의 품에 안겨 있는 꽃다발에는 분홍색, 노란색, 흰색 꽃이 섞여 있었다.

색의 조화도 그렇고 꽃 자체도 무척 예뻤지만 얼마나 많이 가져왔는지 에드윈의 얼굴까지 가릴 정도였다.

저만큼 큰 꽃다발을 안고 영차영차 걸어왔을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웃음이 터졌다.

갑자기 터진 내 웃음이 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라 생각했는지 에드윈은 뿌듯한 얼굴을 했다.

“무거우니까 일단 이리 주렴. 체이스에게 들게 하지 그랬어.”

“직접 드리고 싶었어요.”

에드윈에게 넘겨받은 꽃다발은 내가 들기에도 꽤 묵직했다.

에드윈에게는 더욱이 무거웠을 텐데……. 그의 마음이 꽃보다 더 예뻤다.

“고마워. 정말 너무 예뻐. 마음에 쏙 드는데? 내가 직접 화병에 예쁘게 꽂아 놓을게.”

“와, 정말요?”

선물을 준 건 에드윈인데 그가 더 즐겁게 웃었다.

“하지만 다음에는 조금씩 가져다주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무거운 걸 직접 들고 오면 에드윈이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니까.”

“네. 그렇게 할게요.”

에드윈은 내 말에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꽃을 세실에게 넘겨주고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에드윈은 내 옆에서 먼저 쿠키를 먹고 있었다.

요즘 내가 걱정된 탓인지 에드윈은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조잘조잘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도대체 그는 하루를 몇 시간으로 살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조금만 더 지나면 진검도 잡을 수 있을 거래요.”

“어머, 벌써?”

“네. 검술 수업은 특별히 더 열심히 듣고 있거든요.”

“그래도 진검은 위험하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아이인데 진검이라니. 걱정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로 말하니 뜻밖에도 뒤에 서 있던 체이스가 입을 열었다.

“검술 수업은 다른 수업보다 시간도 더 길게 잡고, 따로 수련도 계속하고 계시니 괜찮을 겁니다.”

“음……. 뭐, 체이스도 그렇고 선생님도 그렇다고 하면 괜찮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해.”

“그럼요!”

에드윈은 걱정보다 설렘이 더 큰 듯 보였다. 그 외에도 체이스의 그림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둥, 간간이 정원에 가서 꽃도 가꾼다는 둥 하는 얘기를 들어 보니 그는 매일 바쁘게 보내고 있는 듯했다.

아이라서 그런가. 그만큼 체력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놀라울 만한 체력이긴 했다.

내게 오는 걸 한두 번쯤은 건너뛸 법도 한데 에드윈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를 찾을 기회조차 주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한 번쯤은 내가 찾아가고 싶었는데…….”

“기다리는 것보다 찾아오는 게 더 좋은걸요!”

에드윈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이렇게 자주 나를 찾으면서 이제는 거리감 같은 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응석을 부리기도 하고, 떼를 쓰기도 했다. 꼭 제 나이에 어머니께 부릴 법한 응석에 기쁜 건 나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에드윈이 떼를 쓰는 건 대부분 나를 위한 것이거나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다.

정말 안 될 법한 것들은 절대 말하지 않았다. 착하다고 해야 할지, 에드윈의 자리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겨야 할지.

어머니라는 건 나도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여러모로 어렵고, 알쏭달쏭했다.

그래도 이렇게 에드윈과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지내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는 그를 보니 이런 정도로 충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친 데는 이제 괜찮아?”

“그럼요. 살짝 삐끗한 건데요.”

“한번 보여 줘.”

검술 연습을 하다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발목을 삐끗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이미 한참 전의 일이라 나아진 지 오래됐다지만 그래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예요. 그래도 그때 한 번 실수해서 이제는 더 조심하고 있다고요.”

“그럼 다행이고.”

에드윈은 늘어날 내 걱정까지 미리 해결해 줬다. 다행히 눈에 띄는 상처는 없는 것 같아 안도한 그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세실이 문을 열자 문밖엔 아주 초췌한 얼굴의 로만이 서 있었다.

“로만?”

“르네 님.”

힘없는 목소리였지만 비장한 감정이 담겨 있는 부름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대답했다.

“응? 응.”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일단 와서 앉아.”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닌 듯 보였고, 무엇보다 로만은 서 있을 상태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말에 로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몸이 힘없이 휘청이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시인가.

힘이 없는 건 사실인 듯 로만은 털썩 소파에 앉았다.

에드윈도 그런 로만의 모습이 의아한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 있어? 얼굴이 많이…….”

초췌해 보인다? 피곤해 보인다? 야위었다?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에드윈이 이어서 말했다.

“이상해.”

“에드윈 님, 이상하다니요.”

로만은 우는소리로 대답했다. 다른 때 같으면 조금 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을 텐데, 저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니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로만, 할 말이 뭐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있지요. 아주 큰 일이 있지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그의 대답에 덩달아 내 얼굴도 심각해졌다.

“큰일?”

“르네 님.”

“응?”

“도대체 왜…….”

그는 뭔가 울컥한 듯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숨을 가다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왜…… 자꾸 공작님을 피하시는 겁니까.”

“피, 피한다니.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고 일단 발뺌했다.

로만은 이런저런 사족은 모두 치워 버리자는 듯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뭔가 문제가 있으면 저한테라도 말씀해 주세요. 제가 뭐든 해결해 드릴 테니까.”

“해결이라니. 문제가 없는데?”

양심에 찔렸지만 나는 로만의 눈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로만은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뒤로 뭔가 하려던 말은 에드윈에게 막혔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피할 리 없잖아.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왜 로만이 와서 어머니한테 그런 말을 해?”

또박또박 제 할 말을 하는 에드윈은 꽤 든든한 편이 되어 주었다.

흐뭇한 얼굴로 에드윈을 바라보고 있자 로만은 그런 나와 에드윈을 지친 눈으로 번갈아 바라봤다.

“에드윈 님도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계실 때가 아니에요.”

“응?”

로만은 에드윈의 기세에 물러서기는커녕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나와 에드윈은 서로를 바라보며 무슨 소리인지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해 봤다.

하지만 우리끼리 답을 낼 수 있는 건 아닌지라 곧 에드윈도, 나도 다시 로만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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