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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80)화 (80/129)

천천히 눈물이 고여 들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이 이렇게도 서글프고 서러운 일이었던가.

나도 모르게 레이넌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내가 눈물을 머금자 레이넌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러고서는 내 눈에 담긴 감정을 알아챘는지 얼른 내게서 손을 떼고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딱 세 걸음이었다. 그 정도 거리만 유지를 해 줬더라도 굳이 이런 마음을 인정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부질없는 원망이었다. 이미 생겨난 마음을 모른 척해 봤자 그대로 사라질 리 없었으니까.

“그게, 대답을 강요하려던 건 아닌데…….”

레이넌이 이렇게 당혹스러워하며 말끝을 흐리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런 그를 보고 나는 힘없이 웃었다.

레이넌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그를 당황하게 만들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감정 때문에 이렇게 그를 자꾸 피하는 건 내 일을 못 하는 것이 아닌가.

“시간이 필요하다면 줄 수 있어. 다만…….”

“괜찮아요. 그냥 조금…… 조금 지친 것 같아요.”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아니에요. 정말 이제까지 있었던 일들 때문에 부담도 되고 피곤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눈물 매단 채로 웃는 얼굴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최대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 환하게 웃은 탓일까. 눈가에 매달려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끝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레이넌은 눈물을 닦아 주려는 듯 손을 들었다가 그대로 멈췄다.

대신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볼을 쓱 닦아 냈다.

“내가 너무 몰아붙인 모양이라 미안하군. 그러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알아요. 걱정해 주신 것.”

“그래. 뭐가 됐든 나는 진심으로 그대를 걱정해. 언제가 되었건 조금 편하게 말해 줄 수 있는 상대가 내가 되면 좋겠군. 물론 이것도 강요는 아니야.”

혹시 부담될지도 모른다 여겼던 걸까. 레이넌은 재빨리 강요가 아니라며 두 손을 저었다.

“네. 고맙습니다.”

“그게 물론 나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아멜리아나 다른 사람에게라도 털어놓도록 해.”

“네.”

그렇게 대화는 끝이었다. 레이넌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문을 향해 등을 돌렸다.

몇 걸음 걷지 않고 금세 멈추고 다시 나를 돌아봤지만.

“더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 그건 아니고.”

그는 금방 나갈 듯이 굴면서도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나를 살피는 눈에는 염려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이것 봐. 이러니까 내가 착각 안 할 수가 있어? 진짜 꼭 나를 좋아하는 사람 같잖아.

애써 참았던 눈물은 결국 눈가를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는 나를 보고 레이넌은 안절부절못하더니 결국은 힘겹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끝까지 머뭇거리며 몇 번이고 나를 돌아본 후에야 그는 겨우 방을 나섰다.

다행히 밖에서 기다리던 이들은 바로 방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레이넌이 뭐라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뭔가 조용히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에린이 합류한 듯했다.

레이넌이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니 더 궁금한 듯 에린은 당장 문을 열 기세였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엄한 목소리가 들려오고는 곧 방 바깥도 조용해졌다.

나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침대를 향해 걸었다.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간 것 같았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뭐, 가벼운 일은 아니긴 했지만 이 정도로 기를 쓰고 부정할 일이었을까. 문득 허탈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결국 이렇게 피할 수 없는 것을. 차라리 조금 더 빨리 인정하고 이 마음을 어떻게 정리할지 고민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하아…….”

침대에 눕자마자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왜 좋은 거지?”

무뚝뚝하고, 감정도 뭐 거의 없는 것 같고. 일할 때나 로만에게 이런저런 일을 지시할 때 보면 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사람이 세심하길 하나. 다른 사람의 감정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남자가 아닌가.

“그래. 그런 줄 알았지. 그렇기만 했으면 애초에 반하지도 않았겠지.”

애써 그의 흠을 잡아 봤지만, 결국엔 모두 레이넌을 알기 전에 가졌던 선입견투성이였다.

사실 그는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서도 세심히 사람을 살필 줄 알았고, 나름 다른 사람을 위로하거나 다독일 줄도 알았다.

그저 말투와 표정에 그런 모습이 가렸을 뿐이었다.

냉정한 건 사실이었으나 그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자질이었고, 필요한 상황에서는 너그러움과 배려를 보여 주기도 했다.

“아니, 아니, 아니야. 이게 아니잖아.”

그의 좋은 점을 이제 와서 찾아서 어쩌자는 거야.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차피 다 부질없는 짓인데 왜 그의 흠을 잡기 시작해서 결국은 그의 장점만 떠올리고 말았을까.

“이건 사실 저 남자의 잘못이 크지.”

얼굴만 보면 세상에 다시 없을 미남이 그윽한 눈길을 보내면서 잘해 주면 안 넘어갈 여자가 어디 있을까.

왜 계약할 때 그럴 수 있다는 걸 미리 알려 주지 않았던 거야.

레이넌, 이 나쁜 놈.

“하아…….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이 다 무슨 소용이람. 그냥 앞으로 어떻게 할지나 생각하자.”

나는 자세를 바로잡고 정신을 집중해서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현실을 되짚는 편이 내게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어차피 일 년간의 계약이었다. 레이넌은 계약을 충실히 이행 중이었고, 거기에 휘둘리면 상처받는 건 나일 것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레이넌과 내가 한 계약에는 진심을 담은 감정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물론 일 년 뒤에 계약을 연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이넌의 능력이라면 아마 그사이에 모든 걸 끝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내겐 있었다.

“그럼 역시 일 년만 버티면……. 아니지, 이제 반년쯤 남았나.”

그 후에는 그와 약속한 대가를 받아 떠나면 될 일이었다. 에드윈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게 마음이 아팠지만…….

원래라면 계약이 끝나도 머물 생각이었다.

“아니지, 정말 레이넌이 날 좋아하면……. 그래, 그럴 리는 없겠지.”

기본적으로 그와 내게는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레이넌은 각자의 가문에 최대한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철저히 계산하고 결혼하는 이들 속에서 살아왔다.

그런 그가 과연 아무것도 없는 나를 마음에 담을까?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는 없었다. 애초에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아마 그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자각하지 않으려 그토록 노력했을 터였다. 결국은 혼자만의 마음으로 남겨 두어야 할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피하려고, 마주하지 않으려고 했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눈물부터 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어쩌지, 이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어차피 짝사랑이니 딱히 그럴듯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지? 짝사랑이니까 바라지만 않으면 되잖아?”

그냥 감정이 흘러들어 온 것처럼 언젠가 흘러 나갈 날도 올 터였다.

모른 척 눈을 감고 귀를 막았을 땐 모든 게 울적하고 불안했는데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니, 내가 좋아하는 게 뭐? 돈을 달래, 결혼해 달래? 그냥 혼자 좋아하는 건데.”

의기소침한 마음도 있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굳이 그와 잘되려는 마음만 없으면 서글플 일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쩌겠는가. 이미 좋아져 버렸는데.

좋아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의 비난을 받을 일은 없었다. 애초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마음속에 품어 두기만 할 테니까.

무엇이 되었건 레이넌에게 같은 마음을 바라지만 않으면 될 일이었다.

다행인 건 그와의 계약 기간이 조금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그사이에 마음을 잘 정리하면 떠나지 않아도 될 터였다.

물론 에드윈에게서 어머니라는 부름은 들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은 지낼 수 있을 테니까 그걸로도 충분했다.

“역시. 피하는 게 능사는 아니지.”

이제 레이넌을 피하지 않아도 되고 예전처럼 그를 대할 수 있을 테니 문제는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을 되찾은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

르네의 방을 나선 레이넌은 집무실로 가려다 말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정신이 어디론가 나가 버린 것만 같았다.

그런 르네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기본적으로 르네는 감정이 풍부한 편이었다. 그래서 뭐가 됐건 얼굴에 드러나곤 했다.

놀라거나 겁먹은 얼굴을 하기도 했고, 즐겁게 웃는 얼굴을 하기도 했으며, 재잘거리며 이야기할 때는 제법 사랑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렇게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줄 모르는 르네는 제 생각을 읽어 낸다며 종종 놀라기도 했다.

그게 또 귀여워서 어떻게 알았는지는 절대 말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저렇게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처음 봤고, 상상해 본 적이 없기도 했다.

소리 없이 흘리는 눈물이 마음을 이렇게나 아프게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뭔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자꾸 자신을 피해 다니는 르네에게 이유를 물으려던 것뿐이었는데.

“그게 잘못이었나.”

혼자서는 답을 절대 찾지 못할 것을 알았다. 이렇게 어려운 문제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레이넌은 제 머리를 헝클었다. 언제나 단정하게 정돈되었던 머리가 흐트러졌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이 지금 더 흐트러져 있었으니 머리쯤이야 문제가 될 리 없었다.

그때 서류를 한가득 품에 안고 바삐 걸음을 옮기던 로만이 그를 지나쳤다.

그리고 놀란 얼굴로 되돌아와 레이넌을 살피며 물었다.

“여기서 왜 그러고 계십니까?”

레이넌은 냉철하지만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기도 해서 로만은 이제까지 하고 싶은 말은 웬만큼 다 하고 지냈다.

하지만 요즘의 그는 전혀 달랐다. 하고 싶은 말은 넘쳐났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건 극히 드물었다.

지금도 그랬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애써 꾹꾹 눌러 담았다.

레이넌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으니까.

레이넌이 바깥에서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뜻하기도 했다.

잠시 눈치를 보던 로만은 제 품에 안은 서류 더미를 레이넌에게 안겨 줬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레이넌은 얼떨결에 서류를 받아 들고는 무척 언짢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르네 님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뭐?”

“공작님께서 이러시는 이유는 르네 님 말고는 없지 않습니까. 그나마 눈치 빠른 제가 상황을…….”

레이넌은 로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류를 돌려주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일이나 하러 가지.”

“쓸데없는 짓이라니……. 그래도 제가 한 번 뵙고 르네 님의 분위기를 보고 오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분명 그게 나을 터였다. 레이넌의 눈치라면 정작 중요한 부분은 모두 놓쳐 버릴 테니까.

그거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면 차라리 제가 가서 르네를 살펴보거나 떠보는 편이 빨랐다.

“낫지 않은가 보군요. 알겠습니다.”

가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레이넌의 살벌한 생각이 눈빛에 그대로 담겼다.

르네에게 활용하려고 했던 빠른 눈치는 결국 레이넌의 뜻을 따르는 데 사용하고야 말았다.

로만의 대답을 들은 레이넌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요즘 르네에게 시간을 꽤 많이 뺏긴 터라 일한다는 말 자체는 로만에게는 무척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뒷모습에서도 느껴지는 흉흉한 분위기에 차라리 레이넌의 일까지 제가 떠맡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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