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에린은 더욱더 내게 불편한 존재가 되었다. 더 이상 그녀를 곁에 두고 싶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 또한 쉽지는 않았다.
에린만큼이나 레이넌이 불편해진 탓이었다.
그럴 만한 일은 없었지만 나 혼자 이유 없이 그를 마주하는 게 꺼려졌다.
아멜리아나 로만을 통해서 이야기를 할까 고민도 해 봤지만 그럼 안 될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핑계로 레이넌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서 그런 용건까지 다른 사람을 통한다면 레이넌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된 탓이었다.
그를 마주하는 게 불편하긴 했지만 레이넌의 마음이 상하는 걸 바라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레이넌을 피해 다니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른 때보다 유달리 에드윈이 자주 나를 찾은 덕분이었다.
보기만 해도 내 기분을 즐겁게 해 주는 에드윈을 자주 보는 건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 든 생각은…….
“공작님과 에린의 사이가 미묘하다는 이야기를 에드윈도 들은 것 같지?”
“네.”
혼잣말과도 같이 나직하게 흘러나온 질문에 세실은 단호하게 긍정의 대답을 주었다.
“그래. 일부러 내 기분 풀어 주려고 자주 오는 것 같아. 무리하는 건 아니면 좋을 텐데.”
내 말에 아멜리아는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상냥한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그랬으면 체이스가 제지를 했거나 르네 님께 따로 말씀을 올렸을 거예요.”
“그……렇겠지?”
“그럼요. 그러니까 에드윈 님의 일정은 르네 님이 걱정할 일이 전혀 아니랍니다.”
아멜리아를 보면서 종종 느끼지만 그녀는 말투나 목소리 자체로 분위기를 바꾸는 사람이었다.
별일 아니라는 듯 가벼운 말투에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도 에드윈한테까지 그런 소문들이 들어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차라리 나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에드윈 님의 귀만 닫혀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그 나름대로 좀 걱정되지 않겠어요?”
“그것도 그렇네. 소문이라는 건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구나…….”
아멜리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본디 소문을 가장 늦게 듣는 것이 당사자라지만 정작 본인은 소외된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몹쓸 일 같이 느껴졌다.
어쨌거나 나를 기분 좋게 해 주려고 노력하는 에드윈 덕분에 그나마 하루를 가볍게 보내고 있었다.
다른 때보다 애써 더 흥겨운 일들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는 에드윈의 모습에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에드윈이 귀엽기도 했다.
덕분에 레이넌이 찾아와도 에드윈과 함께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시간을 몇 번 겪은 후에는 레이넌도 에드윈이 있으면 그냥 걸음을 돌리기도 했다.
에드윈이 어쨌거나 가운데 있으니 꽤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역시 나만의 생각이었던 듯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하지.”
에드윈이 없는 시간에 맞춰 그가 나를 찾아왔다. 게다가 이야기 좀 하자는 그의 얼굴은 어쩐지 비장해 보일 정도였다.
“아, 이걸 어쩌죠……?”
나는 세실과 아멜리아를 슬쩍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아멜리아와 세실의 도움을 구할 수 없었던 나는 난감한 표정만 지었다.
“일단 앉지.”
“아니, 그게, 오늘은 제가…….”
얼른 뭐라도 찾아내야 했다. 자연스러운 핑곗거리가 뭐가 있을까. 머릿속이 바삐 움직였다.
그만큼 바쁘게 눈동자가 굴러갔고 레이넌은 팔짱을 끼고 흥미롭게 나를 지켜봤다.
“아! 이제부터 일정이 있어서…….”
“일정? 무슨 일정이지?”
“그러니까…… 로에리안가의 역사와 전통에 대한 수업이었던가.”
“그건 진작에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 그랬죠, 참. 그게 아니라 사교계의 예의범절에 대한…….”
“그건 내일이지.”
와, 자기 일정도 빽빽하면서 내 일정까지 꿰고 있을 줄이야…….
나는 포기가 빠른 편이었다. 일정은 핑계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겸허히 그 부분을 받아들였다.
“제가 지금 조금 어지러운데……. 조금만 쉬고 제가 따로 찾아뵈면 안 될까요?”
이럴 땐 역시 모호한 건강 핑계가 최고지.
이마에 손을 얹고 슬쩍 비틀거리자 레이넌은 성큼 다가와 내 손을 치웠다.
서늘한 손이 이마에 닿았다. 분주했던 머릿속이 한순간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게 아닌데…….
“열은 없는 것 같고, 얼굴도 딱히 나빠 보이지 않는군.”
그의 얼굴에 비친 건 걱정보다 단호함이었다. 오늘은 어떻게든 이야기를 하고야 말겠다는 레이넌의 의지가 강력히 보였다.
어떻게 달리 빠져나갈 방법은 없을까. 포기가 빠른 나는 한편으로 미련이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다시 눈을 굴리기 시작하자 레이넌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천천히 맞춰 온 시선은 이제 그만 딴생각은 멈추고 제게 집중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른 때였다면 그의 눈빛에 끌려가 홀린 듯 레이넌을 바라봤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나도 모르게 눈을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때 레이넌의 낮은 헛웃음이 들려왔다. 웃음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레이넌은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이런 거 말이지.”
“네?”
나도 모르게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전처럼 쉽게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어느 때보다 진지한 그의 눈빛이 나를 붙들었으니까.
이래서 눈을 안 보려고 한 건데…….
나도 모르게 답답한 마음이 들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일단 이 손 좀…….”
“그러면 그대는 옳다구나 도망갈 텐데? 그렇게 둘 순 없지.”
“도망이라니…….”
“지금도 자꾸 말을 돌리는군. 뭐가 문제냐고 물었는데.”
“문제……없는 것 같은데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레이넌은 어림도 없다는 듯 웃었다.
“아니, 그대도 알잖아. 그대가 나를 피한다는 거.”
그래. 레이넌이 모를 리가 없겠지. 심지어 세실과 아멜리아도 요즘 나를 이상하다 여기는데…….
물론 그들은 곤란할 나를 위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들의 배려가 이제 와서 새삼 고마우면서도 이렇게 직접 묻는 레이넌에게 어쩐지 조금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지…….
뭐라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나도 정확히 모르는, 아니 내가 애써 피하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입 밖으로 낼 수 있을까.
이 희미한 감정이 소리가 되어 나오는 순간 모든 게 확실해질 것 같아 불안했다.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잠시 지긋이 나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입만 다물고 있다고 해서 물러날 생각은 없는데.”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의 손보다 시린 공기가 닿자 움찔한 것도 잠시였다.
그의 손은 그대로 내 입가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내 입술을 쓸어내리던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놀란 내 입술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심히 내 입술을 매만질 뿐이었다.
“이제 말할 준비가 됐나 보군.”
아니요? 손가락을 거기에 밀어 넣으니 당연히 입이 떨어지는 거 아닌가요?
항의하고 싶었지만 언제나처럼 마음뿐이었다.
물론 그의 손가락 때문에 어차피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르네.”
“…….”
“대답은 해야지. 르네.”
“……네.”
그의 손가락 때문에 제대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숨소리처럼 작은 대답이었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그래. 말해 봐. 도대체 뭐가 문젠지. 왜 그대가 자꾸 나를 피하고 싶은지.”
다시금 침묵을 지키는 나를 보고 그는 조금 답답한 듯한 얼굴을 했다. 여전히 내 볼에 머물고 있던 손이 나를 달래듯 움직였다.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은 너무도 조심스러웠고,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에는 심란함이 담겨 있었다.
“이렇게 입만 다물고 있으며 나는 알 수 없어. 그대를 이렇게 만든 게 뭔지 알아야지 해결을 하지 않겠어?”
“……해결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겨우 흘러나온 목소리에 레이넌은 잠시 반색했다가 다시금 어두운 얼굴을 했다.
“언제까지고 나를 피해 다니겠다고?”
“그건…….”
“그건?”
“아닐 거예요. 그냥 저한테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별일도 아닌데 너무 호들갑을 떤 것 같아 문득 창피해졌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커졌을까.
어색하게 웃으며 창피함을 애써 감췄다. 하지만 레이넌은 내 표정이 어떻든 진지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오늘까지도 꽤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는데.”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려다가 아차, 하고 입을 벌렸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한숨이 그의 손가락에 부딪혀 다시 입 안으로 되돌아왔다.
레이넌은 내 얼굴에서 뭔가를 찾기라도 하듯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다. 하지만 평소에 마치 내 속마음을 읽는 게 아닌가 싶었던 그도 이번만큼은 그러기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에린이랑…….”
“에린?”
“네. 그 소문이 조금 신경이 쓰였어요. 혹시 정말이라면 제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르네, 그런 일은 없어. 이 저택에 무수한 소문이 도는 걸 그대도 알잖아.”
“네. 그래서…… 해결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린 건데.”
“다시 한번 확실히 말하지. 에린이랑, 아니 다른 누구와도 그런 소문이 난대도 믿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네.”
“그리고 그런 일 때문에 이렇게 혼자 앓지 마.”
“호들갑을 떤 것 같아서 창피한데요.”
“호들갑이라니. 이 정도로 무슨. 호들갑을 부려도 좋고, 화를 내도 좋아.”
조곤조곤 나를 달래는 레이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내게 닿았다.
내 얼굴을, 내 눈을 한참 동안 세심히 살피던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대 혼자 뭔가를 안고 있는 것도 싫고, 이렇게 계속 나를 피하기만 하는 것도…….”
낮은 목소리의 끝에는 작은 떨림이 묻어났다.
그의 얼굴도, 목소리도 꼭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내가 걱정되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처럼 보였다.
몇 번이고 나를 착각하게 했던 그 모습이었다.
꾹꾹 밟아 두어 눈을 돌려 왔지만, 희미한 감정은 문득문득 아무렇지도 않게 내 마음속을 파고들곤 했다.
아마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이넌을 마주하다 보면 금세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서 내내 그를 피했던 것이었는데……. 이제 더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결국 이렇게 형체가 되어 드러날 감정이었다. 애써 피해 온 것이 무색하게 레이넌은 너무도 쉽게 끄집어냈다.
형체가 되어 이름을 찾은 감정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내 속을 가득 채웠다.
두근거림, 설렘, 그리고 벅찬 감정이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더불어 막막함과 답답함, 서글픔도 딱 같은 크기로 나를 휘감았다.
좋아하는 마음보다 앞서 있던 건 언제나 나를 둘러싼 현실이었다. 애초에 시작부터가 평범하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이렇게 그의 약혼녀로 함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매우 어려운 일임을 너무도 잘 알았다.
무엇보다 그와의 관계는 이미 끝이 정해져 있었다.
그는 계약대로 행동했을 뿐인데 왜 혼자 설레고, 혼자 착각하고, 결국엔 그를 좋아하게 되어 버린 걸까.
정말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