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렇게 좋은 사이라고. 친한 척은 그만두지.”
로만은 웃으며 독설을 날렸다. 꽤 냉정한 말에 마빈은 멋쩍은 표정으로 그를 맞이하기 위해 들었던 손을 아래로 내였다.
“그렇긴 하지만……. 이제 또 모를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빈은 금세 최대한 몸을 낮추며 비굴한 웃음을 보였다. 로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뭐든 할 듯한 모습이었다.
로만은 그런 그의 모습을 대놓고 비웃었다. 하지만 마빈은 그런 대우 따위는 각오했는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일단 앉아서…….”
“그렇게까지 할 이야기인가.”
“아, 그럼 최대한 빨리 끝내겠습니다.”
“그 전에.”
“네, 로만 님.”
“자꾸 이런 식으로 불러내면 곤란해. 공작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걸 모르나?”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람들 눈을 최대한 피해서…….”
“그렇게 뻔한 얘기는 됐고. 하고 싶은 말이나 얼른 하고 헤어지지.”
자기가 먼저 말을 꺼내 놓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딱 자르니 마빈도 이번만큼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를 악물고 화를 삭이는 모습을 보고서야 로만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마빈은 서두를 떼 놓고는 누가 들을까 봐 걱정이라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로만에게 한껏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물론 로만의 눈에는 마빈의 모든 행동이 불필요한 것투성이였다.
그가 한심해 같이 있는 것도 짜증 날 정도라는 생각을 숨길 가치도 없었다.
로만의 얼굴에는 그런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주변을 살피느라 바쁜 로만은 눈치채지 못했다.
“지금 받으시는 것에 비해 부족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로만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마빈의 얼굴에는 안도가 퍼졌다. 물론 곧 사라졌지만.
“뭐 내가 돈을 좋아하긴 하지만, 사실 그 정도는 그렇게 크게 매력적인 액수는 아니지.”
“……네?”
“지금 받는 것에 비해 부족하지 않은 정도를 가지고 나를 그쪽으로 끌어들이겠다고?”
로만은 팔짱을 끼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마빈은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공작님도 꽤 후하신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보다 더 후하게 쳐줘야 나도 고민이라는 걸 해 보지 않겠나.”
로만은 부족함은 없다는 말을 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여지를 남겼다.
지금과 비슷한 수준이 아닌 훨씬 더 많은 돈을 준다면 언제든 그들과 함께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
마빈은 로만의 말에 담긴 뜻을 읽어 내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요. 로만 님처럼 능력이 출중하신 분은 그만한 대우를 받으셔야지요. 제가 다시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굳이 귀찮게. 이제 찾아올 필요 없어.”
로만의 말에 마빈은 화들짝 놀라 그의 팔을 붙들었다. 물론 로만은 거칠게 그의 손을 쳐 냈다.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듯이.
하지만 마빈은 기분 나쁜 내색은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로만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했다.
“꼭 좋은 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글쎄. 웬만해선 내 눈에 차지 않을 텐데.”
“물론입니다. 그 부분까지 잘 말씀드려서 꼭 로만 님의 능력에 맞는 답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일단 두고 보지.”
로만은 그 말만을 남기고 창고를 떠났다. 다시금 소름 끼치는 철문 소리가 들리고서야 마빈은 털썩 자리에 힘없이 앉았다.
“하아……. 돈이면 뭐든 되는 사람이라 다행이지.”
마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에게 로만은 어떻게든 붙들어야 하는 생명 줄이었다.
슈나이더를 만난 건 딱 한 번이었다. 그의 사람이 되기로 마음을 정했을 때, 그때 슈나이더를 직접 만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만 마주쳤을 뿐인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레이넌도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슈나이더는 그와 다른 의미로 무서운 사람이었다.
어쩌다 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마빈은 새삼 한탄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른 채 시종으로 지냈던 날이 마음 편하고 좋았는데.
누구의 손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렇게 위태로운 삶은 결국 아주 찰나에 스쳐 간 제 욕심 때문이었다.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지.”
지금 마빈은 어떻게든 로만을 슈나이더의 사람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그것만이 제가 살길이었다.
“르네 그건 도대체 어떻게…….”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부터 잘못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사소한 위협을 하라는 명령을 실행했다.
그런데 왜 르네가 먹어야 했을 독약을 제가 먹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제가 아팠던 것이 단순한 배탈 때문이 아니라는 걸 레이넌은 알 터였다.
에드윈의 가까이에 가지도 못하게, 아니 어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를 그대로 공작저에 두는 게 오히려 마빈을 불안하게 했다. 슈나이더는 또 어떤가.
제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떤 말도 없었다. 물론 더는 어떠한 지시도 내려오지 않았다.
마빈은 하루하루 커지는 초조함에 더는 버티기 힘들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로만이었다. 그는 슈나이더가 오래도록 탐냈던 사람이었다.
능력은 물론 지략도 뛰어난 로만은 심지어 어떤 더러운 일도 가리지 않았다. 슈나이더가 가장 높이 사는 인간상이었다.
게다가 레이넌의 가장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니 그만 포섭한다면 로에리안가를 무너뜨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로만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워낙 눈치가 빠른 자이니 레이넌의 귀에 바로 들어갈 위험 역시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오래도록 슈나이더가 원했던 자, 하지만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자가 바로 로만이었다.
“로만 님만 설득하면…….”
그러면 자신은 살 수 있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뭐든 해 보자는 마음으로 달려든 것이 제겐 행운이었을지도 몰랐다.
거금을 약속한다는 말에 로만은 바로 반응을 보였다.
“제발……. 제발 어떻게든 넘어와 주길.”
그를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슈나이더는 얼마든 쓸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로만에게 달렸다.
마빈의 목숨을 건 모험은 다행히 성공을 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로만이 이익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게 천만다행이지.”
이제 또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슈나이더에게선 어떤 답이 올까. 로만은 또 어떻게 반응할까.
이제 마빈이 바라는 건 돈도, 안정적인 직장도 아니었다. 무사히 살아남는 것. 그것 단 하나였다.
***
혼란스러웠던 나에게 아멜리아와 세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시간을 주었다.
자려고 했지만 잠이 들지 못했다. 하지만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낸 덕에 복잡했던 마음은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물론 겨우 가라앉은 마음은 다시 울렁이기 시작했다. 배려라고는 전혀 없이 들이닥친 에린 때문이었다.
“어머, 르네 님. 많이 아프세요? 오스틴을 부를까요?”
어떻게든 방에 들어오려는 에린을 막아 보려고 했던 듯 세실과 아멜리아는 낭패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아멜리아와 세실의 손이 에린을 다급히 붙잡으려고 했던 그들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 줬다.
“아니야. 그냥 피곤했나 봐. 쉬니까 이제 괜찮아.”
“그래요? 다행이네요.”
다른 때보다 더 높은 에린의 목소리에 귀가 아파졌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태연하게 웃었다.
내 반응을 보고 세실과 아멜리아도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와서 나를 살폈다.
“정말 괜찮으세요?”
“응. 그나저나 나 때문에 정리도 제대로 못 하고 와서 어떻게 해?”
뒤늦게 아멜리아와 세실이 뒷정리하던 걸 내팽개치고 나를 따라왔던 것이 떠올랐다.
그런 내 물음에 아멜리아와 세실은 비슷한 미소를 보였다.
“그거야 정리할 사람은 많은걸요. 르네 님이 더 중요하죠.”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는 듯한 아멜리아의 말에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요즘 이래저래 많이 지치신 것 같으니 저녁은 건강식으로 준비할게요.”
“그거 좋네. 혹시 드시고 싶은 거라도 있으세요?”
세실의 말에 아멜리아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 화색을 보였다.
“음……. 글쎄. 뭔가 딱히 먹고 싶은 건 없는데.”
“그럼 제가 기력을 보충하는 음식 위주로 준비하라고 할게요.”
“아, 고마워.”
“고맙기는요. 이게 제 일인데요.”
세실의 목소리는 무뚝뚝했지만 이제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이 느껴졌다. 그녀도 내 걱정을 꽤 많이 한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다시 한숨을 내쉬자 에린은 얼른 다가와 나를 챙겼다.
“정말 괜찮으세요? 혹시 입덧…….”
아니, 챙기는 게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에린은 내가 임신을 한 건지 떠보고 싶은 듯했다.
나도 모르게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에린은 내가 임신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그렇게 궁금해?”
애써 목소리를 죽여 내게 물은 에린과 달리 나는 방에 있는 사람은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방에 남은 사람이야 이제 아멜리아뿐이었지만.
“아니, 아니에요, 르네 님.”
에린은 드물게 매우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창피함은 물론 자존심도 꽤 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에린이 나를 잘 안다고 말했던 것처럼 나 역시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다.
제 의도와 달리 내가 다른 사람에게도 들리게끔 말했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을 터였다. 심지어 두 번이나.
“그러고 보니 아까 공작님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
오히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자 에린은 작게 움찔거렸다.
내가 물어보지 못하리라고, 혹은 그녀가 그랬듯 아주 조용히 물으리라 예상했던 것이 분명했다.
잠시 움찔했던 에린은 눈에 띄게 당황한 척을 했다.
“아, 그게…….”
에린은 일부러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듯했다. 경황이 없어 차마 숨기지 못했는지 그런 에린의 속내가 내 눈에도 빤히 보였다.
“응? 왜?”
내가 오히려 태연하게 묻자 그녀는 아주 짧은 순간 인상을 썼다. 하지만 곧 난감한 체하며 내게 말했다.
“르네 님 건강에 문제는 없나, 뭐 그렇게 물으셔서 대답해 드린 게 전부예요.”
“그랬구나.”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에린을 향한 관심을 뚝 끊었다. 그러자 에린은 초조한지 안절부절못하며 내 곁을 맴돌았다.
그 또한 그녀가 예상치 못한 상황인 듯했다.
그 말로 뭔가 이어 가고 싶은 분위기가 있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을 테지.
나는 나대로 더는 그녀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도 뻔한 거짓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얄팍한 거짓말을 하리라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왜 굳이 물었을까.
뭘 확인하고 싶어서.
평연하게 웃으며 아멜리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지만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에 일렁이는 여러 복잡한 감정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내겐 꽤 버거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