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아의 그림에 대해 끊임없이 찬사를 늘어놓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그 사람 중에는 레이넌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느새 닮은 모습을 하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레이넌은 곧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대하는 르네의 태도는 오늘따라 유독 딱딱했다. 처음 만났을 무렵의 겁먹은 모습과는 달랐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변화에 마음이 초조했다. 제 마음이 초조한 이유도 알 수도 없었다.
다만 말똥말똥한 그녀의 눈빛이, 조잘대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그리웠다.
잠시 심란한 표정으로 르네를 바라보던 레이넌은 그녀가 아멜리아와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서 에드윈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에드윈의 머리에 손을 슬쩍 올렸다. 아주 살짝 쓰다듬는 듯한 미세한 움직임을 남기고 레이넌의 손은 금방 떠났다.
에드윈이 레이넌을 올려다보자 그는 다른 곳을 바라보며 무심히 말했다.
“잘했다.”
앞뒤 없는 짧은 칭찬이었지만 에드윈은 그의 말이 품은 뜻을 금세 알아챘다.
에린과의 사이에 끼어들어 지겨운 시간을 끝내 준 것, 르네의 기분을 풀어 준 것. 레이넌은 지금 그걸 칭찬하는 것이었다.
에드윈은 이제 어떠한 어색한 기색도 없이 레이넌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런 에드윈을 바라보는 레이넌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르네를 바라보자마자 레이넌은 심란한 얼굴을 했다. 그러한 그의 감정을 모두 읽어 낸 에드윈은 발꿈치를 살짝 들었다.
에드윈이 할 말이 있음을 깨달은 레이넌이 상체를 슬쩍 낮춰 주자 에드윈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만약 아버지가 어머니를 놓치면 저는 어머니를 따라갈 거예요.”
참으로 귀여운 협박이 아닐 수 없었다. 에드윈의 말에 레이넌은 헛웃음을 흘렸다.
에드윈이 처음부터 르네를 잘 따른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나 마음을 줄 줄은 미처 몰랐다.
에드윈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반쯤은 진담이 담긴 말이라는 걸 레이넌은 알았다.
물론 에드윈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할 터였다.
“그래. 그런 일은 없게 하마.”
레이넌의 말에 에드윈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가 원했던 답을 들었다는 만족감이 드러났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이런저런 말이 돌기도 하고, 르네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니 내심 걱정이 되긴 했던 모양이었다.
에드윈이 떠나자마자 떠들썩했던 분위기는 한 번에 가라앉았다. 레이넌의 시선은 여전히 르네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레이넌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르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표정도 그렇고 평소보다 얼굴이 많이 안 좋은데.”
“제가요? 아, 아마 오늘 날씨가 좀…….”
“날씨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다. 하늘을 바라봤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고개를 다시 내렸을 땐 르네가 이미 자리를 떠난 후였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그녀의 빈자리를 보고 레이넌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
되는대로 나온 말에 레이넌은 황당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구름 하나 없이 화창한 하늘이 나의 좋지 않은 얼굴과 무슨 상관이 있나 의문이라는 듯이.
“아무래도 이렇게 화창한 날은 사람 얼굴이 창백해 보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더는 안 될 것 같았다. 입을 열어 봤자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소리만 지껄일 것이 뻔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도망이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럼 저는 먼저 가 볼게요.”
말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뒷말까지 과연 그가 들었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내가 허둥지둥 자리를 뜨자 아멜리아와 세실이 황급히 나를 쫓았다.
“르네 님?”
“얼굴이 창백하신데…….”
“응? 아니야. 날씨가……. 아니, 일단 그냥 돌아가자.”
걱정스러운 듯 나를 살피며 말을 건네는 아멜리아와 세실에게도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던 나는 겨우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은 나를 보고 의아한 시선을 나누었지만 그 후로 어떤 말도 걸지 않고 방까지 나를 쫓아왔다.
“르네 님?”
방에 들어와서도 한동안 멍하니 있는 내가 걱정스러운지 아멜리아가 나를 불렀다.
그제야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어. 왜 이러지?”
솔직한 내 말에 아멜리아는 뭔가 흐뭇한 미소를 보이며 나를 도닥였다.
“일단 조금 쉬시죠.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으니 세실과 저는 바깥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꼭 뭔가 알고 있는 듯한 아멜리아의 말에 마음 어딘가가 뜨끔했다.
하지만 모른 척 아멜리아가 제안한 대로 침대에 몸을 누이고 잠시 모든 걸 잊기로 했다.
***
레이넌은 르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도 그녀가 떠난 쪽에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로만은 덧없이 흘러간 시간에 초조했지만 레이넌이 그런 그의 속마음까지 배려해 줄 리가 없었다.
다른 때였다면 로만이 레이넌을 재촉했겠지만 그러지 못했던 건 그가 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였다.
이럴 때 건드리면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일단 집무실로 데려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로만은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레이넌에게 말했다.
“일단 집무실로 가시지요, 공작님.”
다행히 레이넌은 어떤 말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 집무실로 가는 동안 로만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레이넌이 이러는 건 역시 르네와 관련된 일 때문일 터였다. 물론 오늘 그녀의 분위기가 다른 때와 다르긴 했지만 레이넌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정도였던가.
레이넌과 르네의 사이에서 괜히 방해꾼이 되어 추후에 고생스러울까 봐 두 사람만 남겨 둔 것이 새삼 후회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레이넌에게 직접 묻는 게 나을지, 르네를 찾아가 그녀의 상태를 보는 게 나을지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집무실이 눈앞에 보였다.
그에 일단 모른 척하기로 한 로만은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레이넌에게 말했다.
“오래 자리를 비우신 만큼 집중해서 일을 처리해 주시면…….”
자리에 앉은 레이넌이 로만을 바라봤다. 딱히 화가 난 눈빛은 아니었다. 하지만 로만은 알았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더 몸을 사려야 했다.
“저는 잠시 볼일이 있어 나갔다 오겠습니다.”
차라리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택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마음 같지 않았다.
레이넌이 피식 웃으며 로만을 빤히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하아……. 그래서 도대체 뭐가 문제입니까.”
“나도 그걸 모르겠으니 답답하군.”
“그럼 저도 해결해 드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딱히 네게 해결책을 기대하지 않으니 걱정할 것 없어.”
냉담한 그의 말에 로만은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렇게 살벌한 분위기로 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그간 제가 르네와 관련하여 건넸던 조언은 또 얼마나 많았고.
“불만이 많기도 하지.”
레이넌은 로만이 꼭 입 밖으로 불평을 내뱉은 것처럼 피식 웃으며 그의 생각을 멈췄다.
“불만이라니요. 저야 언제나 공작님을 위하여 밤낮없이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가신인 것을요.”
“가신? 밤낮없이?”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작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긴, 로만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 소리로 들렸다.
그간 로만이 밤낮없이 일한 만큼 레이넌은 그에 응당한, 아니 그를 넘는 보수를 주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로만도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건 레이넌도, 로만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로만은 멋쩍은 웃음 대신 잘 만들어진 미소를 보였다. 뻔뻔함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미덕이 아니던가.
“농담은 이쯤이면 됐고. 보아하니 에린은 더 상대해 줄 필요는 없겠군.”
“알겠습니다. 괜히 귀찮기만 하셨네요.”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의심스러웠으니.”
에린에게서 뭔가 얻을 것이 없다는 건 둘 다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에린이 너무도 눈에 띄게 레이넌에게 접근을 하니 두 사람 모두 뭔가 의심스럽다고 여겼다.
혹시나 슈나이더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 일부러 에린의 존재를 밝힌 것인가, 하는 마음에 에린의 접근을 두고 봤지만 역시나였다.
“슈나이더에게도 가치가 없겠군, 저 정도면.”
“네. 에린에게 뭔가를 맡기기엔 너무 탐욕이 크고 경솔하니까요. 슈나이더가 신중한 성격이니 절대 그럴 일이 없겠죠.”
“그래. 곧 에린은 치우도록 하고 겸사겸사 마빈도 함께 치우지.”
“마빈 말씀이십니까?”
“그래. 마빈도 우리 쪽에 노출됐을뿐더러 르네한테 먹일 약을 제가 먹는 멍청한 짓도 하지 않았나. 써먹지도 못할 것, 여기 둬서 뭐 하겠나.”
로만은 레이넌의 말에 바로 답하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평소와는 다른 로만의 태도에 레이넌은 눈썹을 슬쩍 올렸다.
“일단 마빈은 조금 더 두고 보시지요.”
로만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보통 이런 일에 있어서 로만과 레이넌의 의견이 나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특히 에린이나 마빈의 경우 오히려 로만이 먼저 로에리안저에서 내보내자고 말을 꺼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들이 여기를 떠나면 로만의 많은 업무 중 일부가 함께 덜어지는 것이므로.
“어째서지?”
“마빈이 지금 에드윈 님을 모시는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일 자체를 안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희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오히려 마빈이 움직이기 더 쉬운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슈나이더가 이용하기 좋은 상황이기도 하고요.”
“음…….”
로만의 말에 레이넌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싸한 말이었지만 분명 로만답지 않은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내보내면 슈나이더가 이용할 수도 없는 아닌가. 평소의 로만이라면 굳이 그를 이용하게끔 남겨 둘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터였다.
“무엇보다 마빈이 움직이면 파악하기가 무척 쉬우니 손해 볼 건 없지요. 차라리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역시나. 평소와는 너무도 달랐다. 레이넌이 아무 말 없으면 로만 역시 말을 줄였다. 이렇게 몇 마디를 더해 가며 그를 설득하려고 하는 일은 드물었다.
특히나 득이 될 것 같지도 않은 상황을 두고.
레이넌은 로만에게서 의심의 시선을 거두진 않았지만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좋아. 당분간은 지켜보지. 어떤 식으로든 그가 움직이면 바로 보고하도록. 특히 다른 사람과의 접촉이 있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알겠습니다.”
로만은 만족스러운 듯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 저는 잠시 나갔다가 돌아오겠습니다. 부디 그동안에 밀린 업무 좀 최대한 처리 부탁드립니다.”
“어딜 가는 거지?”
로만이 자리를 뜨는 것에 대해 레이넌이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로만은 레이넌의 물음에 잠시 움찔했다.
“공작님께서 손을 놓고 계시니 그만큼 제가 챙겨야 할 일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럼.”
하지만 그는 금세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언제나처럼 능글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가득 띄우고 대답했다.
흥겨운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가는 로만의 뒷모습에서 레이넌은 눈을 떼지 않았다. 두 손으로 턱을 괸 그는 조금 전에 들은 로만의 말을 되짚었다.
“마빈이라……. 언제부터 그렇게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고.”
레이넌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금세 업무에 집중했다.
***
한편 집무실을 나선 로만은 종종걸음으로 바삐 움직였다. 자신이 지금 너무 바쁘다는 것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기려는 듯 보이기도 했다.
물론 로만은 늘 바빴고, 그래서 굳이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오히려 그가 한가하다고 하면 로에리안저의 모두가 놀랄 테니까.
한참을 바삐 걸어가던 로만의 걸음이 어느 순간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러서는 제법 여유로워 보일 정도였다.
낮에도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으슥한 창고 앞에 선 로만은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고 철문이 움직이는 소리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기이했다. 하지만 로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어둠이 내려앉았고 창고 구석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로만은 익숙한 듯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조금 전까지 레이넌과 로만의 입에 오르내렸던 마빈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만을 발견한 마빈은 자리에서 얼른 일어나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