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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76)화 (76/129)

“공작님도 참……. 이런 얼굴로 그런 말씀 하시면 저 오해해요.”

이런 얼굴? 그런 말씀? 그게 뭔데? 레이넌이 뭐라고 했길래 에린이 저렇게 들뜬 걸까.

레이넌은 에린과 함께 있는 것이 내키지는 않아 보였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뜨지도 않았다.

딱히 두 사람이 애틋하거나 애정이 넘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의 곁에 저렇게 가까이 다른 여자가 있는 걸 처음 봐서일까.

어쩌면 레이넌의 약혼녀는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르네 님…….”

“응?”

“그렇게 언짢아하실 만한 일은 아니에요. 공작님 표정 보이시잖아요.”

“아, 응. 언짢은 건 아닌데, 그렇게 보였어?”

“저는 표정 없는 르네 님을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아멜리아의 말에 세실 역시 조심스럽게 말을 거들었다.

“에린을 잘 아시잖아요.”

“아니,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그냥 조금 이상해서 그래. 다들 그렇게 호들갑 떨 일은 아니야.”

웃으면서 말했지만 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일단 다른 길로 갈까?”

굳이 두 사람을 지나쳐 가고 싶지 않았다. 아멜리아나 세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내 표정은 평소와 다른 듯했다.

이런 얼굴을 레이넌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꽤 섬세한 남자였고, 이런 걸 굳이 모른 척해 주지 않는 남자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내 의지와 다르게 아주 해맑은 목소리가 주변을 울려 레이넌과 에린의 시선을 이쪽으로 불러들였다.

“아버지!”

갑자기 와 닿은 레이넌의 시선에 깜짝 놀란 나는 움찔하고 뒤로 물러섰다. 에드윈은 그런 나를 지나쳐 레이넌을 향해 달려 나갔다.

갑자기 다가온 에드윈을 발견한 에린은 화들짝 놀라 레이넌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뒤에 모여 있는 우리를 눈으로 훑었다.

내가 있음을 확인하고서는 에린의 입가엔 아주 옅은 미소가 퍼졌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 미소가 분명히 나를 향하고 있음은 확실했다.

정말 레이넌을 유혹하기라도 하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더불어 레이넌과 에린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소문이 영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다 같이 모여서 어디 가는 길이지?”

레이넌은 나를 향해 물었다. 에드윈은 그의 말에 대답하고 싶은 듯 시선을 끌어 봤지만 레이넌은 나만을 빤히 바라봤다.

“정원에서 산책도 하고, 그림도 그릴까 해서요.”

보지 않아도 느껴질 정도로 내 웃음은 어색했다. 하지만 애써 모른 척 대답하자 레이넌은 고개를 갸웃했다.

내 표정 때문인지, 혹은 대답이 충분치 못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전에 어머니는 아멜리아가 그림 그리는 걸 못 봐서요. 오늘은 꼭 보여 드리고 싶어요.”

에드윈의 귀여운 목소리에 레이넌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드디어 닿은 시선에 에드윈은 신이 난 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가 요즘 많이 바쁘셨잖아요. 오늘은 꼭 함께 재밌는 시간을 보낼 거예요.”

어머니라는 말을 할 때 에드윈의 시선이 잠시 에린에게 향한 것 같았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는지 그에 맞춰 그녀의 몸이 아주 살짝 움찔했다.

금방 눈을 내려 에드윈의 시선을 피했지만 어쩐지 에린은 뭔가에 놀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그거 듣기만 해도 신이 나는 일이로구나.”

레이넌의 대꾸에 에드윈은 한층 더 밝은 얼굴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

“아버지도 바쁘시지 않으면 같이 가요. 다 같이 가면 더 재미있을 거예요.”

그런 에드윈을 보는 내 얼굴엔 감격이 떠올랐다.

당연히 할 수 있는 이야기도 눈치를 보던 아이가 이제 이렇게 레이넌의 팔을 붙들고 조르는 것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얼굴을 힐끔 본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 바쁘지 않으니 나도 함께 가도록 하지.”

“공작님…….”

애원하는 듯한 로만의 부름은 레이넌의 말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는 걸 알려 주었지만 그런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식간에 일행은 늘었고 다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에린을 스쳐 지나갔다. 인사도 없이.

레이넌은 에린의 존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그녀는 졸지에 없는 사람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녀를 지나치고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등을 돌렸다. 동시에 에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꽤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돌아볼 줄은 몰랐던지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얼른 자리를 떠났다.

에린은 내가 자신을 방해한 거라 여긴 걸까.

“왜 그러지?”

멀어지는 에린을 보고 있는 사이에 일행은 이미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다만 레이넌과 에드윈은 되돌아왔는지 바로 내 곁에 있었다.

“‘그런 말씀’이 뭔지 궁금해서요.”

“응?”

내 질문을 레이넌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했다.

나는 본 장면을 그대로 재현했다. 에린이 그랬던 것처럼 눈웃음을 치며 그의 팔을 붙들고 몸을 슬쩍 비틀어 기댔다.

“공작님도 참……. 이런 얼굴로 그런 말씀 하시면 저 오해해요.”

행동은 물론 아까 했던 에린의 말투와 내용 모두 그대로 재현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레이넌은 당황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뭐지, 이 수상한 반응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레이넌의 지금 얼굴은 꼭 쑥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말 둘 사이에 뭔가 있나?

레이넌은 내 의심을 알아챈 듯 손을 떼고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금세 다시 얼굴을 가렸다. 그래 봤자 입가 정도였지만.

“공작님, 왜 그러세요?”

“그야 그대가 이런…….”

“제가 뭘요?”

“하, 한 번만 더 해 보지?”

“네?”

“그럼 생각이 날 것 같기도 한데.”

“지금 말 돌리시는 것 같은데요.”

그를 빤히 바라보자 레이넌은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귀찮다는 말밖에 안 했어. 그걸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재주가 있더군.”

“으흠. 다시 안 해도 기억은 잘 나시네요.”

“응? 그건…….”

당황한 레이넌의 모습이 어쩐지 야속해서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나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레이넌의 모습이 꼭 정말 바람피우다 걸린 남자의 모습처럼 보여서 괜히 짜증이 일었다.

다행히 레이넌에게 무례한 말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이가 나타났다.

“어서 가요, 어머니.”

에드윈이 이끈 곳은 장미 정원이었다. 언제나처럼 향긋한 꽃내음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티타임과 같은 시간이었다. 물론 에드윈은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림 그릴 준비를 하느라 바빴지만 대부분은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에드윈, 체이스, 아멜리아는 각자 마음에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레이넌과 나는 그들이 잘 보이는 장소에서 차를 마셨다.

평화로운 시간이었지만 어쩐지 마음속은 복잡했다. 레이넌과 에린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탓일까.

혹은 에린이 제대로 작정하고 레이넌을 유혹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탓일까.

괜히 심란한 기분에 차만 홀짝이고 있자 레이넌은 그런 내가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아니요.”

평소처럼 대해야 하는데 어쩐지 그를 바라볼 수가 없어 찻잔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대답했다.

“오늘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

역시나 그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이었다. 혹시나 아픈가 걱정이 된 건지는 그는 손을 올려 내 얼굴을 확인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뒤로 슬쩍 물러나 그의 손을 피해 버렸다.

무의식적인 내 행동에 놀란 건 나만이 아니었다. 레이넌은 조금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나에게 향했던 손은 여전히 공중에 뜬 채였다.

“아, 그게……. 조금 피곤한가 봐요.”

다급하게 변명과도 같은 말을 하자 그는 천천히 손을 내리며 말했다.

“오스틴을 불렀다지.”

“네.”

레이넌은 내가 왜 그를 불렀는지 직접 말해 주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지만 나는 그대로 입을 닫았다.

그러면 그도 더는 묻지 않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이 묘하고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다시 침묵이 이어지리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레이넌은 궁금했던 점을 직접 물어 왔다.

“어디가 안 좋았나?”

“아니요. 직접 들으셨겠지만 건강하대요.”

내가 그대로 다시 입을 닫자 조금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인 레이넌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곧 다시 다물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내 얼굴을 슬쩍슬쩍 살피기 시작했다.

꼭 내 눈치를 보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게 또 괜히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에 파묻히려는 찰나, 나를 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이것 좀 보세요.”

에드윈이 도도도 달려와서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가 이끄는 힘은 미약했지만 나를 선뜻 따라나서게 했다.

“아멜리아의 그림이 변하는 것 좀 보세요.”

에드윈은 호들갑을 떨며 말했고, 그건 허풍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아멜리아는 대강 붓을 이리저리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붓놀림에 그림은 조금씩 풍성해졌다.

어느새 에드윈과 나는 말을 잃고 그녀의 그림에 집중했다.

머지않아 그림이 완성되자 에드윈과 나는 손을 붙든 채로 감탄했다.

“와, 아멜리아는 정말 못하는 게 뭐야?”

“그렇죠? 제가 말했잖아요.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리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정말이네. 화가를 해도 되겠어.”

조잘거리며 즐겁게 이야기하는 에드윈의 귀여운 모습에 마음이 밝아졌다. 하지만 아주 잠시의 틈이라도 생기면 다시금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에드윈과의 시간에 집중했다. 아멜리아의 그림을 보고 칭찬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시간은 훌쩍 흘러갔다.

그래도 덕분에 기분은 한층 나아졌다.

“에드윈 님, 지금 가셔야 다음 수업 시간에 늦지 않으십니다.”

체이스가 다가와 에드윈을 재촉했다. 그러자 에드윈은 아쉬운 얼굴을 하고서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또 찾아갈게요.”

“다음엔 내가 갈게. 이제 전처럼 바쁜 일은 당분간 없을 것 같으니까.”

“정말요?”

“응. 그러니 오늘 남은 시간도 잘 보내고.”

“네!”

에드윈은 힘차게 대답하고는 체이스의 손을 잡고 떠났다. 물론 한참 멀어질 때까지 몇 번을 뒤돌아봤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 역시 몇 번이고 인사를 되돌려 주었다.

에드윈이 떠나자 다시금 딱딱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나마 분위기를 풀어 줄 만한 아멜리아는 뒷정리하느라 바빴고, 세실 역시 그녀를 돕고 있었다.

내 기분 역시 주변에 흐르는 정적만큼이나 무거웠다. 에드윈의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아래로 끝없이 떨어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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