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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75)화 (75/129)

이 모든 게 내가 착각하고 싶은 걸까.

언젠가부터 감정 기복이 심해졌고, 간혹 레이넌을 보면 마음이 뭉클하기도, 오늘처럼 서럽기도 했다.

안개처럼 뿌옇고 불확실한 감정의 정체는 사실 조금씩, 조금씩 형체가 드러나고 있었다.

눈만 조금 더 크게 뜨면 보일 형체였지만 나는 내내 피하고 싶었다.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이제는 자신이 없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피해도 괜찮겠지. 선명해지려는, 불쑥 튀어 오르려는 감정을 꾹꾹 눌러 밟아 놓았다.

“천천히 먹어야지.”

“네. 그럴게요.”

내가 내 위치를, 그와의 관계를 잊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그렇게 믿고 내 마음에서 희미하게 일어난 변화를 그대로 묻어 버렸다.

***

그날로부터 며칠 뒤, 세실에게 자수를 배우던 나는 아차, 하는 순간 바늘에 손을 찔렸다.

“뭐?”

“집중하셔야 한다니까요. 다행히 피는 안 나네요. 그보다 역시. 전혀 못 들으셨죠?”

“응. 근데 너무 허무맹랑한데? 공작님과 에린이? 그럴 리가 없잖아.”

세실은 덤덤한 목소리로 요즘 레이넌과 에린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소문이 돈다고 말했다.

“음……. 그 소문이면 저도 듣긴 했는데.”

헛웃음을 짓는 내 옆에서 함께 자수를 놓던 아멜리아도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도대체 이 저택에서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소문이 생기고 퍼지는 거야?”

“다들 심심해서 그래요. 대부분의 시간을 저택 안에서만 지내고, 딱히 즐길 거리가 없잖아요.”

세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 이야기가 오락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튼 그건 조금 황당하긴 하다.”

“그럼요. 공작님이 에린을 제대로 상대할 리가 없고, 무엇보다 르네 님이 있는데요.”

아멜리아 역시 내 말에 동의했지만 세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굳이 르네 님께 옮기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진지한 세실의 모습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평소 그녀의 성격을 떠올려 보면 드문 일이긴 했다.

딱히 소문 같은 건 귀담아듣지도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흥미로 전하는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요.”

“그럼?”

“에린을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제가 보기엔 에린이 뭔가 의도가 있어서 르네 님의 시녀가 되기로 한 것 같으니까.”

“의도…….”

“아무래도 에린은 지금 르네 님의 자리를 빼앗고 싶은 것 같아요.”

에린이 일부러 레이넌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또한 슈나이더의 계획일까. 그건 아닐 것 같았다.

제 입으로 에린이 제 사람이라고 밝혔는데 레이넌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에린에게 또 다른 의도가 있거나 아니면 슈나이더와는 별개로 레이넌에게 접근 중이라는 말일 터였다.

“내 자리라…….”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세실이나 에린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나를 레이넌의 약혼녀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내 웃음의 의미를 알아챈 듯 아멜리아는 평소보다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르네 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 자리는 꽤 공고하답니다.”

나를 위로하려는 걸까. 어쨌든 아멜리아에게 감사의 미소를 돌려주었다.

무슨 말인지 세실은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소문의 내용을 더 들려주었다.

“르네 님이 공작님과 가까워지기 시작한 그 무렵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야기가 많아요.”

“아, 그때…….”

나는 에드윈과의 사이를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던 때를 떠올렸다.

레이넌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면 에드윈과의 사이를 조율하는 데 도움이 될까 생각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황당한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는 잘되었으니 다행인 셈이었지만.

“에린이 그래서…….”

문득 얼마 전에 에린이 내게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공작님께서 르네 님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셨을까 궁금해서요. 혹시 들으셨어요?”

“공작님 눈앞에서 최대한 알짱대라고. 그게 정말 맞았던 것 같아. 은근 좋아하시더라고.”

그 말을 믿고 레이넌의 근처에서 알짱댄다는 건가. 그리고 레이넌은 그런 그녀를 굳이 말리지 않고?

“그래서 공작님은 어떠시다는데?”

“모르겠어요. 특별한 반응은 없으시다는데 일단 에린이 르네 님 시녀를 계속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들 술렁이고 있죠.”

“내 시녀를 계속하는 게 왜?”

“르네 님이 왜 그런 에린을 두고 보는가, 공작님이 두 분을 두고 고민 중이시니까 에린을 내치지 않는 건가. 뭐 그런 이야기들을 하는 거죠.”

세실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라는 듯이 말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레이넌이 에린을 두고 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까이 두고 지켜보며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으니까.

에린이 달라진 모습도 없이 활보하고 다니는 이유가 궁금한 건 나만이 아닌 듯했다. 슈나이더가 다른 의도를 가졌는지 파악해 보려는 게 아닐까.

“르네 님?”

“응?”

“그 정도로 신경 쓰실 일은 아니에요. 어쨌거나 에린이 요즘 이상하고 수상쩍으니까 조심하시는 게 좋다는 의미로 말씀드린 거니까요.”

내 얼굴이 안 좋아 보였던 걸까. 세실은 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응. 고마워.”

“공작님이 르네 님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시는지는 옆에서만 봐도 알 수 있는걸요.”

세실의 그 말은 다정한 위로였다. 나는 그녀의 말에 작게 웃었다.

“참 의외라니까, 세실은.”

“네?”

“아니, 예전엔 세실이 참 차갑고 정 없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가까이에서 보니까 이렇게 세심하고 다정할 수가 없잖아?”

내 말에 세실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녀도 뭔가 떠올랐는지 작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실은 르네 님이 참 속없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던 걸요, 뭐. 가까이에서 보니까 참…….”

세실은 딱히 어울리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런 그녀 대신 답을 내어준 건 조용히 우리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아멜리아였다.

“속 깊고 다정한 분이시죠.”

“맞아요! 아닌 것 같아도 은근 다 눈여겨보시고, 생각도 미리 해 두시니까요.”

두 사람은 내가 뭔가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고 사람들을 배려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나 싶어 두 손을 내저으며 부정하려고 했지만 아멜리아가 먼저 세실의 말에 긍정했다.

“그러니까. 처음에 그렇게 보이는 건 워낙 르네 님이 밝으셔서 그런 거지.”

여러분, 뭔가 큰 오해를 하고 계세요.

변명할 기회도 없었다. 세실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아, 정말요. 곁에 있으면 같이 즐거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르네 님 시녀가 되어 다행이에요.”

세실의 말은 내겐 조금 뜻밖이었다. 내 시녀가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할 줄이야.

“그거 무척 고마운 말이네.”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사이 바늘은 다시 내 손가락을 찔렀다.

“집중하셔야죠.”

제가 먼저 소문을 이야기해 놓고서는 세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엄하게 말했다.

“응. 자수라는 게 생각보다 어렵네.”

“하긴, 르네 님은 세심한 것보다 힘쓰는 일을 더 많이 하셨죠.”

“응. 그게 더 잘 맞는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자수는 왜 갑자기 알려 달라고 하신 거예요?”

세실의 말대로였다. 자수 같은 건 놓아 본 적도 없던 내가 그녀에게 알려 달라고 먼저 부탁했다.

뜬금없는 부탁이었지만 세실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멜리아까지 함께하며 셋이서 자수를 놓는 상황이 되었다.

물론 둥글게 모여 앉은 세 사람 중에 서툰 건 나 하나였다. 바늘에 손가락이 몇 번이나 찔렸는지 몰랐다.

처음에야 치료했지만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그냥 그대로 찔리는 중이었다. 나중에 한꺼번에 치료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음……. 전에 야시장에 갔을 때…….”

뭔가 이유를 이야기하려니 수줍은 기분이 들어 쭈뼛쭈뼛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끝맺을 수는 없었다.

내 방을 찾은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분위기도, 내 기분도 한층 밝게 만들어 주는 반가운 손님이.

“어머니!”

방을 들어서자마자 밝게 나를 부른 그는 달려와서 내 품에 안겼다. 나 역시 자연스럽게 그를 안고 팔에 힘을 주었다.

“요즘 어머니가 너무 바쁘셔서 좀처럼 보지 못해 너무 슬펐어요.”

파티 이후로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에드윈과 보내는 시간이 줄었다. 그게 그는 조금 서운했던 모양이었다.

“나도 그랬는데. 오늘은 이런 시간에 어쩐 일이야? 일정은?”

“어머니를 뵙고 싶어서 다른 날보다 열심히 공부를 마쳤어요.”

“그랬구나.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에드윈과의 관계가 바뀌었지만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본디 관계가 가까웠던 터라 딱히 달라진 관계에 적응할 것이 많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조금 더 돈독한 사이가 되었달까.

에드윈은 내가 그의 어머니가 된 것을 무척이나 기뻐했다. 예전보다 조금 더 마음 놓고 응석을 부리거나 애정 표현하는 것을 보니 전보다 더 가까운 관계가 된 것을 즐기는지도 몰랐다.

물론 에드윈의 그런 모습을 보는 나 역시 기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나도 예전보다 마음껏 애정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럼 오늘은 오랜만에 같이 시간을 오래오래 보내 볼까? 혹시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음……. 그럼 바깥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때요? 아멜리아가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지 어머니는 못 보셨잖아요.”

“아, 그거 봤는데?”

에드윈이 얼마나 자랑을 했던지 그녀가 그린 그림을 본 기억이 있었다. 내 말에 에드윈은 그게 아니라는 듯 답답한 얼굴로 말했다.

“다 그린 것만 보셨잖아요. 직접 그리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신기한데요.”

에드윈의 말에 아멜리아는 흐뭇한 얼굴로 어깨를 폈다.

“그럼요. 심지어 그날은 제대로 실력 발휘도 안 했는데요.”

아멜리아의 말에 에드윈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뒤에 서 있던 체이스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더 잘 그릴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럼요. 깜짝 놀랄 준비하셔야 할걸요.”

에드윈은 기대를 감추지 못하고 내 손을 붙들고 방방 뛰었다. 영락없이 함께 그림을 그려야 할 처지에 놓인 체이스만 울적한 얼굴을 했다.

“그럼 가실까요?”

세실까지 함께 다섯 명이 정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정원까지 얼마 남지 않은 복도에서 이상하게 웅성거리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뭔가 분위기가 묘하네요?”

나만이 느낀 건 아니었는지 아멜리아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어디서 시작된 분위기인지 찾으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아.”

짧은 감탄사는 세실에게서 흘러나왔고, 다들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금세 그들의 시선은 나를 향해 돌아왔다.

나만이 세실이 바라보던 그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곳에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레이넌과 에린이 있었다.

무표정한 레이넌과 눈웃음을 짓는 에린은 즐겁게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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