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에린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그걸로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그녀가 레이넌에 대해 했던 조언 중 진심은 하나도 없었다.
레이넌에게 쫓겨나기라도 바랐던 걸까.
나는 애써 씁쓸한 감정을 숨기며 밝게 웃으며 말했다.
“왜, 에린이 그랬잖아. 공작님 눈앞에서 최대한 알짱대라고. 그게 정말 맞았던 것 같아. 은근 좋아하시더라고.”
“……그래요?”
떨떠름한 되물음은 조금 전 가졌던 생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았다.
“응. 알다시피 내가 한동안 공작님 눈에도 많이 띄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했잖아. 귀찮다 싶을 정도로 매달리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
레이넌에게는 미안한 조언이었다. 그를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한다? 생각만으로도 그가 언짢아할 것이 눈이 선했다.
하지만 만약 에린이 내 말을 듣고 그렇게 한다고 해도 레이넌은 힘들이지 않고 그녀를 떼어 낼 수 있었다.
그사이 레이넌을 꽤 많이 알게 된 모양이긴 했다. 그가 어떤 표정으로 에린을 떼어 낼지 상상이 될 정도였으니까.
그건 에린에게는 꽤 무안한 일이 될 터였고, 레이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일 것이다.
내 말에 잠시 생각에 빠졌던 에린은 곧 환한 웃음을 보였다.
“그랬구나. 종종 이야기 들려주세요. 두 분 이야기는 소문만 무성한데 이렇게 들으니 너무 설레네요.”
“응. 그럴게.”
나 역시 그녀와 비슷한 웃음을 돌려주었다. 에린은 곧 가벼운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세실이 한숨을 내쉬며 내게 다가왔다.
“적당히 상대하고 그냥 치우시는 건지, 너무 받아 주시는 건지 헷갈리네요.”
얼핏 들으면 불퉁한 말투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세실과 참 잘 어울리는 감정 표현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과는 달리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무슨 말이라도 던져 줘야 에린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서 그런 거야.”
“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랬네요. 공작님께서 귀찮게 하는 걸 좋아하신다니……. 황당한 이야기를 하신다고 생각했는데 에린은 그걸 믿은 모양이네요.”
“실제로 내가 꽤 알짱대긴 했잖아. 세실이 걱정해서 조언까지 해 줄 정도로.”
“그땐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그러게. 지나고 보니까 나도 꽤 위험한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나 봐. 그래도 다행히 공작님이 너그러우셨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저도 몰랐으니까요.”
세실이 지난 시간을 떠올린 듯 아주 잠시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보다 에린을 계속 곁에 둬도 괜찮으시겠어요?”
세실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에린은 제법 수상한 행동을 계속해 온 모양이었다.
“그러게. 공작님과 의논을 한번 해 봐야겠네.”
제법 순순한 내 말에 세실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슬쩍 올렸지만 제법 만족한 듯 보였다.
레이넌은 일단 조금 더 지켜보자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단 그와 한 번쯤 더 상의를 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살펴보니 에린은 슈나이더에게 어떠한 언질도 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들켰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만 보더라도 슈나이더에게 에린은 큰 이용 가치가 없는 패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에린이 옆에 있는 게 이제 너무 불편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니 자연스럽게 그녀를 대하는 법도 잊은 것 같았다.
어쨌거나 불편하면 언제든 바꿔도 된다고 말한 건 레이넌이긴 했으니 조만간…….
“의논을 하긴 해야 하는데…….”
“뭔가 문제라도 있으세요?”
“응? 아니야.”
그를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가슴께를 붙들고 나를 설득하던 찰나 아멜리아와 로만이 방에 들어섰다.
“역시 어디 안 좋으신 게 맞죠?”
아멜리아는 확신에 찬 말투로 물으며 내게 다가왔다.
“아니야. 그냥 조금 답답해서 그랬던 거야.”
그녀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지 세실을 바라보며 확인을 하려 했다.
“에린이 귀찮게 해서 그러실 겁니다.”
그 말에 아멜리아는 바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로만은 어쩐 일이야?”
바쁜 로만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나 의아해서 물어보니 그는 잠시 내 얼굴을 살피고는 대답했다.
“오스틴을 부르셨다길래 공작님이 확인해 보고 오라고 하셔서요.”
“아…….”
“공작님은 하셔야 할 일이 많아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차라리 오스틴을 불러서 확인하는 게 더 확실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지금쯤 공작님이 오스틴과 이야기 중일 겁니다.”
왜 굳이 나한테 왔나 했더니 양쪽 모두에게 확인할 모양인 듯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오스틴을 직접 불렀다는 게 다들 꽤 심각하게 느껴졌는지 로만도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물었다.
“아니. 그냥 갑자기 뭔가 일이 커진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나 봐. 이제 괜찮아.”
“하긴…….”
그럭저럭 납득할 만한 이유였던지 로만은 바로 수긍했다. 몸이 아픈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좋을지도 몰랐다.
“르네 님.”
로만은 진지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정자세를 하고 대답했다.
“응.”
“오늘 공작님이 무척 기분이 좋으셨습니다.”
“그러셨구나.”
그게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할 말이던가.
“그런데 르네 님이 오스틴을 불렀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좋았던 기분이 바로 안 좋아졌습니다.”
“그, 그렇다고 뭔가 이상한데 참고만 있는 것도…….”
“물론 그렇습니다. 조금만 이상해도 오스틴이나 칼슨을 부르는 건 무척 잘하신 일이지요.”
분명 진짜 잘했다고 칭찬하는 말투인데 왜 혼나는 기분이 들까.
“요즘 제 업무가 수월히 진행될지 아닐지는 르네 님께 모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문득 할 말이 없어졌다. 혼내려는 게 아니라 하소연을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래도 나 때문에 레이넌의 감정 기복이 그렇게까지 심할 리가.
잠시 의문이 생겼지만 그 생각마저 꿰뚫어 보는 듯한 로만의 눈빛에 어색하게 웃었다.
“고생이 많아…….”
웃음만큼 어색한 위로를 건넸지만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르네 님께 위로를 받다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의 생각이 드물게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로만은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등을 돌렸다.
“아까까진 참 좋았는데 이제부터는 지옥이겠지…….”
그런 혼잣말이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기왕 로만을 만난 김에 에린에 대해 상의하고 싶다는 말을 좀 전해 달라고 할걸.
“오늘은 좀 피곤하니까 그냥 좀 쉬는 게 좋겠어.”
모든 게 갑자기 지치고 귀찮아졌다. 오늘은 그냥 다 그만두고 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스틴을 부르기도 했고, 내 표정이 꽤 지쳐 보이기도 했는지 다들 별말 없이 침대를 살펴봐 주었다.
그대로 누운 나는 생각에 빠질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뭔가 간지럽히는 기분이 들어 눈이 떠졌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레이넌의 얼굴이 보였다.
“나 때문에 깼나.”
꿈인가.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런 나를 보고 레이넌은 옅게 웃고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손가락이 와 닿자 그제야 알았다.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그래도 얼떨떨한 건 여전해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그는 베개를 세워 기대앉기 편하게 해 주었다.
“온종일 잠만 잤다지. 많이 피곤했나 보군. 그래도 뭐라도 좀 먹어야 하지 않겠나.”
말을 마친 그는 손짓을 했다.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린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왜 세실이 아니라…….”
“아, 세실은 바쁘니까 이런 건 제가 해야죠.”
에린은 눈을 접으며 대답했다. 물론 대답은 나를 향한 것이었지만 시선은 레이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럼 제가…….”
“아니.”
레이넌은 에린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딱 잘랐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쟁반을 받아 들었다.
“아니, 그래도 제가 할 일인…….”
에린은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제 됐으니 가 보도록.”
단호한 레이넌의 축객령에 에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섰다.
“오스틴 말로는 특별히 건강엔 이상이 없다던데.”
“네. 그냥 그동안 정신없이 지냈던 터라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온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레이넌은 내 옆에 앉으며 이리저리 내 얼굴을 살폈다. 세심한 눈길이 따스해서 어쩐지 서러워졌다.
만약 정말 몸이 아팠더라면 이렇게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어 서럽지는 않았을 텐데.
왜 이렇게 기분이 휙휙 바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내내 잤으니 뭐라도 먹지.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걸로 준비하라고 했어.”
그는 쟁반을 내 다리 위에 올려 주었다.
“아니, 굳이 침대에서 먹지 않아도 되긴 하는데…….”
“지난번에 내가 간호했던 거 기억하나?”
“……네.”
“그때 내가 뭐든 빨리 배운다고 했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여 줄 좋은 기회군.”
침대에서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건강에 무리가 없다는 말이었는데 대화가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따라갈 수 없는 흐름에 정신을 놓고 있는 사이 레이넌이 포크를 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제가! 제가 먹을게요. 그 정도는 할 수 있답니다.”
얼른 그의 손에서 포크를 빼 들었다. 순식간에 포크가 빠져나간 빈손을 잠시 아쉬운 듯 바라보던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신 양이 많지 않으니 다 먹도록 해.”
“네. 그럼…….”
나는 포크를 든 채로 레이넌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레이넌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어색한 눈빛을 주고받다가 그도, 나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그만 가 보셔도 되는데요.”
“다 먹는 건 보고 가지.”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레이넌은 손짓했다. 나도 모르게 그를 따라 손을 들어 올렸다.
만족스러운 레이넌의 표정을 보고 떨떠름하게 음식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불편해서 제대로 먹을 수는 있을까요?
…라는 물음은 음식과 함께 속으로 삼켜 냈다.
레이넌은 정말로 내가 다 먹을 때까지 옆자리를 지키고 있을 작정인 듯했다.
차라리 빨리 먹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속도를 붙였다. 그러던 때 레이넌이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너무 급하게 먹지 마. 아플라.”
친근한 그의 말투에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장이 빨리 뛰는 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건 레이넌의 앞에서만이었다.
아니, 레이넌은 왜 이렇게 자꾸 사람을 착각하게 만드는 걸까.
이게 모두 착각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