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가만히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자 한참을 내 손등에 제 체온을 남긴 그는 입술을 뗐다.
그러고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익숙하지 않은 각도였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아멜리아는 오늘까지 휴가를 줬어. 당장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아서.”
“……네.”
“내일부터는 아멜리아와 절대 떨어지지 마. 잠도 같은 방에서 자도록 말해 놨으니 불편해도 당분간은 참고.”
“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는 나직하게 말을 하다가 중간에서 멈췄다.
잠시 눈을 아래로 깔고 침묵을 지키던 그는 곧 다시 시선을 마주쳐 왔다.
“아니야. 그대는 절대 다치지 말고 지금 이대로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돼.”
뭔가 억지 같기도 한 말이었지만 레이넌은 꽤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르네, 약속해. 그렇게 해 주겠다고.”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레이넌은 뭔가 초조한 듯 내 대답을 재촉했다.
그 모습이 꽤 간절해 보여서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르네, 약속해 줘.”
“네. 약속할게요.”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다. 웃었는지, 아니면 그저 멍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
레이넌은 내 대답을 듣고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돼.”
그러고는 붙들고 있던 손을 잡아끌었다. 허리에 그의 손이 감겼다.
“만약 나 때문에 그대가 휩쓸려서 다치거나 상처 입으면 많이 슬플 것 같군.”
레이넌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내 품에 안긴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이따금 레이넌의 말은, 눈빛은, 행동은 나를 착각하게 만들었다.
레이넌이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레이넌은 종종 꼭 진짜 그의 약혼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런 착각은 내게 이로울 게 없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조금씩 상처받고 있을지도 몰랐다.
상처라니……. 이건 또 내가 꼭 그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
끝없이 뻗어 나가는 생각의 끝에 나타난 말도 안 되는 또 다른 착각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다시 생각에 빠져드는 대신 나는 내 품에 안긴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머리칼이 꼭 레이넌과 같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기분 좋지만 내 손 사이를 스르르 빠져나가는, 그와 꼭 닮았다.
***
다음 날 아침, 나는 침대에 머리를 묻고 좀처럼 이불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어제의 일이 자꾸 떠올라 얼굴이 달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이불 속에 있는 게 이런 얼굴을 감추는 가장 현명한 방법처럼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를 안아 주고 머리카락까지 쓰다듬었을까. 아니, 물론 그런 스킨십이야 이제까지 많았지만…….
“이렇게까지 심장이 뛰지는 않았다고.”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이불 속에 틀어박혀 식사도 하지 않고 들리지 않게 혼잣말만 중얼거리니 다들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아멜리아도, 세실도 조심스럽게 와서 한마디씩 건넸지만, 이불 밖으로 손만 내밀어 괜찮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제대로 전해진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단 지금 당장 나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르네 님, 정말 어디 아프신 건 아녜요?”
아멜리아는 이로써 같은 질문을 세 번째 했다. 좀 전에 그랬듯 손으로 대답하려던 나는 이불 밖으로 눈만 빼꼼 내밀었다.
“오스틴 좀 불러 줘.”
“아프신 거 맞죠? 어디가, 얼마나 아프신 거예요?”
오스틴을 불러 달라는 내 말에 아멜리아는 놀라 침대에 앉으며 내 얼굴을 살폈다.
그래 봤자 이마와 눈 정도였기에 답답한지 이불을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이불을 세게 붙들고 놓지 않자 그녀는 한숨을 쉬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많이 아프세요? 차라리 칼슨을 부를까요?”
“아니야. 아픈 건 아닌데……. 오스틴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오스틴 좀 불러 줘.”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서도 아멜리아는 세실에게 눈짓했다. 세실은 그녀의 뜻을 알아듣고 바로 방을 나섰다.
“르네 님, 정말 어디 아프세요? 제가 좀 봐 드려요?”
아멜리아의 등 뒤에서 에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픈 거 아니야.”
내 말에 에린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침대에 앉으려다 아멜리아를 보고는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그래도 같이 지낸 시간이 있는데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에린은 살갑게 말하며 내가 붙든 이불을 들추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 이불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에린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르네 님, 오스틴이 왔습니다.”
다행히 세실이 금방 오스틴을 데리고 왔고, 나는 그제야 이불 속에서 벗어났다.
“다들 나가 있어.”
내 말에 가장 당황한 건 아멜리아였다. 내가 그녀마저 내보낼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미안해. 아멜리아도 잠시만 나가 있어 줘.”
내 말에 아멜리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별말 없이 방을 나섰다.
“아프신 곳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프다기보단……. 요즘 몸이 이상한데.”
“어디가 어떻게 이상하십니까?”
“음……. 갑자기 심장이 너무 뛰어서 숨쉬기가 힘들 때도 있고, 몸에 열이 확 올랐다가 또 갑자기 괜찮아지기도 하고.”
“음……. 그 외에 다른 증상은요?”
“그거 말고는 딱히…….”
내 설명을 들은 그는 진지하게 진료를 보며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이런 증상은 없냐, 저런 증상은 없냐, 이런 질문들이었고, 모두 나와는 상관없는 증상이었다.
“딱히 건강이 나쁘신 건 아닙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진료 결과가 나왔다.
“오히려 건강한 편에 가까우십니다.”
“그럼 내가 말한 증상들은 어떻게 하면 없어지지?”
“그건 아마 심리적인 요인이 크지 않을까 싶은데요. 요즘 염려스러운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염려…….”
“보통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정신이 피곤하거나 근심이 많으면 그럴 수 있지요.”
“그렇구나.”
“혹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현상?”
“네. 요즘 공작님과 한창 좋을 때가 아니십니까. 그러니…….”
“그 얘기는 그만.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네.”
이어지는 말은 어쩐지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무슨 말이 이어질지 알 것 같았고, 어쩌면 지금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혹시 달리 불편하거나 몸이 안 좋으시면 언제든 부르십시오.”
“응.”
오스틴이 방을 나서자마자 다시 방은 북적거렸다. 꽤 초조하게 기다렸던지 아멜리아는 평소와는 달리 여유가 사라진 얼굴로 돌아왔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 거예요?”
“응? 건강하대.”
“네?”
걱정을 끼칠까 일부러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걸까. 아멜리아는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말로. 그냥 요즘 걱정이 많아서 그런 것 같대.”
“걱정이 많으셔서요?”
“응. 아무래도 뭐 이래저래…….”
말끝을 흐렸지만 아멜리아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최근 파티에서 있었던 일도 들었고, 그 외에도 예전에 비해 많은 변화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니 아멜리아의 귀에는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던 듯했다.
세실과 에린이 있어서일까. 아멜리아는 더 묻지는 않았다.
“그래도 공작님께는 보고하겠습니다.”
“응.”
어차피 어떻게든 레이넌에게 알려질 일이었다. 아마 오스틴과의 대화 역시 금세 레이넌이 알 수 있을지도.
조금 전 아멜리아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해도 아마 레이넌 역시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터였다.
아멜리아가 방을 떠나자마자 에린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곁에 찰싹 붙었다.
심란한 마음에 잠시 멍하니 있었던 터라 이불 속으로 들어갈 기회를 놓친 것이 잘못일까.
에린은 걱정 어린 말들을 늘어놓았다.
물론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그 후에 이어질, 진짜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한 준비 과정인 듯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그녀는 내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궁금한 게 있는데……. 르네 님, 정말 임신하셨어요?”
그녀가 소문이나 남의 일에 관해서는 꽤 집요한 성격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왜 궁금해?”
제대로 상대해 주면 언제까지 귀찮게 할지 나조차 예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에린의 의지가 보통 때보다는 강했던 모양이었다.
내 시큰둥한 되물음에도, 매섭게 응시하는 세실의 시선에도 에린은 전혀 반응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 맞으면 그만큼 더 조심하셔야 하잖아요. 르네 님을 모시고 있으니 저희는 당연히 알고 있어야죠.”
“그런가. 괜찮아.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챙길게.”
“그래서 임신이 맞는 건가요?”
“음……. 임신이 맞냐고?”
세실이 듣지 못하게 일부러 작게 물은 것이 무색하게 나는 조금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제야 에린의 질문을 알아챈 세실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르네 님, 저희는 당연히 르네 님의 건강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세실의 말에 에린은 든든한 아군이라도 얻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을 듣고서는 그대로 굳어 버렸지만.
“하지만 굳이 저희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서든 최선을 다해 르네 님을 모시는 것이 저희의 일이니까요.”
나에게 말했지만 세실의 시선은 에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에린 역시 날카로운 시선을 그녀에게 보내더니 금세 표정을 바꾸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정말이에요?”
나를 위해서는 무슨. 지금 에린의 눈은 누군가의 가십을 떠들던 때의 눈과 아주 똑같았다.
그만큼 반짝이는 그녀의 눈은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럴 때는 예전에 로만이 알려 준 방법을 또 쓰는 수밖에.
“글쎄. 잘 모르겠는데.”
“르네 님이 모르시면 누가 알아요.”
에린은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까르르 웃었다. 나는 큰 비밀이라도 알려 줄 것처럼 조심스럽게 손짓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귀를 가까이했고,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작님께 여쭤봐. 공작님은 알고 계시니까.”
내 말에 에린은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을 했다.
“그래도 한때 가장 가까운 친구였는데…….”
서운하니, 어쩌니. 자기가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걱정하는지 나는 모르니, 어쩌니…….
에린이 그간 붙어 여러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 낸 덕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능력이 생겼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 에린이 이렇게 찰싹 붙어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여길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한참 조잘대던 에린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그러고는 뭔가를 찾기라도 하듯 나를 유심히 살폈다.
“왜?”
무시하고 싶었지만 끈질긴 시선을 좀처럼 거둘 생각이 없어 보여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니요. 공작님께서 르네 님의 어디가 그렇게 좋으셨을까 궁금해서요. 혹시 들으셨어요?”
언젠가 에린이 말했었다. 남의 연애사만큼 즐거운 이야기는 없다고.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인지, 혹은 정말 내 연애사가 궁금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말이 있었다. 나는 씩 웃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에린, 네 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