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는 내 존재에 답답한 나머지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 나왔다. 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꽤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은데요. 공작님이라면 알아내실 수 있지 않을까요?”
환한 얼굴로 레이넌에게 몸을 가까이 기울이며 물었다. 그만큼 나에겐 간절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넌에게는 황당한 제안임이 분명했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다시 몸을 뒤로 물렸다.
“아니, 누군가를 특정하면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조금 전에도 말씀하셨고 그래서…….”
변명과 같은 말은 레이넌의 웃음소리에 묻혔다.
“그대는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쪽으로 간단 말이야. 자기 뒷조사를 해 달라는 사람은 처음 만나 보는군.”
“저도 제 뒷조사는 처음 부탁해 보는 건데요.”
정말 진지하게 한 부탁이 그에겐 재미로 다가간 것이 조금은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입을 삐죽거리며 대답하자 레이넌은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사실 해 봤지. 뭔가 묘하게 찝찝한 건 있었지만 글쎄……. 그게 슈나이더와 연결이 되는지는 모르겠군.”
“벌써 해 보셨다고요?”
“그래. 에드윈의 보모를 어떤 조사도 없이 그냥 아무나 들여놓을 줄 알았나.”
레이넌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그의 대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처음 이 부자를 만났을 때의 어색하고도 숨 막히는 상황은 여전히 눈에 선했다.
그 정도로 사이가 괜찮아 보였으면 애초에 이런저런 고생도 하지 않았을 텐데.
나로서는 당당한 그의 말이 오히려 황당하게 들렸다. 레이넌은 그런 내 속내를 금세 읽어 냈다.
“그래. 그런 줄 알았나 보군.”
역시 솔직히 말하는 게 정답이었다. 어설픈 거짓말을 해 봤자 통하지 않았을 것을 새삼 다시 확인했다.
“일단 그때는 공작님이 에드윈에게 크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으니까요.”
“그래. 그렇게 보이길 바랐으니 성공적이었군. 아무튼 로만에게 조금 더 철저하게 조사해 보라고 하지.”
레이넌이 그렇게 말하니 안심이 되면서 동시에 불안도 함께 커졌다.
“만약…… 제가 정말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면 어쩌죠?”
그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간 잘해 줬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중에 가장 마음에 남는 건 역시나 레이넌과 에드윈이었다.
조금 울적한 기분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로하든 냉정한 현실을 알려 주든, 레이넌에게서 금방 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에게도 난감한 일이겠지. 작게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르네.”
“네.”
다른 때보다 진지한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레이넌은 나와 눈을 마주친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 아니 내게 뭔가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곧 마음을 정했는지 입을 열었다.
“왜 그대의 일인데 꼭 남 일처럼 말하는 거지?”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레이넌은 나를 의심하는 것도, 책망하는 것도 아닌 눈을 하고서 말했다.
“르네, 말해 봐. 뭘 감추고 있는 거지?”
이번에는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그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강 그럴듯한 이야기로 둘러대는 것이 나을까. 아니, 그런다고 레이넌을 속여 넘길 수 있을까.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레이넌에게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한다고 한들 과연 그가 믿어 줄까.
그렇다면 역시나 뭔가 다른 말로 둘러내는 것이 나을 텐데…….
적절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야 이 상황을 잘 넘어갈 수 있을까.
레이넌은 한참을 망설이는 나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고요히 와 닿는 눈빛이 엄청나게 부담스럽다는 것을 그는 과연 알기나 할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나마 진실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기억이 대부분 사라졌어요.”
“기억이 사라졌다?”
“네. 제가 기억하고 있던 건 여기에서 일하는 시녀라는 것뿐이고 다른 건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았어요.”
“갑자기 그랬다는 말인가.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것도 기억이 안 나요. 딱히 다친 곳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기억만…….”
온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가 르네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빙의했다는 얘기보다 이게 조금 더 현실적인 대답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억이 모두 사라졌다는 걸 과연 믿어 줄까. 자신은 없었다.
“다행히 몸은 기억을 하고 있었는지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어요. 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말로 눈치껏 관계는 파악했고요.”
나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하다가 결국 말을 멈췄다.
레이넌은 나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믿을까. 제발 믿어 줬으면.
허무맹랑한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있을 법한 일 아닐까.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그를 열심히 설득했다. 말로 하지 않는 이상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아니, 차라리 설득하기보다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더 나을지도.
레이넌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생각하다 보니 절로 긴장이 됐다.
그가 생각에 잠긴 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지만 유달리 시간이 느리게 흘러갔다.
생각이 끝났는지 레이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입만 바라보느라 내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렇군.”
“네?”
생각 외로 간결한 대답에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왜 그런 반응이지?”
“아니…… 믿어 주시는 건가요?”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레이넌은 조금은 짓궂은 얼굴을 했다.
“거짓말인가.”
“아니요! 그런 건 아니지만 쉽게 믿을 만한 이야기도 아니라서…….”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은 없었나.”
“한참은 혼란스럽기도 했고 일단 분위기를 파악하느라 바쁘기도 했죠. 무엇보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래. 그럴 만한 이야기긴 하지.”
“그러다 보니까 말할 기회를 놓쳐 버리기도 했고요.”
“그렇군.”
“그런데 공작님…….”
“그래.”
“조금 많이 황당한 이야기인데……. 믿어 주시는 건가요?”
“그렇지 않아도 그대는 이상한 면이 많았거든. 그게 기억을 잃었다고 하면 오히려 말이 되는 상황이라서 말이지.”
“제가 이상한 면이 많았다고요?”
“역시 몰랐군.”
“네. 많이 이상했나요? 어떤 면이?”
“제국민이라면 아이라도 알고 있을 법한 당연한 상식이 그대에겐 많이 부족했지.”
“아.”
그래도 꽤 잘 넘겨 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건국제에 관한 것도 그렇고.”
그 얘기가 나왔던 때야말로 그 어느 순간보다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저택만 벗어나면 모든 게 신기한 것투성이더군, 그대는.”
“제가 그랬나요?”
“그래. 가장 이상했을 때는 얼마 전 밤에 거리에 나갔을 때지. 웬만한 귀족 아가씨보다 세상 물정을 모르더군.”
슈나이더와 관련해서 사실대로 말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내 생각보다 거짓말에 더 서툰 것 같았다.
“그럼 형제에 관한 이야기는?”
“형제요?”
뭘 묻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을 되짚어 봐도 떠오르는 것이 없어 되묻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설명했다.
“전에 승마했을 때 기억하나. 내가 그대를 처음 말에 태웠던 날.”
“아, 그날이요. 네. 그날 형제에 관한 이야기를 했던가요?”
“내가 형님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대가 그랬지. 그대는 형제가 없다고.”
“아…….”
그러고 보니 그런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아마 형제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는 이야기를 했던가.
“가족에 대한 기억도 사실 없는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요. 기억에 없는 사람을 지어내는 것보단 혼자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그렇군. 내가 조사한 바로는 그대에겐 여동생이 있었거든.”
“아, 그런가요?”
“사이는 안 좋아서 남남처럼 지낸 지 오래라고 했지만, 굳이 숨길 사실은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내내 조금은 찝찝하게 남아 있었고.”
“그러셨구나.”
“그래. 그때는 그렇게 넘어갔지만, 여러모로 그런 일들이 모이니 신경이 쓰였던 것도 사실이었지.”
“죄송해요. 뭔가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죄송할 일은 아니야. 어차피 일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으니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고.”
절로 몸에서 힘이 빠졌다. 뭔가 말을 한 것만으로도 큰일을 해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적어도 그런 사소한 일로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서 최대의 비밀을 털어 낸 것 같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레이넌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는 참 재미있어서.”
“즐거우시다면 다행이네요.”
“그래. 그대여서 참 다행이야.”
“네?”
이 대화의 흐름은 정말 따라갈 수 없었다.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내가 재미있어서 다행이라는 건가.
좀처럼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레이넌은 대답 대신 짙은 시선을 내게 보냈다.
갑자기 깊어진 눈빛에 당황한 건 나뿐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작은 스킨십이라도 있었을 텐데 오늘은 그럴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이제 와서 새삼 나를 눈에, 혹은 마음에 담기라도 하듯 그는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공작님?”
“그래.”
“일단 뜬금없는 이야기인데도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그는 과연 내 이야기를 듣고 있기는 한 걸까.
무얼 이야기하든 그는 “그래.”라고 대답할 것만 같았다.
확인을 위해 이상한 질문을 한번 던져 볼까, 생각했지만 곧 그런 마음을 접었다.
어쨌거나 그가 내 말을 믿어 줬고, 나는 더는 소소한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감사도 표했으니 할 일은 모두 한 셈이었다. 그러니 굳이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저는 그럼 이만…….”
“그래. 나중에 보지.”
“네.”
일단 끈질기게 닿는 시선을 조금이라도 피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때, 레이넌은 내 손을 붙들었다.
언젠가 그랬듯 천천히 내 손을 들어 올린 그는 입술을 내렸다.
손등에 닿는 그의 체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딘가 익숙한 모습은 비교적 최근의 기억에서 찾을 수 있었다.
프러포즈한 그날의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기도 했다.
뭔가 경건한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는 것 같았던 그날과 달리 오늘은 가득 차오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를 방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