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너까지 날뛰면서 시선을 모으지 말란 말이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몸을 사려야지.”
캐서린은 한심하다는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어쩌다 이런 거랑 함께 일을 하게 됐나, 하는 자조도 묻어났다.
“괜히 들쑤시지 마. 르네가 이 일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것, 그거 하나에 감사하면서 조용히 지내.”
다시금 나온 르네의 이름에 에린이 울컥해서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성큼 다가온 캐서린이 에린의 어깨를 세게 누르자 그 기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명심해. 일을 그르치면 내가 먼저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작지만 묵직한 경고에 에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에린 자신 때문에 일이 잘못된다면 캐서린이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니, 캐서린이 가만히 있는다고 해도 자신은 무사하지 않을 터였다.
“이만 가 봐. 그리고 이제 여기에 얼쩡대는 건 그만두고 르네 님을 정성껏 모셔야 하지 않겠어? 네 살길도 그쪽에서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캐서린은 마지막까지 에린의 성질을 돋우려는 듯 르네의 이름을 들먹였다.
캐서린의 도발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에린은 잔뜩 신경질을 내며 방을 떠났다.
“분명히 일부러 저러는 거야.”
에린이 르네에게 예민하게 구는 걸 캐서린도 진작 알고 있었다.
르네한테 이렇게까지 화가 났는데 그녀의 이름을 자꾸 언급하는 건 에린 자신에게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정말 공작 부인이라도 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거겠지.”
애써 화를 누르며 자신을 다독였지만 이미 한계치를 넘은 감정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초조함만 커졌다. 르네의 자리가 공고해질수록, 레이넌의 애정이 르네에게 향할수록.
도대체 르네와 제가 다른 것이 뭐가 있어서?
조금 예쁜 것 말고는 에린보다 나은 구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 운이 좋았을 뿐인 거지.”
에린은 그간 보았던 르네의 모습을 곱씹었다.
귀한 보석을 시큰둥한 눈으로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것도, 예쁘고 고운 것들을 몸에 두르고서도 관심 없다는 듯 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린은 조금이라도 자세히 보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것들을 눈앞에 두고서 르네는 늘 그랬다.
무엇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 대신 파티에 갔으면 좋겠다는 둥, 쇼핑을 대신 해 줬으면 좋겠다는 둥 말하는 그녀가 얄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르네의 곁에 어떻게든 붙어 있어야 하는 상황에.
그래야 레이넌을 만날 기회라도 주어지는 것이.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화가 나도, 짜증이 치솟아도 결국은 르네의 방 앞으로 돌아왔다.
깊은 심호흡으로 애써 마음을 누르려고 시도한 후에 방으로 들어섰다.
“아, 에린. 요즘 바쁜가 봐?”
아무렇지도 않게 에린을 맞이하는 르네를 보고 심호흡까지 한 노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뻔했다.
하지만 에린은 그녀를 밀어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르네에게 다가갔다.
“르네 님.”
***
방으로 들어서는 에린은 발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저런 모습은 예전과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 처음부터 그녀는 슈나이더의 사람이었으니 어쩌면 다른 모습을 찾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지도 몰랐다.
“요즘 왜 이렇게 바빠?”
뭔가 자연스럽게 할 말이 없었던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다행히 크게 어색한 모습은 아니었는지 에린은 언제나처럼 살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캐서린 님이 뭘 좀 시키셔서요.”
“아, 캐서린이…….”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나온 캐서린의 이름에 더는 자연스러운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어색한 내 얼굴을 본 에린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혹시 저 찾으셨어요?”
“아니, 아니야. 피곤하겠다 싶어서.”
“아니에요. 제가 자꾸 자리를 비워서 죄송하죠.”
“세실이 있으니까 여기는 너무 신경 쓰지 마.”
에린이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그녀와 대화를 이어 가는 게 피곤했다.
그래서 에린의 말을 기다리는 대신 고개를 돌려 세실에게 말했다.
“공작님을 잠깐 뵈어야겠어.”
“미리 말씀을 드리고 올까요?”
“아니. 집무실에 계실 거 같은데. 못 뵈면 할 수 없지만 일단 가 볼래.”
“알겠습니다.”
세실이 대답하자 에린이 그녀의 곁에 섰다.
“제가 모실게요, 르네 님.”
“아니야. 지금까지 바빴던 것 같은데 좀 쉬어. 세실이랑 다녀올게.”
“아니에요. 이제까지 자리를 비웠으니 더욱이 제가 모셔야죠.”
대화를 나누는 것도 피곤한데 레이넌에게 가는 길에서까지 단둘이 있어야 한다니.
그간 묘하게 거리를 두던 에린이 갑자기 찰싹 붙으니 불편함이 더 커졌다.
“아니야. 내가 갈게. 르네 님이 말씀하신 대로 너는 좀 쉬어.”
나의 불편함을 알아챈 건지, 아니면 제 일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세실이 에린을 향해 딱 잘라 말했다.
어떤 이유에서였든 그녀의 말은 내게 반가웠다.
세실이 그렇게 말하면 에린도 더는 조르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에린은 세실처럼 단호한 성격을 지닌 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으니까.
예상한 대로 에린은 세실이 말하자 더는 자신이 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 저는 정리 좀 하고 있을게요. 다녀오세요.”
나는 에린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런 모습조차 뭔가 의도가 담긴 게 아닐까 의심이 일어서였다.
에린의 사소한 행동도 이제 더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내가 예민하게 느끼는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이제 예전처럼 에린을 대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앞으로 더 피곤해지겠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최근 며칠 그랬듯 종종 자리를 비우면 그래도 좀 괜찮을 텐데.
하필 오늘부터 또 뭔가 찰싹 붙어 지낼 기세였다.
차라리 에린이 불편하다고, 바꿔 달라고 레이넌에게 부탁할까.
아니, 그랬다가 더 귀찮게 하면 어쩌지.
또 울면서 부탁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르네 님?”
“응?”
걱정이 끝없이 늘어만 가던 찰나 세실의 부름으로 겨우 정신을 차렸다.
“도착했습니다.”
“아…….”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레이넌의 집무실 앞에 서 있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요즘 좀 이상하신데…….”
“걱정시켜서 미안. 그냥 요즘……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져서 그래. 곧 괜찮아지겠지.”
내 말에 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약혼한 직후고, 황궁까지 다녀온 터라 제법 그럴싸한 이유로 들린 듯했다.
“혹시 조금이라도 몸에 문제가 있거나 하면 바로 말씀하셔야 합니다.”
“알았어.”
세실은 내 대답을 듣고는 안심한 듯 레이넌의 시종에게 내가 왔다는 걸 알렸다.
다행히 레이넌은 집무실에 있었고, 내 방문을 허락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회의 중이었는지 여러 사람이 내 방문으로 그의 집무실을 떠나야 했다는 점이었다.
에린을 피할 겸 캐서린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었는데.
그리 오래 걸릴 용건이 아니었던 터라 괜히 나 때문에 다들 쫓겨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잠깐이면 되는데 괜히 저 때문에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마. 그대 덕에 나도 잠시 쉬는 거니까. 좋은 때에 왔어.”
레이넌은 전혀 그럴 것 없다는 듯 태연하게 말하며 나를 소파에 앉혔다.
내 옆에 자리한 그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대가 나를 찾아오는 일도 다 있고.”
그게 그에겐 꽤 만족스러운 일이었나 보다.
흐뭇한 미소를 보고 있으니 잠시나마 걱정은 잊고 나도 함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며칠간 머리와 마음속에 가득 찼던 답답함이 잠시나마 잊혔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쉬셔야 하니까 얼른 말씀드리고 갈게요.”
나야 그를 보고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지만 레이넌은 아닐 것이다. 그를 조금이라도 쉬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서둘러 용건을 말하려는 내 모습에 레이넌은 조금 서운한 기색을 비쳤다.
“시간이야 그대가 여기 있는 만큼 쓸 수 있는 것을.”
“아. 그런가요. 그럼 차라도 한 잔 내어올까요?”
“그건 그대가 할 일이 아니야. 일단 용건부터 들어 보지.”
“그게, 에린과 마빈 말고 또 다른 슈나이더의 사람이 로에리안가에 있는 것 같아요.”
슈나이더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레이넌의 표정은 눈에 띄게 변했다.
내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던 듯했다.
레이넌은 잔뜩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 말이지?”
“확실하진 않지만 제 생각엔 캐서린도 슈나이더 쪽 사람인 것 같아요.”
이번엔 레이넌도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미동도 없이 그대로 있는 그가 괜찮은 걸까 확인이라도 해 보려는 때, 레이넌은 눈을 깜빡였다.
“캐서린이?”
“네.”
이제까지 어떤 말을 해도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한 레이넌이었다.
누군가가 침입을 해 왔을 때도 놀라지 않았던 그가 캐서린의 이름이 나오자 당황했다.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 같은 레이넌을 보며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고 설명했다.
“슈나이더는 제가 에드윈의 보모가 된 게 우연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거든요. 일부러 저를 그 자리에 앉혔다는 듯이.”
“우연이 아니다…….”
“네. 우연이 아니라면 캐서린이 의도적으로 저를 선택했다는 거잖아요.”
“그래. 내가 일부러 그대를 지목하지 않는 이상 시녀에 관한 일은 캐서린이 담당하니까.”
“네. 게다가 에린도 요즘 자리를 자주 비우는데 캐서린이 뭔가 일을 시켰다고 하고…….”
“그래?”
“일단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잘했어. 누군가를 특정하면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죄송해요. 캐서린을 많이 믿고 계셨잖아요.”
“그대가 죄송할 일이 아니지.”
“그래도 오래도록 시녀장을 해 왔으니 공작님도 꽤 신임하셨을 텐데.”
“아니야. 어차피 누가 됐건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그보다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우연이 아니라 일부러 에드윈의 보모를 골랐다면 왜 하필 그대를 선택했을까?”
그의 질문에 나는 고민에 빠졌다. 레이넌의 의문은 당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솔직하게 말하느냐, 혹은 거짓말로 상황을 넘겨 보려는 노력이라도 할 것이냐. 둘 중 하나였다.
나도 내가 어떤 입장인지 알지 못하니까 나에겐 꽤 어려운 선택이기도 했다.
“르네?”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모르겠다?”
“슈나이더가 저도 그의 사람이라는 식으로 말하던데……. 저는 전혀 짐작 가는 게 없어서요.”
“그가 그렇게 말했나.”
“네.”
어차피 거짓말은 잘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레이넌은 가끔 속마음이 보이는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내 심중을 쉽게 읽어 내고는 했다.
그러니 괜한 거짓말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솔직히 말하는 편이 나았다.
무엇보다 혼자 껴안기에는 너무도 무섭고 무거운 고민이기도 했다.
누구한테든 털어놓고 상담을 하고 싶었다. 특히 상대가 레이넌이라면 깔끔한 답을 내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기도 했다.
내 말이 뜻밖이었던 듯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하면 내 속내가 보이기라도 하듯.
“공작님께서 제 뒷조사라도 해 주시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