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서린 님이 뭔가 시켜서 요즘 바쁜 것 같더라고요.”
“캐서린이?”
세실은 다른 의미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못마땅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정말 시킨 일이 있는 건지, 딴짓을 하는 건지.”
세실의 혼잣말에 나는 작게 웃었다. 그녀는 조금 민망한 듯 변명처럼 말을 덧붙였다.
“아니, 흉을 보려는 건 아니고…….”
“아니야. 에린이라면 그럴 법해서 웃은 거야.”
에린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의 이름을 들먹이며 편하게 쉬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하긴, 르네 님이 저보다 더 잘 아시겠네요.”
“일단 그냥 내버려 둬. 차라리 없는 편이 조용하고 좋으니까.”
“알겠습니다.”
눈앞에 에린이 자꾸 왔다 갔다 하면 그건 그거대로 속이 시끄러울 테니 오히려 잘된 일 같았다.
그녀가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걸 레이넌도 이미 알고 있다고 하니 어쨌거나 그녀를 좇는 눈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에린이 보이지 않는 것만 해도 훨씬 마음이 편했다.
나는 문득 파티가 끝나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레이넌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에린이나 마빈이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건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음…….”
슈나이더의 입에서 나온 소리라고 말했을 때 레이넌은 놀라지 않았다. 심지어 확신을 얻었다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레이넌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꽤 오래전부터 그들이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한 듯했다.
“왜 그냥 두고 보셨던 거예요?”
“그게 편하니까.”
“편하다고요?”
“어차피 슈나이더의 사람이 그 둘만 있는 건 아니겠지. 그 둘을 치워 낸다면 새로운 사람을 집어넣거나 공작저의 사람을 포섭하려 했을 거야.”
“그렇군요.”
그럴듯한 레이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왜 에린을 제 시녀로 보내셨어요?”
“그건 그대가 그렇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건 그렇지만……. 저는 몰랐잖아요.”
에린을 시녀로 보내 달라고 했을 때 보았던 로만의 묘한 시선은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이미 레이넌과 로만은 에린이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나는 몰라서 그렇게 해 달라고 했지만, 알고 있던 레이넌은 왜 굳이 내 말을 들어준 걸까.
“그래서 아멜리아에게 떨어지지 말라고 해 놓지 않았나. 게다가 뜻밖에도 그대가 알아서 잘 처리하기도 했고.”
“처리요?”
내가 뭘 어떻게 처리를 했지? 기억을 돌이켜 봐도 그런 일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세실을 가까이 두고 에린은 잡일 담당으로 밀어 두었잖아. 잘했어.”
“아, 그거…….”
그냥 불편해서 한 일인데. 레이넌의 눈에는 내가 에린을 치워 낸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슈나이더가 제 입으로 에린과 마빈에 대해 말했는데, 이제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글쎄. 보통은 자기가 먼저 치워 버리겠지만……. 과연 슈나이더는 어떨까.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
레이넌의 말이 맞았다. 슈나이더가 어쨌거나 제 입으로 털어놓은 비밀이었으니 나는 그들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리라 여겼다.
하지만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나도 에린은 여전히 내 옆에 있었다.
요즘 내 곁에 붙어 있는 시간보다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는 게 달라졌다면 달라진 점인데…….
혹시 슈나이더가 에린에게 다른 지령을 내린 걸까.
생각을 거듭할수록 명확해지는 것은 없고, 두통만 몰려올 뿐이었다.
어쨌든 내게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으니 굳이 내 시녀로 남아 있을 텐데…….
“아. 그래서 그날…….”
“네?”
또다시 흘러나온 혼잣말에 세실이 반응했다.
늘 뚱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녀가 꽤 영리한 걸 알기에 얼른 말을 돌렸다.
“응? 아, 아니야. 나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싶은데.”
“금방 준비할게요.”
“고마워.”
어떤 의심도 없이 금방 차를 내릴 준비를 하는 세실을 보고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왜 갑자기 나타나서 뜬금없이 시녀 타령을 하나 했더니.
갑자기 사라졌던 그녀가 내 곁에 돌아오기 위해 그렇게 울면서 부탁한 모양이었다.
내게 곧 시녀가 필요하리라는 건 어렵게 추측할 수 있었을 터였다. 그 당시에도 레이넌과 내 사이로 많은 소문이 돌았으니까.
내가 정말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면 혹시 에린이 소통 창구였던 걸까.
옷장 안을 가득 채웠던 드레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 수입으로는 한 벌을 사는 것도 빠듯했다.
에린과 유독 친하게 지냈던 것도, 수입 이상의 고가품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슈나이더의 사람이었기 때문인 걸까?
다름 아닌 르네가?
“르네라면 나잖아.”
나는 다시 소파에 얼굴을 묻으며 울먹였다. 다행히 내 목소리는 소파에 뭉개져서 세실에겐 들리지 않은 듯했다.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나한테 뭔가를 은밀히 시키는 사람도 없었고, 내가 빙의하고서 월급 외에 따로 들어오는 돈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혼란스럽기만 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다시 차근차근 생각해 봐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일단 슈나이더가 한 말 중에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게 더 중요할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까 슈나이더가 그런 말도 했었지.
“네가 어떻게 에드윈의 보모 자리를 꿰찼는지도 모른다고 할 텐가?”
나이가 들어 몸이 약해진 테레스가 에드윈의 보모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 무렵 저택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일했던 나를 눈여겨본 게…….
생각을 이어 가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래. 시녀들의 인사권을 가진 건…….”
“시녀장님이죠.”
세실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새삼 그렇게 당연한 이야기는 왜 하냐는 듯이.
“그래. 시녀장이지.”
캐서린이 일부러 나를 골랐다면?
슈나이더가 한 말에 대한 답은 거기서 찾아야 할 듯했다.
***
“공작 부인이 되는 건 틀림없이 저라고 하셨잖아요.”
에린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목소리 좀 낮춰. 그리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분명히!”
“아니. 그건 네가 내게 자신 있게 한 말이지.”
에린은 분하다는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짜증스럽게 잰걸음으로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소리라도 치면 마음이 조금은 후련할 텐데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틀린 곳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르네를 추천하면서 그녀를 이용해 공작 부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건 다름 아닌 에린 자신이었다.
“주제도 모르는 게 사람 보는 눈도 없어서야. 쯧쯧.”
분한 마음을 모르지 않을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에린을 책망했다.
그럼에도 뭔가 따질 것 하나 없었던 에린은 결국 르네에게 화살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르네, 그 계집애가!”
“어허. 말을 조심해야지.”
“멍청하고 욕심만 많은 년인 줄 알았는데…….”
“그래. 너보다 한 수 위였구나.”
“캐서린 님!”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에린은 비명과도 같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런 에린의 모습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앉은 캐서린은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기회를 잡지 못한 건 너야. 보모로 보내 준다고 했을 때도, 서쪽 별관에서 일하던 네게 르네를 만날 틈을 만들어 줬을 때도 그렇고.”
“고작 그런 일들로…….”
“아니. 그 모든 순간이 너에게는 기회였어. 그걸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멍청한 줄은 몰랐지.”
에린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르네가 갑자기 딴 사람처럼 변해 버렸을 때부터였을까.
아니, 그때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는 눈에 띄게 머리를 굴려서 에린마저 불안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한층 더 미련해진 그녀를 보고 한시름 놓았다. 성실하기만 한 르네를 레이넌이 곁에 둘 리가 없었다.
마음에 품을 일은 더더욱 없었다. 괜한 짓으로 레이넌의 미움만 사고 르네가 쫓겨나면 그때를 노리려고 했는데…….
르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누리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 와야 할 것들이었는데.
이 상황을 믿을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네가 르네 돈까지 챙기고 있는 걸 모르는 줄 알아? 내가 입 다물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알아야지.”
에린은 캐서린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르네의 돈에 손대고 있다는 것까지 캐서린이 알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르네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알지 못했잖아. 그냥 네가 이용하려고 했던 것뿐. 그렇게 네가 열 낼 만한 일이 아니잖아.”
“하지만…….”
“그래서 뭘 어쩌겠다고? 임신까지 했다는데.”
“정말 임신한 건 맞아요?”
“글쎄.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니 알 도리가 없지. 그리고 임신이 아니라면?”
“아니면 그야…….”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건 같아. 공작님은 이미 르네에게 푹 빠졌으니.”
“과연 그럴까요.”
“주제 파악이라도 제대로 할 줄 알면 좋겠는데.”
“주제 파악이라니요. 아직 약혼만 했을 뿐이잖아요.”
“이제 포기하고 닥치고 있으라고 말로 해야 이해할 모양이로구나. 어림도 없는 네 욕심 때문에 일을 망칠 수도 있어.”
“아직 끝이 아니라니까요? 제가 르네를 밀어내고 공작 부인이 되면 모두가 좋은 거 아닌가요?”
“아니. 차라리 르네가 공작 부인이 되는 게 낫지.”
“어째서죠?”
“너는 고작 지금 네 기분에 휩싸여서 날뛰니까.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르네라고 다를까요?”
에린의 질문에 캐서린은 질린 듯한 얼굴을 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에린의 귀에는 절대 들리지 않을 것을 안 캐서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도 이렇게 상황 파악을 못 하는데 무슨 공작 부인이 되겠다고. 에린, 똑똑히 들어.”
이를 악물고 또박또박 말하는 캐서린의 모습에 에린은 입을 다물었다.
캐서린이 그간 성격과는 다르게 너그럽게 그녀의 성질을 많이 받아 주었다는 걸 에린도 모르지 않았다.
“르네에게 먹이려던 독을 제가 먹은 멍청이가 있지. 르네의 운인 건지, 그저 마빈의 실수인지 알 수 없지만.”
캐서린의 말에 에린도 비웃음을 흘렸다.
‘멍청하긴. 기껏 휴가까지 따라가 놓고 르네나 에드윈의 곁에 다가가기는커녕 내내 떨어져 있다가 겨우 기회를 만들어 놓고서는…….’
“마빈이 실수를 하는 바람에 이쪽도 레이넌 공작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야.”
“그러게요. 자주 만날 기회를 만들고 시도를 했어야지. 멍청하긴.”
에린의 말에 비릿한 웃음을 흘린 캐서린은 신랄한 목소리로 에린에게 말했다.
“너 역시 마빈 못지않게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지?”
“무식하기만 한 마빈이랑 저를 비교하시는 거예요?”
“공작님이 잠잠하신 게 신경이 쓰여. 그나마 마빈이 움직일 정도로 나았다는 건 다행이지만 그래 봤자 이제 그는 당분간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그러니까 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