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렇게 쉽게 이야기해 줄 만한 건가?
그보다 에린과 마빈이라니. 여러 불확실한 정보 속에서 정신없이 헤매다가 한 가지만 짚어 내니 갑자기 충격이 크게 밀려왔다.
“에린이랑 마빈? 공작님, 알고 계셨어요?”
내가 말해 놓고 금세 레이넌에게 되묻자 그는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정말 괜찮은 거 맞나.”
“안 괜찮은 거 같은데요. 에린이랑 마빈이면…….”
입으로 다시 내뱉고 나니 충격은 더 커졌다.
“슈나이더가 제 입으로 그걸 그대에게 말했단 건가.”
“너를 지켜보는 눈이 여럿 있다는 걸 잊지 말도록 해. 에린과 마빈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야.”
나는 슈나이더의 표정과 말투를 최대한 비슷하게 흉내 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던 레이넌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랬단 말이지.”
“진짜일까요?”
“응. 진짜겠지. 우리 쪽도 일단 그렇게 파악하고 있으니까.”
“괜찮은 거예요?”
“그대나 에드윈 주변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 근데 그게 진짜면 그걸 왜 저한테 말해 준 거죠?”
황당할 따름이었다. 레이넌이 그렇게 파악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면 근거는 꽤 확실할 터였다.
레이넌이 눈치챘다는 걸 알고 나한테 말을 한 건가. 그렇다기엔 나중에 슈나이더가 당황한 걸 보면 실수인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착각한 거 같은데. 당황한 얼굴까지 연기한 건 아니겠죠?”
“그대의 눈에 당황했다고 보였으면 아마 연기는 아니겠지.”
“그보다 형님 이야기는 뭐였어요?”
“글쎄. 뭐였을까. 이쪽도 딱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나를 부탁했다고 하더군.”
“그걸 굳이 지금 여기서 꼭 이야기해야 한다고 했다는 건가요?”
“내가 형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걸 아니 조심스러웠던 거겠지.”
내 귀에도 이상하게 들리는 상황인데 레이넌에게는 달리 와닿은 듯했다.
굳이 그걸 지금? 이제 와서?
레이넌의 형이 죽은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형이 레이넌을 부탁했다는 말을 이제 와서 이렇게 급하게 은밀히 해야 할 이유는 또 무어란 말인가.
의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비밀 이야기와 때맞춰 다가온 슈나이더가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의심을 레이넌에게 말하기는 어려웠다.
내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그가 타나베른을 어떻게 여기는지를.
여러모로 복잡한 생각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레이넌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슈나이더도 그대에게 말린 모양이야. 일이 재밌게 됐는데 조금은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레이넌의 말에는 내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단어가 섞여 있었다.
“위험? 누가요? 혹시 저는 아니겠죠?”
떨리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그는 내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아멜리아가 지켜 줄 거야.”
“저라는 말이네요.”
정말 울고 싶었다. 왜 또 갑자기 위험이라는 단어가 내게 붙는 걸까.
아니, 슈나이더가 나에게 말린 건 또 뭐가 있다고.
“돌아가고 싶어요.”
“그래. 폐하도 뵈었으니 이제 굳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필요는 없지. 그만 갈까.”
“네. 얼른 돌아가요.”
정말 여기엔 발도 다시 붙이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려고 그렇게 노력했던 로에리안저가 지금은 내게 가장 안전한 곳처럼 느껴졌다.
***
“표정이 왜 그러세요?”
벨라는 은근히 슈나이더에게 몸을 기대며 물었다.
평소라면 벌레를 보듯 기분 나쁜 내색을 숨기지 않았을 슈나이더는 생각에 잠긴 채였다.
그런 슈나이더의 모습에 자신감을 얻은 듯 벨라는 상체를 그의 팔에 묻었다.
그런 벨라의 노력에도 슈나이더는 좀처럼 그녀를 인식하지 못했다. 그제야 뒤늦게 슈나이더의 시선을 좇은 그녀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만만치 않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곱고 해맑은 얼굴로 말은 아주 신랄하기 그지없다니까요.”
“그런가.”
슈나이더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르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라가 그 사실을 깨닫고 르네에 관한 이야기를 건네자 슈나이더는 그제서야 그녀의 말에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벨라는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곧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살짝 몸을 흔들었다.
슈나이더의 팔과 벨라의 상체가 맞부딪치자 그는 르네에게서 시선을 뗐다.
겨우 제게 돌아온 시선을 확인한 벨라는 그의 목을 감싸 안으려는 듯 팔을 들었다.
곧 모진 마찰음이 퍼졌다. 슈나이더는 매몰차게 그녀의 손을 쳐 내고는 조금 전까지 벨라가 닿아 있던 곳을 탁탁 털어 냈다.
꼭 먼지라도 앉은 것처럼.
“알 수가 없군.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건지, 아니면…….”
“공작님도 저 깜찍한 시녀에게 넘어가신 거예요? 역시 보통이 아니라니까.”
벨라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하자 슈나이더는 그녀의 볼을 손으로 감쌌다.
그의 손길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벨라는 곧 표정을 바꾸었다.
“그 입을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는 벨라의 턱을 세게 쥐며 말했다.
대답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얼른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어주었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 내가 너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리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답니다.”
벨라는 붉어진 턱을 손으로 감싸며 대답했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크라우스가의 아가씨가 어지간히 레이넌에게 분한 꼴을 당한 모양이로군.”
슈나이더는 그런 벨라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내가 그래서 철없고 멍청한 너를 내 옆에 두는 거지. 이런 꼴을 당하면서도 내게 찰싹 붙어 있는 모습도 꽤 귀엽고.”
슈나이더는 고통을 참고 미소를 짓는 벨라를 위로라도 하듯 그녀의 허리를 세차게 감싸 안았다.
벨라는 입술을 꾹 깨물고서도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그래서 르네와는 무슨 이야기를 하셨어요?”
“모르겠군. 다만 확실한 건.”
“확실한 건?”
슈나이더가 말을 멈추자 벨라는 참지 못하고 그의 말을 재촉했다. 다른 때였다면 그런 벨라에게 다시금 모진 말을 퍼부었을 슈나이더였다.
하지만 자존심을 굽히고 그에게 기댄 벨라가 마음에 들었는지 슈나이더는 바로 말을 이어 갔다.
“일을 제대로 못 하고서도 내 돈을 받아 간 녀석들이 있는 모양이야.”
그의 말에 벨라는 까르르 웃으며 슈나이더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쓸모없는 것들은 얼른 없애 버리셔야죠.”
슈나이더는 한심하다는 듯 벨라를 조롱했다.
“멍청하기는.”
로에리안가에 제 사람을 심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벨라는 알지 못했다.
어리광만 부리고 살아온 탓에 떼만 쓰면 모든 걸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여자다운 말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쉽게 없애 버리고 대체재를 넣을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고생하지는 않을 터였다.
슈나이더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나마 있는 것들을 제대로 써먹을 방법을 찾기 위해서.
그의 시선은 어느새 다시 르네에게 닿아 있었다.
분명 에린이 접근해서 일부러 레이넌에게 붙인 여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것이었다.
벨라의 말대로 그 정도로 보통이 아닌 여자일까.
레이넌을 꾀어낼 정도라면 보통 약은 정도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슈나이더의 감은 자꾸 다른 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 가짜에 레이넌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러니 허영심 많은 여자를 이용해 에드윈부터, 그리고 레이넌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닌가.
“그래. 보통이 아니긴 하군.”
저조차 그런 르네의 순진한 얼굴에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술술 내뱉지 않았던가.
물론 그녀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보였다.
“그래도 얼른 해결해야겠군.”
“뭘요?”
스산한 슈나이더의 혼잣말에 벨라는 교태가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말했지. 네게 머리를 바라지 않는다고. 거래의 조건은 오직 네 몸이라고.”
“대신 대가는 확실히 돌려주셔야 하는 것도 아시죠?”
“레이넌의 파멸이라. 그 누구보다 그걸 원하는 사람이 바로 나 아닌가. 그런 면에서 사람은 잘 찾아왔군.”
슈나이더는 연회장을 벗어나는 레이넌과 르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고는 저 역시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벨라를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
건국제의 파티 이후 내게는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왔다.
아니, 겉보기엔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하지만 속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엉망진창인 상태였다.
크게 찝찝하게 남은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타이밍 좋게 나타나 레이넌을 내게서 떼어 놓은 타나베른,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슈나이더의 알 수 없는 말이었다.
그나마 확실한 건 역시나 에린과 마빈이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것.
“전혀 진척이 없잖아.”
나는 머리를 헝클이며 소파에 고개를 묻었다.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으니 세실의 조심스러운 물음이 들렸다.
“르네 님?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안 괜찮아 보이시는데, 칼슨 님이나 오스틴 님이라도 부를까요?”
“아. 그러고 보니 그 일도 있었지.”
오스틴에게 진료를 받겠다고 결심했던 일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레이넌을 보면 여전히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날처럼 숨이 막힐 정도는 아녔다.
일단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레이넌을 봐도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기도 했다.
“요즘 에드윈을 돌보는 건 누구지?”
“캐서린 님이 일단 크게 신경 써야 할 일들을 책임지고 계시고, 대부분은 체이스가 모시고 있습니다.”
“체이스가? 그럼 마빈은?”
“모르셨어요? 마빈이 꽤 오래 아파서 쉬고 있는데.”
“그래? 언제부터?”
“휴가에서 돌아올 때부터 이미 아픈 채더라고요.”
“그럼 휴가 중에 아팠다는 말이야?”
“네. 많이 위독한 건 아닌데 가볍지도 않아서 당분간은 에드윈 님을 모시지 않을 겁니다.”
“어디가 아픈데?”
“글쎄요. 뭔가 잘못 먹었는지 탈이 난 것 같다는 말도 있고요.”
세실은 내가 마빈의 부재를 알지 못했다는 것에 놀란 듯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알려 주었다.
“휴가지에서 뭔가 잘못 먹었다고?”
분명 돌아오기 얼마 전에 마빈을 봤을 때 그는 건강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 내 건강을 챙기던 레이넌과 아멜리아의 행동엔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빈과 만난 직후에 그랬으니까.
그리고 그가 내게 물을 건넸고, 어쩌다 보니 잔을 바꿨는데…….
원래라면 앓아누워야 했던 사람은 나였던 걸까.
“하아…….”
결국 안전한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을지도 몰랐다.
이제까지 괜찮다고 말해 왔던 레이넌이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했으니 앞으로는 앓아눕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지도.
“괜찮으세요? 얼굴이 창백하신데요?”
가늘고 길게, 목숨의 위협 같은 건 느끼지 않고 살아가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누구든 붙들고 하소연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사람도 하나 없다는 게 너무 슬펐다.
“그러고 보니 에린도 요즘 잘 안 보이네?”
울적한 목소리로 묻자 세실은 그런 내 감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