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베른 후작은 아버지와 오랜 친우셨지. 아버지, 형님이 떠나셨을 때 여러모로 날 잘 살펴봐 주시기도 하셨고.”
“잘 살피다니요. 그저 간간이 안부만 전했을 뿐입니다.”
레이넌의 말에 타나베른은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레이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매일같이 사람을 보내셨죠. 그래서 내겐 집안 어른과 같은 느낌이지.”
뒷말을 나를 향한 것이었다.
레이넌의 말에 타나베른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집안 어른이라니. 과찬이십니다. 그나저나 약혼 축하드립니다. 공작님의 약혼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요.”
“급하게 진행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다행입니다. 공작님 곁을 채울 사람을 찾았으니 아버님도, 형님도 이제 한시름 놓으셨을 겁니다.”
타나베른은 금세 붉은 눈을 하고 말했다. 레이넌은 그런 그를 달래듯 말했다.
“그렇게 염려하실 일은 없다니까요.”
“나이가 드니 감상적으로 변해 그렇습니다.”
타나베른은 결국 흐르려던 눈물을 손으로 훔쳐 냈다.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광경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두 사람을 지켜봤다.
한편으로는 레이넌이 이렇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내 눈으로 봤지만 조금은 믿기가 어려웠다.
신기하기도 하면서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레이넌의 곁에 있으면 종종 그가 기댈 만한 사람이 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로만이나 아멜리아는 레이넌에게 가까운 사람이긴 했지만 그들에게 기대거나 마음을 온전히 보이지는 않는 듯했다.
가끔은 그래서 안타깝기도, 쓸쓸해 보이기도 했는데 괜한 걱정을 한 듯했다.
잠시 소소한 대화를 나누던 중 타나베른의 눈이 내게 닿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레이넌에게 물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만 시간을 좀 내어주시겠습니까.”
레이넌은 난색을 보였다. 곧 황제에게 그랬듯 따로 만남을 청했지만 타나베른은 곤란한 얼굴을 하면서도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다.
“물론 약혼녀가 걱정되는 마음은 압니다. 그러면 저 정도 거리는 어떨까요?”
타나베른의 손이 가리킨 곳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았다.
목소리를 낮추면 대화는 들리지 않을 테지만 시야에서 벗어나지도 않았다.
그의 제안을 들은 레이넌은 아주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한번 같은 대답을 주었다.
“내일 따로 뵙는 걸로 하죠.”
“형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한마디로 레이넌의 표정이 바뀌었다. 부드러웠던 분위기도 한순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레이넌에게 꽤 중요한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망설이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저 정도면 바로 보이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거리였다.
“그래. 여기 가만히 있어야 해. 누가 말 걸어도 절대 대답도 하지 마. 그대는 그래도 돼. 알겠나.”
단호한 그의 말에 나는 작게 웃었다. 아이를 놓고 잠시 자리를 비우는 엄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농담 아니야.”
레이넌은 진지한 얼굴로 다시 한번 당부를 하고 타나베른을 따라갔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레이넌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에 시야가 자꾸 가렸기 때문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보였다 사라지는 레이넌을 바라보느라 알지 못했다. 내 옆에 누군가가 다가왔다는 사실을.
“그러고 보니 약혼 축하 인사를 못 드렸군요.”
누군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돌리니 목소리만큼이나 소름 돋는 눈빛을 한 슈나이더가 웃고 있었다.
아주 잠시였다. 레이넌이 내게서 떨어진 것은.
그래. 분명 이렇게 누군가가 접근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인데 레이넌의 시야 밖이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하필 슈나이더라니.
목소리를 내면 레이넌에게 들리지 않을까. 지금이라도 그를 부를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혹시 그게 그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내 발은 언제나 그랬듯 본능을 따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레이넌이 있는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런 나를 보고 슈나이더는 가소롭다는 듯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약혼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보다 크라우스 영애는 어디 계신가요?”
“잠시 다른 분들과 대화 중이군요.”
“아, 그렇군요. 그럼 저도 이만.”
꽤 자연스러운 대화의 마무리가 아닌가.
얼른 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슈나이더는 나를 보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레이넌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와 앞을 막은 그는 나를 위아래로 유심히 살폈다.
질척질척한 뱀이 온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그의 눈길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옆으로 움직이면 슈나이더 역시 끈질기게 내가 움직인 만큼 따라왔다.
“로에리안가에서 시녀로 일하셨다고?”
뻔히 알 만한 이야기를 굳이 입 밖으로 꺼내는 이유는 뭘까.
자존심을 건드리려는 건지, 혹은 그렇게라도 나를 붙들어 두려는 건지.
경험이 부족한 나로서는 그의 속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확실한 건 그와 더는 같이 있고 싶지 않다는 것과 레이넌의 눈에 띄면 그가 꽤 화를 낼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눈을 분주히 움직여 제일 효율적으로 슈나이더에게서 벗어날 루트를 찾고 있을 때였다.
“주제넘은 욕심을 가진 걸로 유명했다던데.”
슈나이더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 그를 쳐다봤다.
내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슈나이더의 얼굴에는 승리감이 퍼졌다.
“그래. 너 말이야. 결국 레이넌을 꼬여 냈으니 주제넘은 건 아닌가.”
그는 내게 한 발짝 다가와서는 음산하게 속삭였다.
나는 슈나이더의 눈을 곧게 바라보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실례되는 말씀이시군요.”
“실례라. 네가 보모가 되기 전에 말이지. 받은 월급보다 쓰는 돈이 훨씬 많았던 건 어떻게 설명할 셈이지?”
슈나이더의 말에 내 얼굴이 조금씩 굳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도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내가 빙의하기 전의 르네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것들이 옷장에 가득했으니까.
게다가 드레스가 아니더라도 원래의 르네는 돈을 꽤 흥청망청 쓴 듯했다.
본디 부유한 집안의 여식이 아닌데 그 돈은 모두 어디에서 난 걸까.
내가 르네가 된 이후로는 월급 이외의 돈을 받은 적이 없었다.
고민을 해 봤자 물어볼 곳도 없고, 답을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잊고 지냈는데.
슈나이더는 어떻게 알고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하는 거지.
혼란스러웠다.
“진짜라도 된 것 같나.”
“그게 무슨…….”
“곤란하지. 이제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얼굴로 고고한 공작 부인이 되는 건.”
머릿속이 복잡한 만큼 눈동자도 세차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드는지 슈나이더는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어 말했다.
“너를 지켜보는 눈이 여럿 있다는 걸 잊지 말도록 해. 에린과 마빈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야.”
“에린과 마빈? 그들이 그럼…….”
내게는 익숙한 이름들이었지만 슈나이더의 입에서 나올 만한 이름들은 아니었다.
“에린과 마빈이 슈나이더 공작님의 사람이라는 말씀이신가요?”
내 물음에 슈나이더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에린과 마빈이 누구 사람인지 몰랐다고?”
슈나이더의 반응을 보니 에린과 마빈은 그가 로에리안저에 심어 놓은 사람이 분명했다.
근데 왜 그는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라고 확신하는 걸까.
“네가 어떻게 에드윈의 보모 자리를 꿰찼는지도 모른다고 할 텐가?”
“제가 에드윈의 보모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꽤 그럴싸하군.”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서운 이야기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태도나 말은 꼭 나 역시 슈나이더가 심어 놓은 사람이라는 걸 전제로 하는 것 같지 않은가.
아니, 근데 왜 누구도 내게 어떤 식으로든 접근해서 지시를 내리거나 보상을 주지 않았지?
아무리 되짚어 봐도 없었다. 은밀한 친근함을 표현하는 이도, 알 수 없는 신호를 보내는 이도.
“혹시 저를 통해서 공작님을 흔들려는 생각이시면…….”
나는 슈나이더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그럴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레이넌과 나의 계약을 슈나이더가 알 리가 없었다.
그러니 나를 이용하면 레이넌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진실이든 아니든 내가 슈나이더가 심어 놓은 사람이라는 말 한마디로도 충분히 레이넌을 흔들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을지도.
내가 말을 끝맺지 못한 것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 때문이었다.
슈나이더는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곧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나를 내려다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들은 이야기가 없다고 발뺌하고 싶은 건가.”
“누구한테서 제가 뭘 들었어야 했죠?”
슈나이더는 계속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답답함에 그의 팔을 붙들고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떠보는 건지.
이 정도면 나를 세뇌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런 내 당황과 간절함이 그에게 느껴진 듯했다. 내 질문을 들은 슈나이더는 아주 잠시지만 낭패라는 얼굴을 보였다.
“그러니까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확실히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지자 슈나이더는 표정을 지우고 나를 무서운 얼굴로 내려다봤다.
칼날 같은 날카로운 눈빛에 정말 어딘가 찔리는 게 아닌가 싶어 겁이 난 순간 그의 시선에서 나를 구해 준 사람이 있었다.
“약혼녀에게 이렇게 따로 접근하는 건 불쾌하군요.”
“불쾌라니. 약혼 축하 인사를 잊어서 건넸을 뿐입니다.”
슈나이더는 레이넌에게 그렇게 대꾸하고는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가 등을 돌리기 전,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괜찮나. 뭐라고 하던가.”
“그러게요. 도대체 뭐라고 한 걸까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도대체 뭘 믿고 뭘 의심해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제가 들은 것 중에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에요. 에린과 마빈이 슈나이더의 사람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