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잡아먹을 생각밖에 없는 사람들이지. 서로 눈에 찰 리가 없어.”
“그런가요? 그래도 집안끼리 하는 결혼은 그런 부분이 어느 정도 있지 않나요?”
“그렇지. 하지만 저들은 협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
“보통은 최대한 적게 내어주고 많이 받아 오려고 하는데 두 사람 다 내어줄 생각은 없다는 건가요?”
“그래. 남의 손에 쥔 걸 모조리 빼앗아 오고 싶은 두 사람이니 절대 잘될 수 없는 조합이지.”
“그러고 보니 어제 벨라가 그랬죠? 공작님께서 크라우스가와의 거래를 모두 끊으셨다고.”
“그랬지. 아마 그래서 벨라가 먼저 슈나이더에게 접근했겠지. 하여간 어리석다니까.”
“그래도 두 사람이 손을 잡으면…….”
“걱정할 것 없어. 벨라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슈나이더는.”
레이넌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이 그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핏 보기엔 레이넌에겐 난감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는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저 정도로 사리 분별이 안 되는 줄은 몰랐는데.”
“정말 괜찮은 거예요?”
“그래. 조금 골치 아픈 건 사실이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야. 결국 이용만 당하고 그나마 남은 것도 모두 털리고 말겠지.”
“공작님이 그렇게 되는 건…… 물론 아니겠죠?”
잘은 모르지만 슈나이더의 잔혹함은 소설 속에서도 꽤 여러 번 언급이 되었던 걸로 기억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레이넌에게 확인하자 그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대가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야.”
확실히 내가 우려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물론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그에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터였다.
“그래도 그대가 걱정을 해 주는 건 꽤 기분이 좋은 일이군. 기왕이면 다른 일로 부탁하지.”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레이넌의 말은 딱히 거짓이 아닌 듯했다.
그는 정말 내 걱정이 마음에 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레이넌이 말을 이어 가려고 할 때였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모든 사람이 움직임을 멈추고 몸을 숙였다. 나와 레이넌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황제는 생각했던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
레이넌과 비슷한 또래로 보일 정도로 젊었다. 게다가 상냥한 웃음을 머금은 서글서글한 얼굴이 꽤 인상적이기도 했다.
황궁에 와서 여러모로 이미지가 달라진 사람이 많아진 것 같았다.
“다들 일어나라.”
그의 외모와 닮은 상냥한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고 알았다.
그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만큼 강력한 황제였다.
부드러운 목소리 아래에는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깔려 있었으니까.
역시 보이는 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올해도 무사히 건국제를 맞이한 데에는 그대들의, 무엇보다 제국민들의 노고가 크다.”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황제의 목소리만이 연회장을 채웠다.
그리 큰 노력을 하지 않는데도 목소리의 무게감으로도 모두에게 제대로 황제의 뜻이 전달되었다.
“건국제야말로 제국민 모두가 하나가 되어 즐길 수 있는 축제이니라. 허니 다들 그간의 시름은 잠시 미뤄 두고 오늘을 즐기도록 하라.”
잔을 들어 올리며 마지막 말을 하는 황제의 시선이 언뜻 내게 닿은 것만 같았다.
아니, 바라보는 것뿐만이 아니라 눈을 찡긋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아무래도 그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닌 듯했다. 내가 황제의 시선에 움찔한 것과 동시에 레이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한탄과도 같은 그의 말이 착각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황제의 연설이 끝난 이후 연회장의 분위기가 제대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흥겨운 사람들의 웃음과 우아한 목소리가 아름다운 악기들의 선율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 갔다.
“어머, 이 목걸이는 어떻게 구하셨어요?”
“올해 영지의 세금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따님이 사교계에 곧 데뷔한다지요. 다들 기대가 가득합니다.”
얼핏 들리는 내용은 하나같이 좋은 이야기뿐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웃으며 자랑하고 축하하는 대화 속에 묘한 기 싸움이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지도 않고 지나가다가 슬쩍 들은 것만으로도 피곤해졌다.
그때 주변이 조금씩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황제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탓이었다.
“이런 날이어야 겨우 보는 얼굴이군.”
“송구합니다.”
황제는 친근하게 레이넌에게 말을 걸었다. 레이넌은 슬쩍 고개를 숙이며 담담히 대답했다.
“송구하지도 않으면서 여전히 말은 잘하는군.”
황제는 웃으며 레이넌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자 레이넌은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도 올해는 참석이라도 했군.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까.”
“안 그랬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꼭 참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이넌의 대답에 황제는 재밌다는 듯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아주 쪼잔한 황제인 줄 알겠어. 예를 들면 옆에 있는 네 약혼녀라든지.”
“쪼잔하시다니요. 그저 폐하께선 기억력이 남들보다 훨씬 좋을 뿐이시죠.”
웃는 얼굴로 하는 말들은 어쩐지 꽤 무시무시한 것들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긴장한 채로 말하는 사람을 바라보다 보니 절로 그렇게 되었다.
그때 황제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대군. 레이넌의 약혼녀가.”
“르네입니다, 폐하.”
이런 분위기에 관심이 나에게 집중되는 건 별로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도망칠 수도 없는지라 고개를 숙여 나를 소개했다.
“그래. 레이넌이 사랑에 눈이 멀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다들 미친 게 아닐까 싶었는데…….”
황제는 말을 하다 말고 레이넌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곧 작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르네, 자네에겐 내가 고맙다고 해야겠군.”
고맙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해서 눈만 동그랗게 떴다.
다행히 황제는 보이는 것만큼이나 상냥한 성격인지 묻지 않아도 내게 설명을 해 주었다.
“레이넌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되리라곤 상상을 해 본 적도 없었으니 말이야. 어떤 면에서 그가 이렇게 절절매는지 알 것 같기도 하군.”
절절맨다니……. 아주 큰 착각이십니다.
차마 말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대신 속으로만 아주 크게 소리쳤다.
“예전부터 레이넌이 이런 것에 아주 약했지.”
“이런 것이라니요.”
“아, 실례했군. 이제까지 사람은 없어서 나도 모르게.”
“그쯤 하시죠.”
심상치 않은 대화가 오갔지만 이제 더는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내용과 달리 그들의 목소리도, 분위기도 아주 편안하였으니까.
아무래도 황제와 레이넌은 제법 친분이 있는 사이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휴가 때 갔던 별장도 황제가 레이넌에게 쓰라고 했다던가.
어쩌면 그저 친분 정도가 아닐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종종 인사라도 하러 오라고. 안 그러니 이렇게 만나면 쌓아 둔 이야기를 모두 하고 싶어지지 않나.”
“알겠습니다.”
레이넌이 순순하게 대답하자 그게 또 뭔가 황제의 즐거움이 된 모양이었다.
조금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는 끝내 한마디를 덧붙였다.
“확실히 예전부터 너는 저런 느낌에 약했지.”
“폐하.”
“알았어. 알았다고.”
황제의 장난은 으름장과 같은 레이넌의 부름이 나오고서야 끝났다.
“그보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럼 저는 잠시…….”
내가 들을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할 이야기가 있다는 황제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눈치껏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나를 막은 건 레이넌이었다. 레이넌은 그의 팔에서 빠져나가려던 내 손을 꼭 잡았다.
“제가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레이넌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보던 황제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이없는 걸 봤다는 듯이.
“그래. 그러도록 해.”
그는 짧은 대답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을 보니 아마 다음번에는 오늘보다 더한 농담을 들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작님.”
“왜 그러지?”
주변을 살피고는 가까이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발끝을 들었다.
내 움직임을 알아챈 레이넌은 몸을 살짝 낮춰 줬다.
“꽤 친한 사이……이신 거죠?”
“그렇게 보이나.”
레이넌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허리를 세웠다. 그의 시선은 황제를 향해 있었다.
황제는 느긋한 걸음으로 옆에 있는 사람들과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받으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공작님께서 꽤 편하게 대하시는 것 같아서요. 폐하야 어떤 분이신지 저야 잘 모르지만.”
“어렸을 때는 종종 어울려 놀던 사이였지. 그리 비밀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다시금 허리를 낮췄다. 그리고 얼굴을 가까이 해서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폐하나 나나 그때는 비슷한 처지였으니까. 결국 둘 다 이렇게 되어 버렸군.”
이건 확실히 비밀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다. 그런 느낌이었지만 레이넌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목소리 끝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비슷한 처지였고, 둘 다 이렇게 되어 버렸다니.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물을 수도 없었다.
내가 물어도 되는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 그에겐 꽤 아픈 과거처럼 들렸다.
게다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절한 장소도 아니었고.
물어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궁금증은 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레이넌이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야기해 주지.”
“그래도 괜찮나요?”
놀라서 물었지만 레이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사연이지만.”
그 말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사연은 아니라는 걸.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에리안 공작님.”
“아,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사람 좋은 할아버지 느낌의 누군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레이넌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지만 사실 꽤 반가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하시군요. 이렇게 딱딱한 목소리로 사람을 반기는 건 공작님이 유일하실 겁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슈나이더의 건강 이야기를 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레이넌을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도 그렇고, 이 사람은 역시 그와 꽤 가까운 사이인 듯 보였다.
“여기는 타나베른 후작, 여기는 제 약혼녀 르네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후작님. 르네입니다.”
레이넌의 자연스러운 소개에 인사를 했지만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정작 황제에게도 나를 소개하지 않았던 그가 아니었던가.
게다가 후작이라니. 레이넌이 제법 정중하게 존대를 하는 것으로 보아 당연히 공작은 되지 않을까 했던 내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레이넌이 딱히 나이를 우대하는 성격은 아니고……. 두 사람이 대체 어떤 사이길래 레이넌이 이러는 걸까
뭔가 그럴듯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레이넌이 내 궁금증을 풀어 주는 설명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