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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66)화 (66/129)

내 떨림이 레이넌의 손에도 전달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특별히 이상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파티 때문에 긴장한 것으로 여긴 듯했다.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레이넌은 내내 손을 붙들어 주며 나를 달랬다. 하지만 그게 내 떨림을 멈춰 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레이넌은 꾸준히 내 손을 토닥였고 제 곁에서 떨어지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던 마차가 멈추고, 거기서 내렸을 때는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번에야말로 당장 참석해야 할 파티 때문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찾은 황궁은 너무도 거대하고 또한 호화로웠다.

심호흡하며 숨을 고르자 레이넌은 내 손을 끌어 제 팔에 끼웠다. 그러고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긴장할 것 없어. 그냥 웃으면 돼. 여기서 가장 아름다운 건 그대니까.”

농담하듯 가벼운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그렇게.”

그는 조금은 안심한 듯 나와 비슷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로에리안 공작님, 그리고 그의 약혼녀 드십니다.”

연회장에 들어섬과 동시에 힘이 실린 목소리가 우리의 등장을 알렸다.

로에리안저에서 봤던 연회장과는 규모도, 외관도 비교할 수 없었다.

굉장히 넓은 공간이었지만, 아주 소소한 것까지 공들이지 않은 곳이 없어 보였다.

저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꾸며 놓고 관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그 때문일까. 어떤 장소에 방문했다는 것만으로 위압감을 느껴본 건 처음이었다.

또한 레이넌과 나의 등장을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순식간에 공기가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한순간에 내려앉은 정적과 이어지는 작은 술렁임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가자 레이넌은 그의 팔에 올려진 내 손에 제 손을 덮었다. 잠시 시간을 주는 듯 그대로 서 있던 그는 곧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더욱더 따갑게 닿았다. 물론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는 건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로에리안저에서 수없이 겪어 본 바 있었지만, 그때와 비교할 수 없었다.

시선에 담긴 날카로움과 매서운 감정은 피부에 닿음과 동시에 독이 되어 몸으로 퍼져 드는 것 같았다.

예전에 아멜리아가 앞으로 더한 일이 있을 거라고 말했던가. 이제야 실감이 났다.

레이넌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레이넌은 덤덤했지만 그의 시선을 받은 사람들은 슬쩍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르네.”

“네.”

“쓸데없는 호기심이 그대를 죽일 수도 있어. 늘 잊지 말도록 해.”

레이넌은 나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조언을 건넸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힘 있는 목소리는 그 조언이 내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네. 명심할게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은 이곳에 쏠려 있었다.

레이넌이 함께 있는 덕분일까. 조금씩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여유를 찾은 나도 천천히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세실과 아멜리아가 의욕을 불태우며 회의까지 한 이유를 찾았다.

하나같이 화려하고 눈부시게 꾸민 채 연회장을 누비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장신구를 쇼핑하던 때가 떠올랐다.

여기에 넘치는 아름다운 것들 역시 너무 예쁘고 반짝거리는 것들이 가득해서 오히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금세 질려 버렸다. 어제 야시장에선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 줄도 몰랐는데 여기는 달랐다.

이제 막 발을 들였는데 돌아가는 시간을 기다리게 될 정도였다.

“로에리안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웃으며 다가온 이들은 비슷한 인사를 레이넌에게 건넸다.

레이넌은 차갑게 대꾸했고, 눈치만 보던 이들은 결국 나에 관해 묻고 싶은 마음을 접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가 내내 당부했던 이야기대로였다. 레이넌의 옆에서 떨어지면 안 될 터였다.

그나마 레이넌이 있으니 다들 이렇게 물러나지만 그가 없다면 나 혼자 그들을 모두 상대해야 했다.

물론 그들은 레이넌에게 그랬듯 눈치를 보지도, 적당히 나를 봐주지도 않을 터였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레이넌에게 겁을 먹거나 그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니었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위를 잇고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중년의 남자가 레이넌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말했다.

격조 있는 말투에는 정중함이 담겨 있었지만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빛은 서늘하고 소름 끼쳤다. 알 수 없는 음습함이 그를 에워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레이넌은 그런 남자의 분위기에도 동요 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늙으면 기억력이 퇴화한다더니. 그 말이 정말인가 봅니다. 건강 잘 챙기셔야겠습니다.”

“내 건강까지 챙기다니, 여전하십니다.”

웃는 얼굴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었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듣고 있자니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내딛는 듯했다.

“저야 늘 공작의 건강을 염려하지요. 부디 언제까지고 건강하시길.”

레이넌은 염려인지 악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남자는 그대로 레이넌을 보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약혼했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소개도 해 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잠시 멈춘 사이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 우리의 앞에 자리 잡았다.

“유명한 로에리안 공작의 약혼녀를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벤자민 슈나이더입니다.”

슈나이더라니. 당황스러워 잠시 그대로 멈춰 있던 나는 얼른 그에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르네입니다.”

그가 먼저 인사를 하게 하다니. 당황한 나를 보고 슈나이더는 미소를 잃지 않고 말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로에리안 공작께서 소개를 해 주지 않으실 테니 아쉬운 제가 먼저 인사를 할 수밖에요.”

나를 위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신경을 긁는 말투였다. 레이넌을 바라보니 그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나는 슈나이더의 모습을 다시 눈에 꼼꼼히 담았다.

레이넌의 아버지뻘 정도일까. 나이도 그렇고 여러모로 이미지가 다른 사람이었다.

조금 뒤 슈나이너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꼭 나를 감별하기라도 하듯 그는 아래에서 위로 천천히 나를 살폈다. 스르륵 타고 올라오는 뱀과 같은 시선에 나도 모르게 레이넌의 팔에 매달렸다

그가 슈나이더라는 걸 몰랐더라도 확실히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볼일은 끝난 것 같군요. 그러면 이만.”

정중하지만 불쾌한 내색을 숨기지 않은 레이넌의 인사는 다시 한번 다른 사람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이렇게 또 뵙네요.”

벨라가 얼굴만큼이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다가왔다.

뭘 입어도 아름답지 않을 리 없을 그녀였다. 하지만 이렇게 작정한 듯 힘줘서 꾸미고 나타나니…….

“어지러워.”

“뭐라고요?”

보는 것만으로도 눈도, 머리도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흘린 감상을 벨라는 알아듣기라도 한 듯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또 뵈어서 반가워요. 어젠 즐겁게 구경하셨나요?”

혹시 정말 듣기라도 했을까 봐 얼른 화제를 돌렸지만, 이번에도 그리 성공적이진 않은 듯했다.

그녀의 외모만큼이나 화사하던 미소가 한순간에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어제의 기억을 되살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또 내가 뭔가 말실수를 한 걸까.

당황스러운 마음에 레이넌을 올려다봤다.

나를 내려다보는 레이넌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래서 알았다. 이번에도 딱히 상황에 맞는 말을 꺼낸 건 아닌 듯했다.

잠시 얼굴을 굳혔던 그녀는 금세 환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이틀이나 연달아 만나다니 보통 인연이 아닌가 보네요.”

상냥하게 말했지만 분한 목소리는 모두 감출 수는 없었다.

곧 숨을 크게 들이쉬며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 낸 그녀는 도도하게 걸음을 옮겼다.

벨라도 파트너와 함께 왔는지 그를 찾아 팔짱을 꼈다.

그녀의 상대를 확인한 순간 나는 입을 슬쩍 벌렸다. 꽤 놀라운 조합이었으니까.

반면 레이넌은 매우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말했다.

“이렇게나 가까운 사이인 줄은 미처 몰랐군.”

레이넌은 슈나이더와 팔짱을 낀 벨라의 팔을 흘깃 보며 말했다.

비웃음이 섞인 그의 말에도 벨라는 물론 슈나이더도 딱히 기분 나쁜 내색은 보이지 않았다.

“죄송해서 어쩌죠. 공작님과의 약혼이 긍정적으로 진행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제 눈에는 영 차지 않는 조건이라.”

호호호, 웃으면서 한 말은 꼭 그녀가 레이넌의 약혼 제안을 거절한 것처럼 들렸다.

아니, 그렇게 보이길 바랐던 모양이었다. 주변에 들리게끔 목소리를 크게 낸 것은 물론, 일부러 고개를 천천히 돌려 가며 말했으니까.

“그래서 슈나이더 공작과 약혼이라도 하려는 건가?”

“설마.”

“그럼요.”

레이넌의 덤덤한 물음에 슈나이더와 벨라의 대답이 갈렸다. 냉정하게 레이넌의 말을 부정한 슈나이더와 달리 벨라는 순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이넌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아무려면 어떻냐는 듯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지. 그게 뭐든 부디 좋은 결정이길.”

몇 번이고 진로를 방해받은 것이 짜증이 났던지 이번에 레이넌은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다.

“피곤하지는 않나?”

“아……. 네. 생각했던 것보단 괜찮아요.”

뭔가 말하던 벨라의 목소리는 레이넌의 물음에 묻혔다. 이 정도면 레이넌이 벨라나 슈나이더는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다급하게 다가오는 벨라의 구두 소리가 들렸지만 슈나이더가 그녀를 붙든 것 같았다.

그들에게서 꽤 멀어지고서야 레이넌은 걸음을 멈췄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작님과의 약혼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왜 슈나이더와 함께 있는 거죠?”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모양이지. 당연히 나와 약혼하리라 소문은 났는데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에드윈의 보모였던 제가 공작님의 약혼녀가 되었고요.”

내 말에 레이넌은 재미있다는 듯 나를 내려다봤다.

“그래. 그것도 그녀의 자존심을 꽤 아프게 했겠지. 하지만 그대도 재밌군. 직접 그렇게 이야기할 줄이야.”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뭐, 그렇지. 그보다 나는 그대가 이제 이런 흐름을 조금씩 읽을 줄 알게 되는 게 뿌듯하면서도 서운하군.”

“뿌듯하면서 서운……. 그 모순되는 감정은 뭘까요?”

“글쎄. 아직 그것까지 읽어 내지 못하는 걸 보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군.”

“혹시 놀리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지만 말끝에 살짝 묻어난 웃음기가 전혀 그렇게 들리지 않게 만들었다.

놀리는 거라고 해도 좋았다. 아니, 오히려 다행일지도 몰랐다.

슈나이더를 만나고도 기분이 딱히 나빠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런데 벨라는 왜 하필 슈나이더와 약혼할 거라고 한 걸까요? 게다가 슈나이더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무슨 사이지?”

“언제든 서로 물어뜯고 뜯길 사이겠지. 약혼은 무슨.”

레이넌은 코웃음을 쳤다. 어림도 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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