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작 비싸고 좋은 보석이나 장신구에는 시큰둥하더니. 이런 걸 좋아했나.”
“아……. 무척 예쁘긴 한데 너무 반짝거리는 것만 모아 놓으니까 오히려 눈이 안 가는 것 같아서요. 고를 수가 없잖아요.”
“그랬군. 다음부터는 몇 개만 엄선해서 가져오라고 하지.”
“이미 충분히 많은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유행은 언제나 빠르게 바뀌는 법이지.”
“……네.”
“그리고 그땐 나도 함께 골라 보는 것도 꽤 재미있겠군.”
“네?”
“오늘 즐거웠다는 이야기야.”
“아. 저도…… 엄청 즐거웠어요. 일부러 시간을 내어 데려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내 인사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런 인사는 필요 없다는 듯이.
“나는 그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 물론 다치지 않기도 바라고.”
“네.”
갑자기 확 바뀐 주제에 의문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런 시간을 즐긴다는 것도 이제는 알았고, 가능한 한 그대가 편안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게 해 주고 싶어.”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배려해 주고 계신데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나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 서툴러. 그러니 혹시 내가 알아채지 못했다면 그대가 말해 줘. 그대가 불편하거나 싫은 것이나.”
레이넌은 잠시 말을 멈추고 팔을 뻗어 내 등을 감싸 안았다. 조금씩 느껴지는 힘에 몸을 맡기니 어느새 그의 품 안이었다.
“그리고 그대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뭐든.”
좋아하는 것. 그 말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르네, 대답해야지.”
레이넌은 대답을 재촉했다.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아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살짝 굳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실수한 건가 싶어 고개를 들려는데 레이넌의 손이 내 머리에 닿았다.
그대로 있으라는 뜻인 것 같아 조금 더 몸에 힘을 풀고 편안히 그에게 기댔다.
“르네, 그렇게 해 주겠나?”
“……네. 그럴게요.”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미 가까워질 거리도 없는 상태였지만 레이넌과 더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나를 붙들고 있던 레이넌은 그래도 아쉬운 듯 아주 천천히 나를 품에서 꺼냈다.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군. 이상하지?”
“아…….”
레이넌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한시름 놓았다는 듯 편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까.
그 미소가 너무도 근사해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꼭 지키도록 해.”
“네.”
나는 여전히 레이넌의 미소에 홀린 채로 멍하니 대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만족한 듯 더 짙은 미소를 보였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얼굴에 그의 미소도 서서히 내게 다가왔다. 이마에 그의 입술이 닿은 순간 잠시 숨을 멈췄다.
다행히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금세 그는 얼굴이 모두 보일 정도의 거리로 떨어졌다.
“역시 잘 어울리는군.”
레이넌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더니 그 한마디를 남기고 방을 떠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오래달리기를 한 것처럼 숨이 차오를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이마에 손을 올렸다. 동시에 온몸에 화끈거리는 감각이 일었다.
하지만 손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오래도록 만지작거렸던 머리카락으로 옮겨 갔다.
이리저리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왜 굳이…….”
그냥 주기만 해도 될 것을. 왜 굳이 묶어 줘서…….
더 빠르게 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 그대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내일 오스틴을 불러야지.”
그래야 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스틴을 불러 진료를 받아야 했다.
칼슨을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내 건강에 이상이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몸이 멀쩡한 거면…….”
틀림없이 마음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
잠은 분명히 들었지만 정신은 멀쩡히 깨어 있는 듯한 밤을 보냈다.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레이넌의 모습과 귓가에 맴도는 그의 목소리로 좀처럼 깊게 잠들 수가 없었다.
역시 오스틴을 불러 진료를 보는 일이 시급했지만 나에겐 그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제껏 나를 무척이나 바쁘게 했던 파티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참석하는 건 레이넌과 나뿐이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저택의 모든 이가 바삐 움직였다.
“에린은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세실은 드물게도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불평을 토로했다. 유달리 바쁜 날이어서 그녀도 조금은 예민해 보였다.
“지금 에린 찾을 시간이 어딨어? 귀걸이 한 짝이 없어. 얼른 찾아와.”
“알겠습니다.”
세실의 불만을 단번에 꺾은 건 아멜리아였다. 그녀 역시 제법 정신이 없는 듯 분주히 움직이느라 바빴다.
늘 여유로운 아멜리아에게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일 만큼 아멜리아와 세실은 의욕이 넘쳤다.
“그동안 늦게까지 회의를 한 보람이 있네.”
흐뭇한 목소리로 아멜리아가 말하자 세실 역시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역시 오늘은 이 드레스만 한 게 없어요. 르네 님이 가장 돋보이실 게 분명해요.”
“가장 돋보이면 곤란한 거 아닐까?”
기세에 눌린 나는 작게 지적을 해 봤지만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드레스와 최적의 조합인 장신구를 찾겠다고 눈에 불을 켠 아멜리아와 세실을 막는 건 힘들어 보였다.
“그보다 둘은 언제 늦게까지 회의를 한 거야? 그럴 시간이 있었어?”
다행히 이 질문에는 착실한 대답이 돌아왔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했죠.”
“네. 시간은 언제나 활용하기 나름이니까요.”
“하하……. 둘 다 엄청 의욕이 넘치네.”
그들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중간에 에린이 합류했지만, 그녀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아멜리아와 세실은 엄청난 호흡을 보여 주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단장을 이어 갔다.
모든 준비가 끝난 후 거울 앞에는 나도 본 적이 없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옅은 푸른색의 드레스는 허리 아래에서부터 넓게 퍼졌고 작은 보석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얼핏 보면 보석 가루를 뿌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머리는 드러난 어깨를 더 돋보이게 했다.
게다가 하늘하늘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분명 모아서 봤을 땐 부담스럽던 보석은 하나씩 자리를 찾으니 자칫 밋밋할 수 있는 분위기를 화사하게 돋웠다.
가장 놀라운 건 얼굴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려고 하자 아멜리아도, 세실도 기겁하며 나를 말렸다.
“얼마나 공을 들인 건데요.”
“그럼요. 이것보다 티가 확 나도록 하는 화장이 훨씬 더 쉬울 거예요.”
얼굴을 만져 혹시 화장이 흐트러지기라도 할까 걱정스러운지 둘은 다급하게 자신들의 노력을 강조했다.
“아, 미안.”
화려한 화장이 아닌데 오히려 그래서 시선이 더 얼굴로 향했다. 단정하면서 청초한 분위기로 자칫 드레스에 묻힐 뻔했던 나를 잘 살려 주었다.
“둘 다……. 전문가네. 완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놨어.”
낯선 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넋을 놓은 채로 얼떨떨하게 말하자 둘은 기쁘게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이렇게까지 잘 소화하시다니 저희가 다 뿌듯하네요.”
그때 거울 속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레이넌이었다.
몸을 착 감싼 정복과 깔끔히 넘긴 머리칼은 그를 한층 더 단단하고 고급스럽게 보이게 했다.
매일 보는 레이넌이었지만 그 역시 오늘은 아주 달라 보였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레이넌 역시 나와 비슷한 얼굴로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레이넌은 나를, 나는 레이넌을 보고 있었다.
한참 나를 살피던 그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레이넌과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라 몸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레이넌이 나보다 빨랐다.
“유능한 시녀를 두었군. 그대의 매력을 잘 살렸어.”
레이넌의 손가락이 드러난 내 목선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에 갑자기 어젯밤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내 머리카락을 묶어 주던 바로 그 순간으로.
시야를 꽉 채웠던 단단한 그의 가슴, 묵직한 체향, 머리카락을 간질이던 그의 작은 숨…….
그리고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손길, 목덜미에 슬쩍 닿았다가 금세 떨어지던 그의 손가락까지 모두 선명하게 떠올랐다.
살갗에 온전히 닿은 그의 손가락 때문일까. 아니면 어제의 기억 때문일까.
숨 쉬는 것조차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넌의 손가락은 느릿하게 움직여 내 어깨에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우아하면서도 귀여운 매력을 가진 분은 르네 님밖에 없을 거예요.”
아멜리아의 뿌듯한 목소리에 레이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신구도 과하지 않게 잘했군.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레이넌은 말을 멈추고 상체를 아래로 낮췄다. 내 얼굴 바로 옆에 그의 얼굴이 자리하고서야 레이넌은 움직임을 멈췄다.
볼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가 흩어졌다.
어깨에 머물렀던 그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느릿하고 여유롭게 팔을 타고 내려간 레이넌의 손가락은 내 손에서 멈췄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볼과 귀에 닿는 그의 숨결에, 그리고 손가락에 은근히 닿은 그의 체온에.
“이 반지군.”
레이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내렸다. 금방이라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의 시선과 손가락이 닿은 곳은 내 약지였다.
내 손의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레이넌의 손에서는 나와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장갑도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르네 님 손이 너무 예뻐서요. 오히려 장갑이 없는 편이 반지도 더 눈에 띄고 르네 님의 여린 선도 돋보일 것 같아요.”
“잘했어. 마음에 드는군.”
레이넌은 어떤 지적도 없이 아멜리아를 칭찬했다. 흐뭇한 미소를 숨길 생각도 않고서.
곧 레이넌은 고개를 돌려 거울 밖의 나를 바라봤다.
그는 언젠가부터 늘 그랬듯 다정하고도 애정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요즘 들어 나를 헷갈리게 했던, 바로 그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지만 시선은 마주치지 않는 채였다. 그대로 레이넌도, 나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둘만의 시간이 따로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슬슬 출발하셔야 합니다.”
멈춘 시간을 되찾아 준 이는 로만이었다. 레이넌은 몸을 세우고는 내 앞에 섰다.
“그렇다는군.”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 닿기 전, 내 손이 떨리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다. 물론 그의 손을 잡은 후에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역시 무슨 일이 있어도 오스틴의 진료부터 받아야 했었다. 고집이라도 부려볼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아무래도 이 긴장은 파티 때문이 아닌 듯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