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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잘 키워보려고 했을 뿐인데 (64)화 (64/129)

“아멜리아?”

그녀는 내 부름에 나를 바라봤지만 대답할 여력은 없어 보였다. 잠시 입을 막았던 손을 치웠지만 곧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로만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가 들썩이는 걸 봐선 웃고 있거나 애써 웃음을 참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인 듯 보였다.

다른 이들의 상황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애써 다른 곳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는 모습이라 누구도 제대로 된 답을 줄 것 같지 않았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아멜리아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웃음이 멈추지 않아 말을 끝맺는 데는 평소보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쉰 아멜리아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괜한 말에 상처받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니까요.”

힘겹게 내뱉은 말은 나를 위한 설명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아멜리아에게 다시 물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노력은 거기서 끝이었기 때문이었다.

말이 이어질수록 다시금 새어 나오기 시작한 웃음은 말을 끝맺자마자 다시 터져 버렸다.

“그래. 그 말이 맞는 것 같군.”

그나마 레이넌이 가장 먼저 평정을 찾았다.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그렇게나…….”

로만 역시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지만, 거기까지였다. 뭔가가 떠올랐는지 말을 채 마치지 못했다.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잘게 떠는 모습을 보니 그 역시 웃음을 참는 것이 힘든 모양이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여러분의 상태가 이해가 안 되는데요. 누군가 설명이 가능하신 분은 안 계신가요?”

분명 내내 함께 있었는데 나만 모르는 일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향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이 웃는 이유가 나임은 확실했다.

모두를 향해 물었지만 내 눈은 레이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나마 그가 유일하게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인 듯 보였으니까.

“르네 님이 무던한 성격이라 정말 다행이에요.”

레이넌은 내 시선을 받고도 미소만 지을 뿐 어떤 대답도 해 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대신 대답은 아멜리아에게서 나왔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기는 했지만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줄 만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웠다.

“그래서 뭔데. 나 뭐 실수한 거야?”

이번에는 아멜리아도 대답을 제대로 해 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다른 사람을 찾아야 했다.

아무래도 여기 있는 모두를 통틀어 가장 냉정하고 확실하게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이는 역시 그밖에 없었다.

“로만?”

“자존심이 굉장히 상했을 겁니다.”

“누가?”

“크라우스 아가씨 말입니다. 공작님이 부리는 저희와 같은 취급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응?”

“게다가 르네 님이 너무 해맑게 말씀하셔서 더 화가 났을 테지요.”

“아. 그럼 내가 한 말이…….”

아멜리아나 로만이 나에겐 가까운 사람이라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애초에 신분이나 계급으로 사람을 나누는 게 여전히 익숙하지도 않기도 했다.

그래서 벨라가 함께 구경하는 게 특별히 방해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말이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더욱이 벨라의 자존심을 건드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작게 새어 나온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레이넌은 내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잘했어.”

“그럼요. 잘하셨어요. 앞으로도 그렇게만 하시면 걱정 없겠어요.”

레이넌의 위로와 같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멜리아도 거들었다.

그녀의 말은 위로라기보다는 뭔가 전투적으로 들린 건 착각이 아닐 터였다.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는 아멜리아의 눈빛은 주변까지 태워 버릴 것처럼 강렬했으니까.

심지어 로만도 흐뭇한 얼굴을 하고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걸 다들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쩐지 그래서 더욱이 그들은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만 하는 게 어떻게 하는 건데…….”

한탄과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쩌면 나에겐 다행인 말이기도 했다. 특별히 뭔가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격려처럼 들렸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 어렵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냥 지금 이대로 지내면 될 것 같군.”

“지금 이대로…….”

레이넌 역시 아멜리아와 비슷한 대답을 내어놓았다. 이제 더 묻는 것도 지쳤다.

“아쉽지만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벨라가 나타날 정도면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날지도 모르겠군.”

“그런가요?”

“여기 오는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나타나지 않았나. 또 다른 사람을 마주친대도 놀랍지 않겠지. 그리고 그자는 분명 반갑지 않은 사람일 테고.”

“네.”

나는 짧은 대화만으로도 벨라의 자존심을 크게 상하게 했다. 다른 누군가가 나타났을 때 또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니 누군가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면 레이넌의 말대로 얼른 돌아가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터라 아쉬움이 크게 밀려들었다.

순순히 대답은 했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을 레이넌은 금세 알아챘다.

“아쉽겠지만 그래도 꽤 즐기지 않았던가. 시간은 넉넉했으니.”

“그랬죠. 좋았어요, 정말.”

조금 전까지 보냈던 시간이 아득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레이넌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대신 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마차를 타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거리를 다시 지나가야 했다.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무렵, 레이넌은 조용히 말했다.

“축제는 내년에도 열리니까 그렇게 아쉬워할 필요는 없어.”

나직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목소리를 지나쳐 귓가에 닿았다.

예상하지 못한 말에 그를 올려다봤지만 레이넌은 앞만 보고 있었다.

내년? 과연 내년에도 함께할 수 있을까.

당연하다는 듯이 미래를 기약하는 레이넌의 말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게다가 그 말을 한 레이넌의 얼굴이 꽤 편안해 보여 더 싱숭생숭했다.

한참을 나를 바라보지 않는 레이넌의 옆모습만 보며 걸었다. 그는 마차에 도착할 때까지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차 앞에 서서 그는 나를 돌아봤다. 한참을 다른 곳으로 향해 있던 시선이 내게 닿는 그 순간 마음속에서 뭔가가 부풀기 시작했다.

풍선에 바람이 들어간 것처럼 마음속을 꽉 채운 알 수 없는 감정은 곧 이리저리 바삐 움직였다.

그와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의 움직임에 숨이 가빠졌다.

“아, 정말 요즘 왜 이러지?”

“무슨 일 있나?”

나를 탓하는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놓치지 않고 걱정스럽게 나를 살피는 레이넌의 모습은 다정했고, 그래서 조금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돌아갈까요?”

지금 나를 심란하게 만드는 이 감정의 정체를 알아차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눈물 대신 미소를 선택했다. 생긋 웃으며 말하자 레이넌은 잠시 나를 살피더니 함께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흔들리는 마차는 바삐 달렸고, 그만큼 축제로 즐거운 거리는 빨리 멀어졌다.

꽤 유쾌한 시간이었다. 잊고 지냈던 일상적인 소소한 행복을 잠시 만난 것 같기도 했다.

더불어 또 즐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특별한 추억을 만든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추억을 곱씹던 나는 공작저가 가까워진 때가 돼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마차를 타고서도 레이넌의 손을 내내 잡고 있었다. 늦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빼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꼼지락거리며 그의 손을 빠져나가려던 찰나, 레이넌이 손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리저리 빼 보려고 했지만 레이넌은 더 단단히 나를 붙들 뿐이었다. 포기하고 힘을 풀자 그제야 레이넌의 손에도 힘이 풀렸다.

공작저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지나면 이 손도 놓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한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하니 뭔가 어색해 견딜 수가 없었다.

빼려는 건 아니었지만 이리저리 꿈틀대는 내 손가락을 레이넌은 모른 척해 주지 않았다.

괜찮다는 듯 그는 다른 손으로 내 손을 토닥였다.

그게 더 내 마음을 복잡하게 한다는 걸 레이넌은 절대 알지 못하겠지.

나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두근거림을 안고 공작저에 도착하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

레이넌은 내 방에 도착할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방문을 열고서야 그의 손은 떨어졌고, 겨우 숨통이 트이는 느낌에 얼른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겨우 그런 시간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내 착각이었다.

레이넌 역시 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레이넌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뭔가 화젯거리를 찾는 듯한 모습에 의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공작님?”

“음…….”

잠시 입을 달싹이던 레이넌은 말하기를 포기했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건…….”

윤기가 흐르는 고운 보라색 리본을 보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에드윈의 것을 사면서 내 것도 살까 싶어 잠시 만지작거렸던 것을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레이넌은 그 말과 함께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가슴이 눈에 가득 들어찼다.

곧 레이넌의 서늘한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직접 묶어 주기라도 할 듯 그는 조심스럽게 내 머리칼을 한데 모았다.

서툴기 그지없는 손놀림이었다. 그가 내 간호를 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작게 웃었다.

“처음이라 그래. 금방 배우는 편이라고 전에 말했을 텐데.”

“네. 그때 생각이 나서요.”

그때는 참 난감했는데 지금 떠올리니 꽤 재밌는 추억이 되어 있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물수건을 이마에 얹는 경험을 또 언제 할 수 있을까.

레이넌은 생각만큼 잘되지 않는지 작게 혀를 찼다. 머리카락이 조금씩 흘러내리는 것을 봐선 아마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았다.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갈무리하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의 손이 내 목덜미와 귓가를 스쳤다.

머리칼을 쓸듯이 스쳐 지나가는 손길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아픈가?”

“아니요. 그건 아닌데…….”

“쉽지 않군.”

몇 번이고 그의 손길이 스치고 난 후에야 겨우 머리를 묶을 수 있었다.

조금 세차게 흔들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아 조심스럽게 레이넌을 올려다봤다.

레이넌은 제 솜씨가 만족스럽지 않은 듯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아서. 하지만 그대에게 잘 어울리는군.”

“고맙습니다.”

이리저리 나를 살펴보던 그의 얼굴에는 곧 뿌듯함이 묻어났다. 서툴게 묶긴 했지만 그대로 내 머리 위에 안착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걸까.

떨어지지 않는 레이넌의 시선에 조금 민망해진 나는 리본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촉감이 손에 감겨들었다.

“감사합니다. 언제 사셨어요?”

“틈이야 만들면 언제나 있지.”

물론 리본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보다 레이넌의 성의가 더 고마웠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자꾸 미소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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