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목소리로 건네 온 인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예상치 못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어……?”
낯익은 얼굴에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갔다. 반가움과 당황스러움, 그 어딘가에서 갈 곳을 잃은 손은 레이넌이 거두었다.
공중에 뜬 손을 잡아 레이넌은 그녀를 보지 못한 것처럼 다른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
하지만 우리 앞을 가로막은 그녀는 생긋 웃으며 내 손을 꼭 붙들었다.
“요즘 화제의 중심에 선 분이시네요. 이런 곳에서 뵈니 더 반갑네요.”
“아, 저도 반갑습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레이넌은 그녀에게서 내 손을 거칠게 빼냈다.
“여전히 예의가 없군, 벨라 크라우스.”
“공작님도 여전하시네요. 그리고 오늘은 공작님이 아니라 공작님의 약혼녀분께 인사를 드리고 싶은 것뿐이라서요.”
용건은 레이넌이 아닌 나에게 있다는 뜻을 명확히 하며 벨라는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물론 레이넌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재빨리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순간 벨라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 더 아끼시나 보네요. 이렇게 티 내면 좋을 게 없다는 걸 뻔히 아시는 분이.”
“그대는 한가한가 보군. 이럴 여유는 없을 줄 알았는데.”
레이넌의 말에 이번만큼은 벨라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미소를 지운 얼굴에는 냉기가 흘러넘쳤다.
“갑자기 저희 집안과의 거래를 일절 끊으셔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하시더니. 이제 시녀와 약혼이라…….”
무슨 말인지 따라갈 수 없었던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옆으로 내밀었다.
레이넌에 의해 일부 가렸던 시야가 트이자 벨라의 표정이 더욱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고작 저런 시녀 하나 때문에 제가 참 우스운 꼴이 됐네요.”
고작? 저런 시녀?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앞에 두고 대놓고 욕을 하나?
기분은 나빴지만 그렇다고 그녀와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정 표현은 입술을 삐죽거리는 정도였다.
그런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던 벨라는 입술을 삐뚤게 끌어 올렸다.
살벌한 눈빛으로 나를 비웃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는 없었다.
여기서 눈을 피하면 그녀가 원했던 트집거리를 내어줄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으니까.
“그만 좀 보지.”
벨라와 나의 눈싸움을 멈춘 건 레이넌이었다.
으름장을 놓듯 엄중한 목소리에 벨라는 헛웃음을 흘렸다.
“다정도 하셔라.”
“언제부터 거리에서 축제를 즐겼다고. 괜히 수작 부릴 생각하지 말고 가던 길이나 가지. 더 우스운 꼴 되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공작님이야말로 언제부터 축제를 즐기셨다고요? 파티도 겨우 참석하시면서.”
벨라는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일까. 점점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사나운 눈빛을 주고받느라 바빴다.
“그럼 이렇게 하죠!”
갑작스럽게 내뱉은 말에 레이넌도, 벨라도 나를 바라봤다. 한순간에 몰린 시선에 멋쩍을 새도 없었다.
금세 다시 팽팽한 긴장감 속에 갇힐 것 같았기에 얼른 말을 꺼냈다.
“같이 구경할까요?”
내 물음에 레이넌도, 벨라도 비슷한 얼굴을 했다. 황당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아니, 어차피 여기서 이렇게 마주쳤으니까 또 이런저런 말이 돌지 않겠어요?”
“그래서요?”
벨라는 도도하게 되물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다시 레이넌이 날 선 말을 꺼내려는 것 같아 내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차라리 사이좋게 구경이나 하자고요. 그 편이 서로한테 좋을 것 같은데.”
벨라는 내 말에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요것 봐라?
말로 하지 않아도 그녀의 생각이 그대로 읽히는 웃음이었다.
어디 그뿐일까.
무슨 재주로 레이넌을 꼬드겼나 했더니. 이런 재주가 다 있었네.
이런 속내도 모두 읽을 수 정도였다. 결국 그녀는 나를 향한 멸시를 숨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원숭이가 어디까지 재주를 부릴 수 있나 지켜보는 것 같았다. 팔짱까지 끼고 내려다보는 표정까지 완벽했다.
재주 부리는 원숭이 취급보다 나를 짜증 나게 한 건 그녀의 태도였다.
벨라는 나를 그 정도로 하찮게 여긴다는 생각을 조금도 감출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선 약혼녀로 물망에 올랐다가 갑자기 밀려난 것이 기분 나쁠 수도 있었다.
더욱이 그녀가 말한 대로 ‘고작 시녀에게’ 뒤처진 것이 아닌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당사자를 앞에 두고 저렇게 무시를 하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녀와 같은 대응을 할까 아주 잠깐 고민하던 나는 마음을 바꿨다.
그간 레이넌의 곁을 맴돌며 쌓아 온 표정 관리 및 아부 스킬이 내게 있지 않은가.
나는 벨라와 반대로 환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주 맑게.
내 미소를 보고 잠시 멈칫했던 그녀는 이내 한심하다는 듯 조소를 짙게 지었다.
벨라는 곧 놀아줘 볼까, 라고 말하듯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그럴까요, 그럼?”
“싫은데. 방해받는 것 같아서.”
하지만 레이넌은 벨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대답을 딱 잘랐다.
벨라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걸 본 나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둘 다 자리를 당장 떠날 생각도 없고, 기 싸움을 멈출 기세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모습을 잘 숨겨 나오긴 했다.
하지만 한 장소에서 오래, 게다가 이렇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면 알아보는 사람이 한 명쯤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아멜리아도, 로만도 이제껏 같이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늘면 더 즐겁지 않을까요? 같이 구경해요.”
레이넌을 설득하는 편이 빠를 것 같았다. 그래서 가볍게 건넨 말이었는데 내 말을 들은 레이넌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동시에 벨라는 인상을 찌그러트렸다. 이제까지 본 것 중 가장 격한 반응이었다.
손은 물론 몸도 잘게 떨리고 있는 걸 봐선 내가 방금 한 말이 그녀의 기분을 어지간히 상하게 한 듯 보였다.
다시 곱씹어 봐도 특별히 그럴 만한 말은 아니었다. 물론 그럴 의도 역시 전혀 없기도 했다.
“그렇지. 아멜리아나 로만처럼 생각한다면 상관없겠군. 같이 가도록 하지.”
한순간에 태도를 바꾼 레이넌 역시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물론 벨라는 레이넌의 말에 더 화가 치밀어 오른 듯 보였다. 입술을 꽉 깨물고 화를 참아 봤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듯했다.
감정을 숨길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자존심을 다친 모습이었다.
도대체 뭐가 그녀를 이렇게나 화나게 했을까.
“모처럼의 제안이지만 저도 바빠서.”
매서운 벨라의 눈길은 꼭 잡아먹기라도 할 듯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그녀는 쌩하니 등을 돌렸다.
전에 봤던 우아한 걸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였다.
“바쁘다면서 꽤 오래 있지 않았어요?”
굳이 먼저 말을 걸지를 않나, 그냥 가려던 레이넌을 막아선 것도 그녀였다.
이제 와서 바쁘다니. 의아한 마음이 일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레이넌에게 속삭였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주 날카로운 얼굴을 하고 나를 돌아봤다.
들었나 보네. 괜히 그녀의 눈빛에 움찔한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같이 구경해요! 오늘 즐거웠어요.”
애써 밝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게 오히려 그녀에게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킨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뺨 한 대 내려칠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는 무섭게 내게 다가섰다.
하지만 딱 한 발짝이었다. 거리가 제법 있었지만 레이넌이 앞으로 나온 것만으로도 그녀의 걸음을 멈추는 데는 충분했다.
그것만으로도 분해 죽겠다는 듯이 벨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다음에 또 만나죠. 기대되네요.”
웃으며 말했지만 이를 악문 목소리는 보통 형형한 것이 아니었다.
다음에 만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는 건 착각일까.
벨라는 곧이어 도도하게 등을 돌리고 거침없이 멀어졌다. 조금씩 그녀가 멀어지면서 나를 옥죄어 오던 그녀의 기운도 함께 사라졌다.
“제가 너무 격의 없이 말한 건가요?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죠?”
나는 뒤늦게 레이넌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그는 내 손을 감싸며 흡족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아주 적당했어. 이런 자리에서 뭔가를 바라는 쪽이 잘못 아닌가. 게다가 먼저 방해까지 했으니 오히려 그대가 잘한 일이겠군.”
“그 얘기는 격의 없이 이야기한 건 맞는다는 말인 거죠?”
레이넌은 평소보다 긴말로 나를 칭찬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는 뜻이었다.
역시나. 큰 실수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긴 하지만, 신경 쓸 것은 전혀 없어. 아니, 오히려 잘했다니까. 앞으로도 저 여자는 웬만하면 무시하도록 해.”
이 무슨 모순되는 대답인가. 그렇지만 하나만큼은 공감할 수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웬만하면 상대하고 싶지 않네요.”
“그러면 좋겠지만…….”
레이넌은 말을 흐리며 미묘한 웃음을 보였다. 꼭 나를 걱정하는 듯한 그 얼굴이 시사하는 바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곧 만날 일이 있다는 뜻이네요.”
말을 내뱉은 순간, 그녀와 만날 만한 이벤트 하나가 떠올랐다.
“건국제 파티. 거기에 당연히 그녀도 오겠네요.”
“그래. 하지만 워낙 사람이 많으니 마주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지. 물론 작정하고 덤벼들 것 같지만 그냥 무시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 사람이 그렇게 많은 곳이라니 오히려 다행이네요. 보는 눈이 많으니 대놓고 해코지는 하지 않겠죠.”
“사람이 없어도 그렇게 두지는 않지.”
레이넌은 은근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의 얼굴에는 흐뭇함이 묻어나서 나로서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참 알 수가 없단 말이야, 그대는.”
“네? 무슨 말씀이세요?”
레이넌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대답을 피하려는 모습은 아닌 듯 보였다.
다만 입꼬리가 들썩거리는 것이 웃음이 터지려는 걸 애써 참는 것 같았다.
“일단 자리부터 옮기지.”
혹시 잘못 본 게 아닐까, 했던 생각은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사라졌다.
흔들리는 목소리 사이에 웃음이 가득 담겨 있었으니까.
레이넌은 다시 한번 나를 내려다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재빨리 시선을 내게서 떼어 냈다.
일부러 나를 보지 않으려는 듯 그는 몇 번이고 내게 고개를 돌리려다가 앞을 바라보길 되풀이했다.
그러고는 먼 곳을 바라보며 다른 때보다 걸음을 빨리 움직였다.
어쩐지 가벼워 보이는 그의 발은 조금씩 으슥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목소리도 서서히 멀어졌다.
그만큼 거리를 밝혔던 빛과도 멀어져서 가까이 있는 사람의 얼굴이 겨우 보일 정도로 어두워지고서야 그는 걸음을 멈췄다.
주변을 둘러봐도 이제 지나가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어둠과 스산하게 부는 바람 때문일까. 괜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던 나는 레이넌의 팔을 끌었다.
“공작님, 여긴 너무 어둡고 무서워요. 얼른 돌아가요.”
하지만 레이넌은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작은 목소리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아멜리아와 로만도 있으니 함께 둘러보자고…….”
꽤 심각한 목소리로 그는 내가 아까 한 말을 되뇌었다. 혹시 뭔가 큰 실수를 한 걸까 싶어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어둠이 내려앉은 공기를 뚫고 레이넌의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다.
꽤 유쾌한 듯한 그의 웃음을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의 웃음도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레이넌만큼 속 시원하게 웃는 사람은 없었다. 터질 것 같은 웃음을 참느라 끅끅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난데없는 상황에 나는 눈만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아멜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녀는 못 참겠다는 듯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마 입을 막은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지도 몰랐다.